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랑 사귄다고?) 그 애는 단순한 컴퓨터가 아니야.”

영화 ‘그녀(Her)’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자신의 인공지능 운영체제(OS)인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실체가 없는 그녀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 스토리는 영화가 개봉한 2013년만 해도 현실감이 떨어진 주제였다. 하지만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이 고도화되고 가상현실(VR) 기기가 등장하면서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서동일 볼레크리에이티브 대표가 가상현실(VR) 기기인 ‘오큘러스리프트’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 모니터에는 볼레크리에티브가 개발 중인 VR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여주인공 모습이 표시돼있다.

서동일 대표(40)가 이끄는 볼레크리에이티브(VoleR Creative)는 음성인식과 VR기술을 더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발하고 있다. VR화면 속 여자친구에게 ‘안녕(Hi)’ 인사를 하면 웃으며 반응하는 식이다. 여자친구의 말에 답을 안하면 “내 말 들리니?(Do you hear me?)”라며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지난 4일 찾은 서울 강남구 볼레크리에이티브 사무실은 서 대표를 비롯한 9명의 개발자가 게임 개발을 위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엔씨소프트, 넥슨, NHN엔터테인먼트 등 국내 대형 게임사 개발자 출신이다.

서 대표는 세계 VR 업계에서 주목받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 2014년 페이스북에 2조1500억원에 인수된 VR헤드셋 전문기업 오큘러스의 공동창업자다. 현재 오큘러스를 이끄는 브랜든 이리브(Brendan Iribe)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서 대표의 전 직장(스케일폼) 상사이기도 하다.

◆ “VR의 가장 큰 경쟁력은 고효율·저비용·시간과 공간의 파괴”

- 왜 VR 게임을 개발하게 됐나?

“게임은 가상현실(VR)과 가장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콘텐츠입니다. VR 시장 초창기에는 게임 산업에서 VR을 가장 많이 활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미 일본 소니도 플레이스테이션4 VR 용으로 연애 게임 등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VR의 가장 큰 특징은 사진·동영상 등 2차원(2D) 디스플레이가 줄 수 없는 현장감과 몰입감입니다. VR은 게임은 물론 여행, 교육, 영화, 공연, 군사분야 등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VR을 활용해 자신의 경험도 남길 수 있습니다. 미래에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나 사진이 아닌, 타임머신을 타고 실제 현장에 간 것처럼 VR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컴퓨터와 사랑에 빠진다는 게 가능합니까?

“대도시화되면서 사람들 간의 소통이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사람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스마트폰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소통합니다. 결국 외로운 사람들이 많이 늘게 됩니다. 인공지능과 VR의 조화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성인식률 향상, 소통방법 학습, 고화질 디스플레이 등 남은 과제가 많지만, 인공지능이 인간과 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시기가 온다면 충분히 컴퓨터 속 가상의 인물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볼레크리에이티브 개발자가 VR 기기를 착용한 뒤 가상 연애 게임의 프로토 타입을 소개하고 있다.

- 언제쯤 시장에 나올까요?

“아직은 초기단계지만, 2018년 완성작에서는 가상현실 여자친구와 완벽히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사용자의 취향에 맞춰 여자친구의 외모도 꾸밀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센서장갑 등을 이용하면 실제 여자친구와 손을 잡듯 데이트도 즐길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기술의 강점은 학습입니다. 인공지능을 가진 가상의 여자친구와 오랜 기간 소통할 경우 실제 사람의 만남처럼 서로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 VR이 주목받는 이유는?

“사실 아이폰에는 혁신이 없습니다. 아이폰의 터치스크린 액정이나 카메라는 이미 있던 기술이고, 음악 역시 하드디스크(HDD)를 기반한 MP3라는 제품이 있었습니다. 모바일 운영체제(OS)인 iOS도 사실 컴퓨터인 맥OS를 스마트폰에 최적화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폰은 기존에 있던 기술을 새롭게 조합해 새로운 사용자경험(UX)을 제공했습니다. VR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스마트폰에는 고해상도 디스플레이, 트래킹, 자이로 센서 등이 탑재됐습니다. 콘텐츠 제작툴인 ‘언리얼 엔진’도 이미 게임 산업에서 보편화한 기술입니다. 하지만 오큘러스의 VR 헤드셋인 리프트는 보편화한 기술에서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제공합니다.”

