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카르피니와 루브룩의 뒤를 이어 대몽골국(Yeke Mongγol Ulus)을 다녀간 유럽인 가운데 성경 다음 가는 베스트셀러가 된 여행기인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을 남긴 이가 있었으니, 바로 마르코 폴로(Marco Polo)였다. 물론 많은 이들이 ‘마르코 폴로’라는 이름은 알고 있겠지만, 실제로 그가 남긴 ‘동방견문록’을 독파한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저마다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동방견문록’이 오늘날 국가 편람처럼 재미없다고, 어떤 이는 쿠빌라이 칸(Qubilai Qa'an)이 지배하던 시대의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동안 번역되었던 ‘동방견문록’의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이런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바로 몽골사 전공자에 의해 온전하게 번역되고 자세한 설명이 달린 ‘동방견문록’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경이(驚異)의 서(書)’에 수록된 ‘동방견문록’의 한 면

유목민과 정주민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 지역에 동으로는 만주 평원에서 서로는 헝가리의 판노니아 평원까지 초원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 초원지대 아래로는 고비(Gobi)와 타클라마칸, 카라 쿰 등 거대한 사막이 나란히 평행을 이루고 있다.

바로 이 사막지대 아래에 유목민들과 때로는 대립과 항쟁을, 때로는 상호보완적으로 역사를 이어 온 농경민들이 살고 있다. 이들 정주 농경민들은 18세기 청(淸)과 러시아가 총과 대포로 기마유목민을 완전히 제압하기 이전까지, 대략 3000~4000년 동안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었다. 이런 열세로 말미암아 정주 농경민은 유목민의 위협과 침략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렇지만 반대로 유목민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유목민을 제압하거나 또는 분열하도록 조장하기도 하였다. 그 기본적인 노선이 이이제이(以夷制夷)와 기미지배(羈靡支配) 정책이었다.

◆ 몽골 유목민과 유라시아세계

한편으로 유목민들에게 정주민들과의 경쟁보다 더 힘든 것은 주변의 다른 유목민 집단과의 경쟁이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유목민의 일부는 승리한 지배집단에 복속당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초원을 떠나 주변지역으로 쫓겨났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유목민의 확산은 주변 정주세계의 역사에 깊은 영향과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예를 들면 흉노, 돌궐, 몽골 등 유목민족이 서쪽 또는 남쪽으로 이동 확산됨으로써 훈족의 동유럽 정복,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이슬람화, 대몽골국의 주변 세계 정복과 통치 등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생겨났다.

이러한 대몽골국의 확장과 정복으로 인해 유라시아 역사에 끼친 부정적인 면도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에 못지않게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슬람과 주변 정주문화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무슬림과 이방인들을 중용하여 몽골치하에서 동서 문화교류의 주역으로 활약하게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에 따라 이슬람의 천문학․의학 등이 동서로 전래되고, 인쇄술·나침반·화약 등이 각지로 전파되어 인류의 문화발전에 공헌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중에서 특히 인쇄술의 서방 전파는 지식의 보급, 나침반은 장거리 항해를 가능케 하여 마침내 지리상의 발견을 이끌어 유럽의 근대문명을 일으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유럽이 ‘대항해 시대’를 거쳐 근대 세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카르피니와 루브룩, 마르코 폴로 등이 대몽골국을 다녀와서 남긴 여행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 유목민의 왜곡된 이미지

