루 리드의 완벽한 날(Perfect day)은 일종의 역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하루에 웃으며 루 리드를 떠올린다
팝 역사의 가장 변화무쌍한 시기를 경험하며 담담히 털어놓는 속내


▲ 1960~1970년대 록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보컬리스트 루 리드(Lou Reed)
지루함은 창작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역사의 수많은 발명품, 그 중에서도 특히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모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인류가 창조했다고 나는 믿는다.

고대 최초의 예술작품(!)으로 평가되는 스페인 북부 칸타브라아 산 알타미라 동굴 속 벽화도 어느 비오는 날, 사냥을 나가지 못한 원시인들의 무료와 권태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원시인들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히며 잠도 오지 않는 긴긴 밤의 무료함과 권태를 견디어 냈을 것이다. 물론 확인할 수 없는 나만의 상상이다.

지루한 날엔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Perfect Day)'를 듣는다. 소박한 피아노와 드럼의 연주로 시작되는 이 곡은 마치 더 이상 세상에는 신기하고 놀라운 것 따윈 없다는 듯이 말을 걸어온다. 그래서 완벽한 날이라는 제목은 일종의 역설 같다.

루 리드

연주의 패턴이나 루 리드의 보컬엔 일말의 과장도 기교도 없다. 노래를 듣는 내내 1970년대의 햇빛 가득한 하루, 맨발로 도시를 터덜터덜 걸어 다니는 무욕한 히피를 떠올리게 된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아랍인을 향해 총을 쏜 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권태에 가득 찬 주인공도 떠오른다. 묘한 경험이다.

팝 역사상 가장 격렬한 시기였던 1960년대와 70년대에 활동한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Velet Underground)는 동시대 앤디 워홀과의 협업을 통해서 하나의 문화적 흐름을 만들어 낸 팀이다. 루 리드는 존 케일과 함께 실질적으로 팀을 이끌던 리더였다.

팝아티스트 앤디워홀(왼쪽)과 루 리드

그렇다면 기성세대와 벌인 청춘의 가장 격렬한 전투인 68혁명의 시기와 폭발하는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었던 70년대 펑크의 시대를 모두 경험한 한 남자에게 과연 '완벽한 날'이란 어떤 의미일까?

'정말 완벽한 하루에요. 공원에서 상그리아를 마시고 나서 날이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가요. 정말 완벽한 하루에요. 동물원에서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고, 영화를 보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요.'

전쟁터에서 쓰러져간 병사들이 원했던 단 한 가지는 단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는 문장이 떠오른다. 드라마란 결국 엉망이 되어버린 일상을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한 주인공의 분투라는 어떤 평론가의 말도 생각난다. 팝 역사의 가장 변화무쌍한 시기를 경험했던 루 리드는 담담히 속내를 털어놓는다.

공원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동물원에 가고, 영화를 보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완벽한 하루라고. 아무 것도 할 일 없는 무료하고 심심한 하루, 어제와 다른 것 없어 권태로운 오늘, 그러나 평화롭게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완벽한 하루라고, 지난 시대의 록커는 노래한다.

온 종일 쇼파에 누워 루 리드의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고대 동굴에 벽화를 남겨놓은 어느 무료한 원시인과 혁명의 시대를 정면으로 뚫고 나온 한 록커에 대해 생각했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는 인류 최초의 예술작품을 만들어 냈고, 격렬한 시대의 변화 속에서 청춘을 보낸 누군가는 지루함이야말로 곧 완벽함이라고 노래한다. 결국 삶이란 하나의 정답 따윈 없는 각자의 해석의 문제인 걸까?

우린 모두 원시인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젊은 날을 보냈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무작정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신기해 했다. 또래의 친구들과 의미 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낄낄거리며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모든 것이 다 심심해서 벌어진 일들이다.

그러다 조금씩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던 어느 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하루를 기다리게 된다. 지루함은 평화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목적 없이 걷던 거리에서 돌아갈 집을 꿈꾼다. 비로소 루 리드의 퍼펙트 데이에 공감을 표하게 되는 순간이다. 나이 들었음이다. 그러나 더 깊어진 것이라 말하긴 뭐하다. 어쩌면 그냥 지쳐버린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8,000m 14좌에 올랐던 라인홀트 메스너는 고비 사막을 종주한 뒤 이렇게 말했다. "더 지혜로워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떠나기 전보다 조금 더 늙었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날들이 많아진다. 어찌되었건 그래서 참 좋다.

◆ 김태훈은 음악을 듣고, 글을 쓴다. 방송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팝 칼럼니스트가 본업이다. 대부분 책을 읽고 이것저것 끄적이며 혼자 시간을 보낸다. 2015년엔 김부겸 전 국회의원과의 대담집인 '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를 출간 했으며, 2016년엔 쿠바 여행기를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