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독재자 자서전 독일어판, 재출간 일주일 만에 품절
'나의 투쟁' 국내에서도 판매 급증
반(反) 이민 정서 자극·우경화 우려…집필진 "폭발물 무해하게 만든 작업"

70년 만에 풀린 금서(禁書)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일주일도 안돼 초판 4000부가 품절됐고, 증쇄에 돌입했다. ‘이 책을 재발간하는 게 과연 적절한 일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던 지식인 사회는 이제 이 책이 인기를 끄는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희대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저작 ‘나의 투쟁(Mein Kampf)’을 둘러싼 독일의 상황이다.

히틀러가 독일 공군 콘도르 부대 장병들에게 경례를 하고 있다. 콘도르 부대는 히틀러가 베르사유협약을 깨고 직접 조직한 부대다.

◆ 독일어 판권 소멸 앞두고 재출간 작업…유대인 사회·정치권에선 중단 압력

역사 연구단체인 독일 미래연구소(IfZ)는 지난 2012년부터 집필 작업을 시작해, 이달 초 ‘히틀러, 나의 투쟁: 비평판’을 자체 출간했다. 2권짜리 이 책의 분량은 1948쪽에 달한다.

히틀러가 1925~1926년 2권에 걸쳐 쓴 ‘나의 투쟁’은 한때 ‘새 시대의 복음(파울 요제프 괴벨스)’이라고 선전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1245만부가 배포됐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악마의 책’ ‘독극물 같은 책’이 됐다.

엄밀히 말해 ‘나의 투쟁’이 독일에서 금서는 아니었다. 히틀러 사후 저작권이 바이에른주(州)에 귀속됐고, 바이에른주 정부가 독일 내 어떤 출판사에도 출판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나치의 잔재를 씻어내고 통일된 나라를 정비하는데 집중했던 독일에서 전범(戰犯) 히틀러의 책은 암묵적인 금서였다.

학계에선 ‘판도라의 상자’로 취급됐다. 제대로 연구할 필요성에 대해 공감했지만, 정치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반발 때문에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

‘히틀러, 나의 투쟁: 비평판’. 총 2권으로 출간된 책의 가격은 59유로(약 7만7000원)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독일에서도 ‘나의 투쟁’을 구할 수 있었다. 인터넷 포털을 검색하거나 해외 서점을 이용하면 된다. ‘나의 투쟁’의 영문 판권이 1933년 팔려, 영문판이 꾸준히 출간됐기 때문이다. 영문판은 다른 언어로도 번역됐다. 국내에선 동서문화사가 2014년 출간한 책이 최신판이다.

그러나 당장 독일어판 저작권의 유효 기간이 끝날 때가 됐다. 작가 사후 70년인 2015년 12월 31일이다. 히틀러 사상의 문제점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논증해야 오독(誤讀)을 막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미래연구소(IfZ)는 지난 2012년 바이에른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일어판 재출간 작업을 시작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유대인 사회의 반발이 강했다. 재출간이 히틀러의 책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란 지적이다. 로널드 라우더 세계유대인회의(WJC) 회장은 “(‘나의 투쟁’은) 증오에 차 있고 인종차별적이며 반유대주의적인 책”이라며 재출간 작업을 연구활동으로 보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

정치적인 압력도 가해졌다. 미 국무부의 더글러스 데이비드슨 홀로코스트 문제 특사, 댄 샤함 이스라엘 독일 주재 총영사, 독일의 진보정당인 녹색당 등이 집필 작업을 중단시키기 위해 미래연구소를 항의 방문했다. 결국 미래연구소와 공동출간할 예정이던 바이에른주 정부는 손을 뗐다.

◆ 독일어판 ‘나의 투쟁', 주문 쇄도…獨 언론 “히틀러 문제점 알리는 저작" 평가

우여곡절 끝에 출간된 ‘나의 투쟁’의 인기는 예상 밖이었다. 초판이 매진돼 1만5000부를 추가로 찍었고, 최근 3쇄에 돌입했다. 국내에서도 한국어판 ‘나의 투쟁’을 찾는 독자가 늘었다. 1000부씩 증쇄하던 것을 지난해 독일판 재발간 소식이 전해지면서 5000부씩 추가로 인쇄했고, 이달 13쇄는 1만부를 찍었다.

1941년 4월, 총통 전용열차가 빈 근교의 역에 도착하였고, 뒤이어 독일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이 시작되었다.

‘나의 투쟁’의 인기가 히틀러에 대한 향수나 독재자에 대한 동경일까? 일각에서는 그런 분석도 나온다. 최근 몇 년 동안 계속된 유럽의 경제 위기에 반(反)이민 정서까지 불거지면서, 독일이 우경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달 출간된 미래연구소판 ‘나의 투쟁’을 읽은 이들의 평가는 사뭇 긍정적이다. 히틀러의 오기나 왜곡된 주장, 사실과 다른 점을 하나하나 논증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히틀러는 자신을 ‘당원이 6명뿐이던 나치당’을 최대 정당으로 키운 정치 전략가로 소개하지만, 그의 당원증 번호는 555번이었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 배상금 문제에 대해 독일의 어떤 정치인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나서야 했다고 썼지만, 이 역시 거짓이라고 저자들은 설명한다.

책을 펼치면 한 면에는 원서 내용, 다른 한 면에는 연구진들의 주석이 실렸다. 각주만 3500개에 육박한다. 기존 자료 외에도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펴낸 ‘나의 투쟁’ 38권을 비교 분석했다. 책 분량이 2000쪽에 달하는 이유다.

1945년 1월, 연합군의 공세로 전선은 급격히 위축되고, 전쟁이 바야흐로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즈음 히틀러와 하인리히 함러가 전선 시찰을 하고 있다.

독일 진보주간지 슈피겔(Spiegel)은 미래연구소의 출판본에 대해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분명하게 설명해주려는 대담한 시도”라고 평했다.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은 “히틀러에 저항하는 편집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소개하고, ‘나의 투쟁’의 각 장에서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내용을 정리했다.

집필 작업을 이끈 사학자 크리스티안 하트만은 독일 일간 디벨트(Die Welt)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작업은 폭발물 해체팀이 하는 일과 유사하다”며 “나치 시대의 잔재를 털어내 (우리 사회에) 무해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어판에도 히틀러의 사상과 세계관을 비평적으로 연구한 글이 첫 머리에 실렸다. 독일 시사지 슈테른(Stern)의 정치 칼럼니스트 제바스티안 하프너가 쓴 ‘히틀러 그는 누구인가’와 히틀러 연구의 권위자인 저널리스트 앙투안느 비트키느의 글 ‘나의 투쟁이란 무엇인가’다.

한국어판 ‘나의 투쟁’을 펴낸 동서문화사의 고정일 발행인은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이 지나치게 많은 배상금 때문에 분노에 차 있을 때 그 좌절감을 선동하고 이용한 인물”이라며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그의 사상을 비판 없이 받아들일 가능성을 우려해, 히틀러의 책에는 정치와 역사 전문가의 평설을 함께 싣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