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타임워너·넷플릭스와 같은 미국의 거대 미디어·콘텐츠 기업들이 연이어 국내에 투자를 늘리거나 새로 진출하고 있다. 해외 자본이 국내 방송 채널 지분을 49%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한 법 규정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에 따라 작년 3월 사라지면서 외국 미디어가 국내에 봇물처럼 밀려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안방 시장을 지켜온 국내 미디어 기업들 사이에서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외국인 지분 제한 해제
시가총액 1780억달러(약 210조원)에 이르는 디즈니는 한국에서 SK플래닛과 설립한 합작 법인을 통해 '디즈니채널'과 '디즈니주니어채널'을 운영했다. 디즈니의 지분은 49%였고 1대 주주는 51%를 가진 SK플래닛이었다. 하지만 작년 9월 디즈니는 SK플래닛의 지분 전량을 인수하며 합작 법인인 디즈니채널코리아를 100% 자회사로 만들었다.
타임워너의 계열사인 터너도 지난해 애니메이션 채널 '카툰네트웍스'를 운영하는 합작 법인 '터너코리아'를 100% 자회사로 편입했다. 파트너사(社)인 중앙방송이 보유한 지분(51%)을 전량 사들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터너는 작년 말 한국에 터너애니메이션네트웍스코리아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신규 채널 '부메랑'을 선보였다.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내셔널지오그래픽은 한국 법인 NGC코리아의 지분을 33%에서 100%로 확대했다. 기존 최대 주주였던 CJ E&M의 지분을 모두 인수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작년 3월 이후 본격화하고 있다. 해외 자본의 국내 채널 소유 제한 규정이 폐지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디즈니와 터너, 내셔널지오그래픽 등이 연이어 한국 거점을 완전 자회사로 바꾼 것이다. 미국계 미디어 기업의 한국 지사장을 지낸 한 인사는 "미국 본사가 자금력과 콘텐츠가 풍부하기 때문에 한국 법인을 100% 자회사로 두고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거대 자본과 경쟁해야 하는 한국 미디어들
법적인 규제 때문에 한국 시장 공략에 소극적이었던 미국 미디어 기업들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 최대 유료 동영상 업체인 넷플릭스는 지난달 한국 시장에 진출한 상태다. 월 7~10달러를 내면 스마트폰과 PC, TV 등 여러 기기에서 드라마와 영화 등을 무제한 볼 수 있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넷플릭스는 또 영화 '설국열차'를 만든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에 제작비 5000만달러(약 601억원) 전액을 투자하기로 했다. 한국 콘텐츠까지 빨아들여 영향력을 키우겠다는 전략이다.
국내 방송 시장엔 지상파 3사 이외에 CJ E&M 등이 버티고 있다. CJ가 운영하는 채널 tvN은 최근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시리즈 하나로만 180억원 안팎의 수익을 냈다.
하지만 국내 1위라는 CJ E&M은 연간 매출이 1조3000억원대에 불과해 디즈니의 5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세계 30대 미디어 기업에 한국 기업은 한 곳도 없는 게 현실이다. 고려대 김성철 교수(미디어학부)는 "미국 거대 기업은 한국을 거점으로 삼아서 중국·동남아·일본 등 범아시아 시장을 공략할 것"이라며 "미디어 시장의 국경이 없어져 무한 경쟁 시대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거대 자본과 제작 노하우를 갖춘 미국 자본이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시장을 뒤흔들 수 있다는 것이다.
CJ 관계자는 "미국의 거대 기업과 경쟁하려면 국내를 벗어나 아시아의 최대 기업으로 성장해야 하지만 현재로선 쉽지 않다"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내수 시장을 뺏기기라도 하면 최악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