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감사한' 배우이자 '선하고 따뜻한' 인간 박보검
짓궂은 남학생부터 사이코패스 살인마, 외유내강 소꿉친구까지
"모든 배우가 롤모델, 좋은 점 다 내 걸로 만들고 싶어"…"인생 마지막 역할은, 왕?"

드라마 종영 후 태국 푸켓으로 포상휴가를 떠났다가,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찍고 돌아온 배우 박보검은 “조명이랑 메이크업으로 가렸는데 (피부가) 많이 탔다”며 웃었다.

순백이 가장 잘 어울려 보이는 박보검은, 알고 보면 새까만 어둠도 제 것처럼 소화해내는 배우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에서 그는 순진한 동네 친구 ‘택이’였다. 욕이라고는 한 마디도 모를 것 같은 말간 얼굴에 순진한 눈망울, 가느다란 몸, 느리고 차분한 목소리를 지닌. 영화 ‘차이나타운’에 함께 출연한 대선배 김혜수는 그를 “노루 같다”고 표현했다.

화면 밖에서도 박보검은 택이처럼 바른생활 청년이다.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인 ‘90도 인사’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유명세를 얻고도 여전히 예의 바른 그의 태도를 간증하는 팬들의 후기를 인터넷에서 쉬이 찾을 수 있다.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졸린 얼굴로 우유를 마시는 택이 이전에 박보검은, 매끈한 정장 차림으로 입꼬리만 올린 채 차갑게 웃는 살인자였고(드라마 ‘너를 기억해’), 빚쟁이에게 맞아 쓰러지고도 눈빛만은 도전적인 셰프 지망생이었으며(영화 ‘차이나타운’), 능청스럽게 연적을 약올리는 ‘엄친아’ 첼리스트였고(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 관심 있는 여자애에게 짓궂게 장난 치는 남학생이었다(영화 ‘차형사’).

올해로 스물넷, 배우 6년차. 이제는 주연급 배우이자 대세남(男)이 된 박보검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짙은 녹색 니트와 청바지를 입고 흰 운동화를 신은 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전매특허인 90도 인사를 건넸다. “오래 기다리시진 않으셨어요? 피곤하진 않으세요?” 웃는 얼굴로 다정하게 묻는 그를 보니, 왜 팬들이 ‘만화책에서 걸어나온 주인공 같다’고 표현했는지, 단번에 알겠다.

◆ “저는 ‘어남편’…택이와는 외유내강인 점이 닮았죠”

“어, 나야?”

‘응팔’ 막바지에야 본인이 ‘덕선(혜리)’의 남편 역할이란 걸 안 박보검은 “되게 신기하면서도 어리둥절했다"고 말했다. “저는 처음에 제가 남편이 될 줄 몰랐거든요. 제가 어쩌다 남편이 됐네요. 그래서 ‘어남편’(웃음).”

박보검은 19·20화를 찍을 무렵, 과거를 회상하는 2015년의 ‘덕선 남편’에 대한 설명을 보고 결말을 눈치챘다. 감독도 촬영진도 작품에 대해 철통 보안을 유지한 탓에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까지만 해도 현재 버전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 했다. 이미연이나 김주혁의 등장도 방송을 보고서야 알았을 정도다.

“후반부에는 A4 종이 쪽 대본으로 촬영했는데, 덕선이 남편의 상황에 대한 묘사가 돼 있었어요. ‘호텔에서 찍은 사진(극중 택이가 중국에서 열린 바둑 시합에 나갔을 때)’이라는 묘사가 나와서. 저도 ‘정환(류준열)’이가 남편이 될 줄 알았거든요. 제가 봐도 정환이가 멋있고 매력적이예요. 준열이 형은 남자가 봐도 설렐 정도로 연기를 잘하거든요.”

응팔 덕분에 큰 인기를 얻은 것에 대해서는 쑥스럽고 고마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워낙 따뜻한 작품에 출연해서 큰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응답하라’ 시리즈의 애청자로서 시리즈에 합류한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이전 출연작에서 박보검은 등장한 지 몇 분만에 죽는 단역이거나, 주인공의 어린 시절이거나, 삼각관계를 만드는 조연이었다. 사랑을 쟁취하는 남자 주인공 역할에 대한 욕심은 없었을까.

“누가 남편이 되든 덕선이가 행복해지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혼하면 평생 사는 거잖아요. 드라마 시작할 때 감독님께서 ‘너희들 모두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말씀해주셨거든요. (같이 출연한) 형들을 질투하거나 형들과 경쟁하려는 마음은 없었어요.”

택이의 매력으로 그는 ‘외유내강인 점’을 꼽았다. “실제 성격이랑 조금은 비슷해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고 몰입하고 집중하는 게 닮았다고 생각해요.” 바둑은 택이처럼 잘 하지 못하고, 이번 작품을 통해 배웠다고 덧붙였다.