- VR의 성공 요인은?

“VR의 강점은 고효율, 저비용, 시간과 공간의 파괴 등 3가지입니다. VR을 활용하면 해당 장소에 가지 않아도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운전면허를 따거나 군사훈련을 받을 때 날씨에 따라 실습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VR을 이용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차량의 배기가스, 탱크 포사격으로 인한 산림훼손, 사고 위험 등 부수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시간, 공간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저비용에 효율을 높일 수 있죠”

- VR이 산업계의 미치는 영향은?

“VR의 발전은 산업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최근 스마트폰 기술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디스플레이 기업들이 더는 해상도로 승부하지 않습니다. 4.7~5.7인치 수준의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에서는 화질을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결국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와 같은 기업들의 기존 시장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VR 시장의 경우 아직도 해상도가 낮아, 디스플레이 시장의 ‘제2의 호황’이라는 새 기회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래픽 솔루션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래픽칩 회사들이 새로운 고성능 그래픽칩을 만들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하지만 VR 시장이 발전할 경우 그래픽칩, 컴퓨터 관련 부품과 세트 제조사 등이 다시 한번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됩니다. 일반 게임은 초당 30~60프레임을 보여주지만, VR은 60~120프레임으로 개발해야 몰입감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높은 연산처리 능력을 보유한 고성능 하드웨어가 필요합니다.”

◆ 오큘러스 공동창업자 서 대표…“VR, 韓 먹여살릴 기술될 것”

- 오큘러스를 공동창업하게 된 계기는?

“2013년 한국을 찾은 이리브가 호텔방에서 휴대폰 박스 정도 크기의 디스플레이가 달린 기기를 보여줬습니다. 기기를 눈앞에 대는 순간 높은 절벽 끝자락과 마주쳤습니다. 긴장감과 함께 손에 땀이 나기도 했습니다. 생전 처음 겪는 VR 사용자경험(UX)에 놀랐지만, 미래에 VR이 대세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함께 회사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받고 오큘러스로 합류하게 됐습니다. 저는 한국 지사장을 맡아 오큘러스 VR헤드셋에 사용되는 디스플레이와 게임, 동영상 등 VR 콘텐츠 수급을 담당했습니다.”

오큘러스 리프트를 사용하면서 몰입감과 현실감에 감탄하는 미국 소비자의 모습

- 오큘러스를 그만둔 이유는?

“오큘러스에 근무하면서 수많은 콘텐츠 개발 회사를 만나, 가상현실 기술을 준비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기업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VR 시장이 성장하는 것을 확인한 뒤 뛰어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업참여에 굉장히 수동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결국 VR 시장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콘텐츠가 필요했고, 직접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창업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 페이스북이 오큘러스를 인수하면서 백만장자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하) 처음부터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돈이나 명성은 열심히 일하다 보면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신문에서 백만장자가 됐다고 표현했는데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만 평생 먹고 살 만큼은 번 것 같습니다.”

- 볼레크리에이티브의 비전은?

“한국 사람이 오큘러스의 공동창업자인 것만 봐도 VR은 한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는 산업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과 개발비 문제 때문에 대부분 업체가 가상현실 콘텐츠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 시작하지 못한다면 VR의 주도권을 중국이나 일본에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오큘러스를 떠나 볼레크리에이티브를 창업하게 됐습니다. 볼레크리에이티브를 세계 최고의 VR 콘텐츠 기업으로 만드는 게 제 목표입니다.”

-VR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한국은 전통적으로 게임, 문화 콘텐츠가 강한 국가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온라인·모바일 게임 개발사들이 성공작들을 출시해왔습니다. 그래픽 수준도 세계 최고로 꼽힙니다. 또한 문화도 영화나 드라마 등 세계적으로 한류(韓流) 바람을 일으킬 만큼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VR 성공의 핵심은 ‘콘텐츠’입니다. VR 헤드셋은 VR 콘텐츠라는 새로운 혁명을 일으키는 도구입니다. 결국 하드웨어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콘텐츠 확보가 관건입니다. 한국은 게임, 문화기업을 비롯해 디스플레이, 센서 등 많은 VR관련 기업이 존재하는 만큼 VR이 한국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산업군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