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전직 월가 애널리스트가 한국에서 로보어드바이저(Robo-Advisor·로봇자문가) 회사를 설립했다. 로보어드바이저 회사 에임(AIM)의 이지혜(35) 대표는 “고액 자산가와 기관투자자의 전유물이었던 자산관리를 누구나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1월 29일 서울 청담동에서 만난 이지혜 에임 대표는 “모두를 위한 전문 자산관리(professional investment management for all)’를 제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로보어드바이저란 투자금 규모와 성격, 목표수익률 등 투자자 정보를 바탕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빅데이터를 분석, 포트폴리오 자문과 운용을 해주는 온라인 자산관리서비스다. 모바일 기기를 몇번 터치하는 것 만으로 누구나 손쉽게 자산 관리를 받을 수 있다. 수수료는 기존 운용 수수료보다 70% 이상 낮다.

미국은 로보어드바이저가 운용하는 자산이 2020년 2조2000억달러(약 2631조원)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등 로버어드바이저를 활용한 투자자문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다. 웰스프런트(Wealthfront), 베터먼트(Betterment)등 전문 로보어드바이저 업체들이 시장을 키워나가고 있고 블랙록, 뱅가드, 피델리티 등 전통 금융회사들도 관련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한국의 로보어드바이저 시장은 걸음마 단계다. 이 대표가 지난해 설립한 ‘에임(AIM∙Automated Investment Management)’은 국내 로보어드바이저 시장의 포문을 연 벤처기업이다.

지난 1월 29일 오후 서울 청담동 AIM 사무실에서 만난 이 대표는 “로보어드바이저의 장점은 소액 투자자가 저렴한 비용으로 자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라며 “2월 중으로 투자일임업(투자 위임을 받아 자산관리를 해주는 사업) 등록을 마무리 하고 4월에 정식 서비스를 출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에임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투자 전략은 간단하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투자자의 위험 성향을 분석한 후 수익성이 가장 높은 2500여개의 상장지수펀드(ETF)에 분산 투자한다. 컴퓨터가 투자자문을 하므로 수수료가 저렴하다. 이 대표는 “2.6% 수준인 수수료·보수를 0.3~0.5% 정도로 낮출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시작한 시범서비스의 반응도 좋다. 돈을 맡기겠다는 투자자만 1500명, 모인 자금만 930억원에 달했다.

이 대표는 인터뷰 내내 환한 표정이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유년 시절부터 최근 창업까지의 이야기를 이어갔는데, 듣다 보니 어느덧 창밖에 해가 지고 있었다.

◆발명가를 꿈꾸던 소녀, 월스트리트에 가다

이 대표는 이력이 남다르다. 지난해 로보어드바이저 회사 에임을 창업하기 전까지 미국 월스트리트의 자산운용사와 헤지펀드, 컨설팅 회사, 벤처캐피탈(VC)을 두루 거쳤다. 그는 “다양한 경험이 창업에 필요한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외고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간 후에 공대에 진학했다. 방향을 튼 배경은.

“어릴 적 꿈이 발명가였는데 외고(한영외고)를 다니면서 잠시 잊고 살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가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사 간 곳이 1990년대 말 실리콘밸리였다. 캘리포니아주(州) 프리몬트라는 동네에 살았는데 인근에 야후, 마이크로소프트, 썬 등의 기업들이 있었다. 발명에 대한 꿈을 되찾고 공학박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공학 전문대학인 쿠퍼유니온대를 1999년에 진학했다.”

-공학박사 대신 월가를 택한 이유는.

“부모님이 미국에서 운영하던 회사가 파산하면서 집안이 망했다. 다니던 쿠퍼유니온대도 닷컴 버블 때 투자를 잘못해서 재정 위기에 빠졌다. 160년간 장학금으로 운영해 온 대학이 하루아침에 재정난을 겪는 것을 보면서 공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아무리 좋은 발명이라도 사람들 손에 쥐어줄 수 없다면 단순히 발명에 그치는 게 아닐까, 집안이 망했는데 도움이 될 지식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경영학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교 2학년 때 교환 학생으로 서울대 경영대에서 재무를 배웠다. 자본의 흐름을 배우면서 사회와 가장 밀접하게 숨쉬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금융 안에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분야를 찾게 된 계기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금융을 하고자 자산운용을 택했다. 자산운용이야 말로 나 하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산도 불려서 꿈을 이뤄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월가에서는 어떤 일을 했는지.