개의 얼굴을 한 안다만제도의 상인들

한편, 주변 정주민들은 오랫동안 유목민에 관한 일방적인 기록을 남겨, 편향되고 왜곡된 야만의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게다가 15~16세기 이후, 이른바 근대 이후 유럽은 유목민은 말할 것도 없고 동양을 야만시하면서 서구문명을 유일한 존재가치로 선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목민의 역사는 철저하게 왜곡되거나 무시당했고, 세계사의 흐름에서 언급하기조차 꺼리는 변두리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콜럼부스의 지리상의 발견은 단지 마르코 폴로가 말한 ‘엄청난 보화와 물산으로 넘치는’ 쿠빌라이 칸이 지배하는 칸발릭(Qan Baligh·지금의 베이징)으로 가고자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그 이후 유럽은 거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되었다. 물론 당시 콜럼부스는 죽을 때까지 그 곳을 대몽골국의 카안이 지배하는 인도의 한 지역으로 알았고, 그래서 그 섬은 지금도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1492년 콜럼부스가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바다로 나아갈 때 수중에 한권의 책이 있었는데, 바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었다. 이 책에는 콜럼부스가 꼼꼼히 읽으면서 적은 메모들과 중요한 내용을 가리키는 표식 등이 곳곳에 남아있다.

쿠빌라이 칸의 초상

'칸 중의 칸(Qan)', 쿠빌라이 칸의 집권

칭기스 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한 뒤 곧바로 주변의 탕구트(西夏)와 여진(金)을 공격하고, 이어서 중앙아시아 원정을 통해 몽골제국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중앙아시아에서 돌아온 몽골군은 원정에 불참한 탕구트를 재차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그 와중에 칭기스 칸이 사망하고, 셋째 아들인 우구데이가 대칸으로 즉위하였다.

우구데이는 1236~1241년에 걸쳐 러시아․킵차크 초원 원정을 단행하고 이 과정에서 총사령관 바투는 러시아와 킵차크 초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후 우구데이 카안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서유럽은 몽골의 침략을 면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타르타르(몽골)’를 비롯한 주변세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관심이 증가함으로써, 서유럽 사절로는 처음으로 카르피니가, 뒤를 이어 루브룩이 대몽골국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구데이 사후 공백기를 거쳐 1246년 구육이 즉위하지만 1248년 사망하고, 칭기스 칸의 가문은 다시 둘로 나뉘어 대칸위 쟁탈전을 치렀다. 결국 1251년 뭉케의 등극으로 이후 대칸위는 칭기스 칸의 막내아들 톨루이 집안에 국한되어 버린다. 한편 뭉케 카안이 남송(南宋) 정복전을 수행하다가 1259년 사천(四川) 지방에서 사망하자, 이번에는 뭉케의 두 동생이 대칸위 쟁탈전을 벌이게 되고, 마침내 쿠빌라이(Sečen Qa'an·元 世祖)가 아릭 부케를 누르고 대칸으로 즉위한다.

◆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260년 고향 베니스를 출발했던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숙부 마페오 폴로는 1269년 동방여행에서 돌아와, 10대 중반이 된 마르코 폴로를 다시 만났다. 그들은 교황을 찾아가 기독교의 현자 100명을 보내줄 것이며 아울러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성묘교회에 있는 등잔의 기름을 얻어오라는 쿠빌라이 칸의 부탁을 받고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 형제는, 이번에는 어엿한 청년이 된 마르코 폴로와 함께 다시 대몽골국의 수도 칸발릭으로 향했다.

1271년 소(小)아르메니아의 라이아스를 출발한 이들은 터키 동부를 지나 이란 지방을 경유하여 페르시아 만 입구에 있는 호르무즈에 도착했다. 이들은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카슈미르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은 뒤, 오늘날 중국의 신장(新疆)과 감숙(甘肅) 지방을 지나 마침내 1274년 여름에, 콜리지(S. T. Coleridge)가 ‘재너두(Xanadu)’라고 노래했던, 쿠빌라이 칸의 여름 수도인 상도(上都)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마르코 폴로는 대몽골국에서 17년 동안 지내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으로부터 패자를 받는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은 출발부터 귀환까지 폴로가 보고 들은 다양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기간에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사실은 극히 미미하다. 아버지와 숙부 그리고 마르코 폴로가 다녀간 시기는 폴로가 ‘칸 중의 칸(Qan)’이라고 칭송했던 대몽골국의 5대 군주 쿠빌라이의 재위시기(1260~1294년)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 다양한 이야기

