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자국 전기자동차 배터리 업체들을 보호하기 위해 LG화학, 삼성SDI 등 한국 배터리 제조사들을 견제하는 새로운 비관세 장벽을 만들어 논란이 되고 있다. 과거에도 중국 정부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LCD(액정표시장치) 등 여러 분야에서 예측 불가능한 보호무역 정책을 써왔는데, 이번에도 이런 구태가 재현된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중국 BYD가 만든 전기버스.

1일 전기차 배터리업계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이달 14일 전기버스 배터리 보조금 대상 품목을 중국 업체들이 주로 생산하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에 한정하기로 한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 배터리 제조사들은 80% 이상이 LFP만을 제조한다. 중국 업체들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NCM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다.

반면 세계 1위와 2위 전기차 배터리업체인 LG화학(051910)삼성SDI(006400)가 주력으로 생산하는 니켈코발트망간(NCM) 배터리는 보조금 대상 품목에서 제외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10월 중국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설립한 LG화학과 삼성SDI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중국에 매출 30%가량을 의존하고 있는 이들 업체가 이번 조치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관련 업계에서는 중국 정부에 뒤통수를 맞았다는 불만이 터져나온다. 한 관계자는 “이들 업체가 중국에 대규모 배터리 공장을 지은 것은 중국 정부의 전기차 시장 육성책에 따른 것이었다”며 “전기버스 보조금을 LFP에만 적용할줄 알았다면 대규모 현지 투자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자동차 전문가는 "중국 최대 전기차 제조사로 꼽히는 BYD가 LFP 배터리를 쓴다"며 "한국에서 현대자동차가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듯이 BYD가 중국 정부에 의견을 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의 이번 조치는 발효 한달 밖에 안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과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규정된 무역기술장벽(TBT) 신설 금지규정에 어긋난다. 그러나 한국 업체들은 중국의 보호무역 조치를 대놓고 비판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애플도 중국 정부의 보복을 우려해 샤오미의 특허 침해를 문제삼지 않고 있는데, 심기를 거스르면 추가 보복 조치가 있을 수도 있다며 속앓이를 하고 있다.

◆ "제재 예측 못해"…필요할 때마다 보호무역 앞세워

중국 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비관세 장벽을 자주 써왔다. 200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중국 정부로부터 가장 많은 반(反)덤핑 조사를 받은 곳은 미국 기업도, 일본 기업도 아닌 한국 기업이었다. 당시 미국이 13건 정도였는 데 반해 한국은 20건 이상에 달했다.

관세를 급격히 올리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자국 LCD 산업 보호를 위해 2012년부터 32인치 이상 LCD 패널의 관세율을 3%에서 5%로 높이는 등 보호무역 정책을 쓰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중국 현지에 생산공장을 마련해야만 했다. 중국 정부의 이런 울타리 안에서 BOE 등 중국 업체들은 대규모 투자로 점유율을 늘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HS는 2018년 한국 디스플레이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이 37%로 떨어지고 중국과 대만 디스플레이 기업들의 점유율은 42%로 오르는 등 디스플레이 시장이 중국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 기업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중국 정부의 제재는 반독점법 규제다. 중국에는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 역할을 하는 기관만 3곳(국가발전개혁위원회, 국가공상행정관리총국, 상무부)에 이른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는 LCD 가격 담합 혐의로 국가발전개혁위원회로부터 600억원대의 과징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더욱 노골적인 방법으로 해외 기업 '길들이기'를 시도하기도 했다. 2013년 7월 국가발전개혁위원회는 30여개의 다국적기업 법무담당 임원들을 베이징의 한 호텔로 불러 반독점 위반사례를 자진신고하라고 했다. 당시 쉬신위 반독점국장은 "중국과 싸울 생각이라면 과징금이 2~3배 늘어날 것을 각오하라"고 말했다.

국내 전자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법률은 포괄적이면서 당국의 재량에 따른다"며 "과징금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고, 설명을 듣거나 소명할 기회조차 없어 제재를 예측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 애플도 '벌벌'…中 내수 의존도 큰 韓기업 속앓이

콧대 높은 애플도 중국 정부에는 '고분고분'한 모습이다. 스마트폰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중국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샤오미의 해외 특허 침해나 디자인 모방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애플의 사업 구조를 보면 팀 쿡 CEO(최고경영자)가 중국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보인다. 지난해 하반기 애플의 중국 매출은 미국의 절반을 조금 넘었지만 성장세에선 다른 지역을 압도했다. 중국 매출은 전년보다 99% 늘어난 반면, 미국·유럽·일본은 10% 이하의 성장률을 보이는 데 그쳤다. 여기에 중국 정부가 2014년 징벌성으로 정부조달품목에서 아이패드 등 제품을 제외했던 경험도 한몫했다. 중국 국영기업과 관계사들이 중국 IT제품 구매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조달시장 제외는 ‘시장 진입 불가’와 마찬가지인 조치다.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2013년 미국을 제치고 세계 무역 1위 국가로 올라선 중국은 수입규모가 세계 최대 수입국인 미국의 78% 수준(2012년 기준)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웃에 엄청난 소비시장이 열려 있으니 공을 들일 수 밖에 없는 셈이다.

그러나 중국이 보호무역을 이용해 한국 기업에 생산기지를 합작 형태로 중국에 짓도록 유도하면서 제조, 공정 기술이 넘어가고, 결국엔 역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메모리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TV, 전기차 배터리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박재근 한양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중국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현지 생산 체제 구축이 불가피하다"면서도 "제조 역량이나 인력이 중국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 사드 배치 여파 있을까 우려

한편에서는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를 둘러싼 외교적인 갈등으로 중국의 보호무역 조치가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중국은 미국 주도 사드의 한국 배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류젠차오(劉建超)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를 통해 공개적으로 사드의 한국 배치에 반대하는 의사를 밝혔다. 한반도에 미국의 전략 무기가 배치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속내로 풀이된다.

중국은 타 국가와 갈등을 빚을 때 비관세장벽과 같은 조치로 압박하기도 했다. 중국은 2012년에 미국, 유럽연합(EU)과 안보를 두고 갈등을 빚으면서 반덤핑 소송전과 무역분쟁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