“대학을 졸업한 2003년, 씨티그룹 에셋매니지먼트에 입사했다. 미국 운용사들은 학부 출신을 곧바로 안 뽑는데 운이 좋게도 그 회사 퀀트(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고 객관적 수치만 이용하는 계량분석 금융기법)팀에 빈자리가 났다. 현재 피델리티운용 CIO인 학교 선배가 “22살 아시아계 학생이 있는데 열심히 산다”며 그 자리에 나를 추천했다. 연봉 5만5000달러(6583만원)를 받고 들어가서 일을 배웠다. 첫날부터 1000만달러 이머징마켓 펀드를 던져줬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년병 시절이어서 매일 밤새며 신나게 일했다.

2006년에 회사가 팔리면서 퀀트 전문 헤지펀드인 아카디안(Acadian Asset Management)으로 옮겼다.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한 자동화 시스템을 만들어 전 세계 자산에 투자하는 곳이었다. 20명의 인력이 100조원을 운용했다. 5년 동안 아카디안에서 트레이더로 일하면서 자동화 기술을 익혔다. 당시 종목간 인수합병(M&A)이 발생했을 때 의사결정을 자동화해주는 솔루션을 직접 개발했는데, 아직도 아카디안에서 사용하고 있다.”

◆스타트업에 눈을 뜨다

-월가를 떠나게 된 계기는.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만 일을 하니 내가 하는 일이 누구한테 도움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갈증이 생겼다. 대부분 업무를 컴퓨터가 자동으로 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에 일단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버드대에서 계량경제학을 공부하고, 뉴욕대에서 MBA를 했다. 그 과정에서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에 관심이 생겨 미국 액셀러레이터인 테크스타에서 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시장과 산업을 개척하는 스타트업에 매료되면서 창업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창업을 돕는 일을 하다가 직접 창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은.

“한국에 와보니 여성이 벤처캐피탈리스트나 창업가로 활동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특히 IT나 금융 분야는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어 섣불리 진출하기 어려웠다. BCG에서 컨설턴트로 1년 간 일하면서 미래를 구상했다. 일단 벤처캐피탈에서 창업하는 기업들을 조금 더 접해야겠다는 생각에 더벤처스로 이직했다.

원래 목표는 해외 시장으로 뻗어나갈 역량이 있는 기업을 발굴해 지원하는 것이었다. 더벤처스에서 커뮤니티 플랫폼 ‘빙글’ 일을 도우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적합한 회사를 발굴하는 대신 직접 창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업 아이템을 찾는 과정에서 웰스프런트(Wealthfront), 베터먼트(Betterment)등 전문 로보어드바이저 업체들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월가에서의 경험을 살리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였다. 고민 없이 바로 시작했다.”

국내 로보어드바이저 시장 개척

에임은 4월 정식 서비스 출시를 앞두고 국내 대형 증권사 한 곳, 중견 증권사 한 곳과 협업 관계를 맺고 막바지 준비 작업에 한창이다.

“최근에 로보어드바이저 관련 규제가 완화되면서 사업이 탄력을 받고 있어요. 정식 서비스가 출시되면 사용자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업무보고에서 로보어드바이저 활성화를 위해 그동안 대면으로만 가능했던 자문계약을 온라인(비대면)으로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비대면 자문계약이 가능해지면 투자자와 자문사가 직접 만날 필요 없이 온라인으로 투자자문을 받을 수 있게 된다.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 대표는 “2월 중으로 법인을 설립하고 4월에 출시하는 자문형 서비스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최종 목표는 해외 시장 진출이다. 이 대표는 “미국과 유럽, 중국, 인도 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이라며 “서비스 확장과 해외 시장 진출에 필요한 투자금 유치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에임의 시범 서비스에는 930억원이 넘는 자금이 몰렸다.