1993년에 태어난 박보검에게, 극중 배경인 1988년은 미지의 세계다. “그때 노래를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노래를 들어도 어떤 감성인지 확 와닿지는 않아서 가족들한테 물어봤고요. 모르는 게 있으면 감독님께 그때그때 물어봤는데, 세심하게 지시해주셨어요. 게다가 작가님께서 대본에 별첨으로 작은 소품까지 설명을 해두셨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나 장면이 뭔지 묻자 “되게 많은데, 정말 많아요”라면서, 택이가 덕선에게 처음으로 애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장면부터 줄줄이 늘어놓았다.

“제가 ‘영화 보자, 우리’ 했을 때 너무 설렜어요. 정환이가 (덕선이에게) ‘하지마, 소개팅’ 할 때도. 덕선이가 ‘왜 나만 (이름이) 덕선이야, 왜 계란 후라이 안 줘’라면서 둘째의 서러움에 대해 말할 때랑 아빠가 택이에게 생일파티를 해줄 때도 뭉클했고요. 아, 친구들이 생일파티 해줄 때도 감동적이었어요. 한 장면 한 장면 놓칠 수 없는 게 많았어요. 그리고 또….”

연기자로 데뷔하고 연애를 한 번도 못 해, 실제로는 택이처럼 로맨틱한 대사를 할 기회가 없었다며 웃었다. “지금 좋아하는 분은 많죠. 여자 분도 있어요. 그런데 비밀이죠(웃음).”

◆ “박보검이 롤모델이란 얘기 듣고파"… “같이 작업한 감독님들 다시 만나고 싶어요”

배우로서 박보검은 욕심이 많다. 작품을 할 때마다 만나는 배우들의 좋은 점을 다 제 것으로 만들고 싶고, 어떤 역할이든 자신의 스타일로 표현하는 배우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롤모델도 없다.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만나는 선배님들이 다 제 롤모델이더라고요. 선배님들을 만나 뵙는 게 영광이고 그 분들과 눈을 보며 연기하는 것도 감사해서, 딱 한 분만 롤모델로 삼지 않기로 했어요. 나중에는 ‘박보검이 롤모델이다'란 말을 듣고 싶어요.”

응팔 덕에 인지도를 높였지만, 착한 이미지에 얽매일까, 다음 작품은 성공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저로서는 한 걸음 한걸음 나가는 거고, 한 획 한 획을 긋는 거 같아서 (택이 역할이) 걸림돌이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매 순간 그 역할에 맞게 최선을 다 하다 보면, 많은 분들이 인정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날이 올 테니까 (흥행에) 연연하지 않으려고 해요.”

2011년 영화 ‘블라인드'에서 김하늘의 동생 역으로 데뷔한 박보검. 그는 데뷔 초 인터뷰에서, 연기는 심리테스트 같아 항상 결과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요즘에는 연기가 재밌으면서도 어려워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연기를 하는 게 쉽지 않고, 선배님들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배우로서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 뭔지 물으니, 사탕 가게에 온 꼬마 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다. “되게 많죠! 교복 입고 청춘 로맨스도 찍어보고 싶고, 액션도 해보고 싶고, 코미디도 해보고 싶고. 하고 싶은 장르랑 역할은 많아요.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교훈을 줄 수 있는 작품과 역할을 하고 싶어요.”

어떤 걸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인가, 물으니 “어떤 게 나한테 잘 맞는지 찾고 있다"고 모범생 같은 답을 말했다가, 이내 “아니다, 어떤 옷 입어도 잘 어울리게 소화하는 모델들처럼 ‘어떤 역할을 줘도 자기만의 스타일로 잘 표현해낸다'고 칭찬 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속내를 드러낸다.

“아직 눈빛으로 연기하는 게 어려운데, 언젠가는 눈빛으로 말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을 갖고 싶고요. 그리고 지금까지 작업한 모든 감독님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요. 그 때와 지금 달라진 제 모습을 알고 계실 거니까, 예전에 감독님들이 (제게) 요구하지 못했던 걸 할 수 있게 됐을 거고.”

박보검의 차기작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영화, 드라마, 둘 다 하고 싶어요. 요즘 드라마 사전제작이 다시 유행인가봐요. 드라마 먼저 잘 마치고 영화도 찍고 싶어요.”

배우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맡는 역할은 어떤 게 좋을까. ‘마지막 역할'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듯, 박보검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그 나이와 목소리, 차림에 맞는 연기를 하고 싶어요. 뭐가 좋을까요? 추천해주세요. 딱 마지막으로 하는 역할? 너무 어렵다…. 왕이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