-에임이 생각하는 로보어드바이저란.

“모두를 위한 전문 자산관리(professional investment management for all)'다. 그동안 전문 자산관리는 고액 자산가와 기관투자자들만의 영역이었다. 과거 월가에서 일할 때도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고액 자산가의 고민은 ‘어디에 돈을 맡기면 원하는 수익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소액 투자자는 그런 고민조차 하지 못한다. 전문 투자사에 대한 정보도, 자금도 부족해 자산 관리를 받기 어렵다. 로보어드바이저는 그 진입장벽을 허무는 기술이다. 컴퓨터의 힘을 빌리면 누구나 자산을 증식하고 관리할 수 있다.

사용법도 간단하다. 스마트폰 앱에 투자자의 자산, 연봉, 목표 수익률, 위험 성향, 자녀교육, 내집마련, 학비마련 등의 항목을 기입하면 컴퓨터 프로그램이 알아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주식·채권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한다.”

-국내에도 다양한 로보어드바이저 회사들이 생겨나고 있다. 에임의 장점은.

"로보어드바이저는 자동화 기술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기술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 로보어드바이저는 알고리즘(연산규칙)을 기반으로 데이터를 정리해서 고객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예전에 월가에서 하던 일과 다르지 않다. 7년간 월가에서 자동화 알고리즘을 만들고 운영해왔기 때문에 경험과 노하우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지난해 10월에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성과는 어떤가.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다. 운용액이 5개월 만에 900억원을 넘어섰다. 지난해 10월에 모의 투자를 통해 고객에게 공개한 수익률은 위험 성향에 따라 2~5%였다. 같은 기간 코스피지수가 1%도 오르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좋은 성적이다. 시범 서비스를 통해 개별 투자자들의 위험 성향이 다양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저위험이나 고위험을 추구하는 투자자보다 그 사이에 분포된 고객들이 많다.”

-한국 로보어드바이저 시장은 어디쯤 와 있는지.

“이제 시작 단계다. 제도적·산업 구조적인 한계를 극복해나가는 중이다. 이미 앞서나간 미국 시장과는 격차가 있다. 로보어드이저는 크게 2가지 일을 한다. 하나는 투자자의 위험 성향을 파악한 후 어울리는 자산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 두 번째는 시장 상황에 맞춰 실제 자산을 사고파는 일이다.

미국 로보어드바이저 회사들은 자산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일과 자산을 사고파는(트레이딩) 일을 함께 한다. 우리나라는 로보어드바이저가 자산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증권사가 트레이딩 업무를 맡는다. 증권사의 비용 구조를 뒷받침해줘야 하는 구조라 수수료가 기대만큼 낮아지지 않는다. 하나로 묶여있어야 할 사업이 나뉘어 있으니 비효율적이다.

-4월 정식 서비스 이후 사업 계획은.

“서비스 확산에 주력할 계획이다. 목표는 현재 운용액의 20배, 투자자는 2만명이다. 미래에는 모바일로 자산관리를 받는 일이 페이스북에 접속하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지 않을까. 장기적으로 자산관리 분야의 페이스북이 되는 게 목표다.

사용자 입장에서 페이스북은 일종의 맞춤형 서비스다. 페이스북은 사용자의 성향을 분석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타임라인에 노출시킨다. 콘텐츠 공급자에게 페이스북은 하나의 유통망이다. 기사로 예를 들면, 일반 사용자에게 페이스북은 맞춤형 기사를 볼 수 있는 일종의 언론이고 언론사에게 페이스북은 기사를 많은 이들에게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에임이 지향하는 것도 이런 매개(medium) 역할이다. 개인의 자산관리를 돕는 조력자인 동시에 관련 자산관리 알고리즘과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나 사람들에게는 기술을 적용해볼 수 있는 플랫폼으로 거듭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