동방견문록에는 몽골의 역사와 그들의 군주인 칸과 칸의 궁정 모습, 쿠빌라이가 1만2000명의 신하들에게 매년 13벌씩 옷을 하사한다는 이야기, 나얀(Nayan)의 반란 등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 예를 들면, 젊은이들을 유혹해 자객으로 훈련시키는 '산상의 노인', 독실한 구두쟁이의 기도가 바그다드 근처의 산을 움직여 기독교도들을 구한 이야기, 황금의 섬 '치핑구(일본)'에 대한 설명 등 수 많은 과장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코끼리를 들어올리는 루크(ruc)를 그린 그림

그리고 마르코 폴로가 보고 들었다는 거대한 새 루크(ruc), 긴 뿔 양(Ovis Poli) , 사향노루와 육두구, 정향목 등 다양한 동식물과 불에 타지 않는 ‘석면’ 등 광물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사제왕 요한(Prester Johan)'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그 동안 동방을 다녀온 선교사들의 보고가 더해지면서 몽골제국의 군주에게 더 이상 사제왕 요한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음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해준 이야기 중에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으니, 그것은 동방세계 각지에 많은 수의 기독교도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1280년대 말에는 훌레구 울루스(일 칸국)의 군주와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총주교가 파견한 특사가 로마를 방문하여 교황에게 동방기독교도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전해주고 돌아가기도 했다. 교황 니콜라우스 4세가 본격적으로 선교단을 파견하기로 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마르코 폴로의 귀환

마르코 폴로가 대몽골국 지배하에 있던 중국 땅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향한 것은 1290년 말이나 1291년 초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전 훌레구 울루스의 군주인 아르군 칸의 부인이 사망하자 그녀를 대신할 또 다른 왕녀를 카안 울루스(大元)에서 훌레구 울루스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이 시기 내륙을 통과하는 길은 전쟁으로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로를 선택하게 되었다.

이 때 훌레구가 보냈던 사신들의 이름이 ‘울라타이(Oulatai)’, ‘아푸스카(Apusca)’, ‘코자(Coja)’였는데, 중국 측 사료 ‘영락대전(永樂大典)’참적(站赤) 조에서 각각 ‘우루우다이(兀魯鯠)’, ‘아비시카(阿必失阿)’, ‘호자(火者)’로 확인됨으로써 마르코 폴로의 존재와 그의 이야기가 더 이상 허황한 것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폴로 일가와 왕녀 일행을 태운 열 네 척의 선단은 중국 동남해안의 천주항을 출발하여 26개월 만인 1293년 전반에 훌레구 울루스의 수도인 타브리즈에 도착했다. 마르코 폴로는 왕녀를 인도해준 뒤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1295년 고향 베니스로 귀향하게 되었다.

몽골 시대 이후 조선과 유라시아

13~4세기 고려는 대몽골국을 매개로 유라시아 각지와 활발한 교류를 할 수 있었다. 카르피니와 루브룩과 마찬가지로 마르코 폴로도 고려에 대해 ‘솔랑가(Solanga)[또는 솔랑기, 솔랑카]’로 여섯 차례, 그리고 ‘카울리(Kawlî, 高麗)’로 세 차례 언급하였다. 13~14세기 몽골적 세계질서에 편입된 고려에서 몽골[元] 조정으로 공납을 바친, 천 년을 간다는 고려지(高麗紙)는 몽골의 정복에 따라 세계 각지로 전해졌을 것이다.

파스파 문자 도장

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는 몽골 군주들이 교황에게 보냈던, 지금까지 바티칸(Vatican) 비밀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편지들은 아마도 당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고려지에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에 종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선 초 세종 시대의 한글 창제, 천문학과 과학기술, 금속활자와 인쇄술 등의 획기적인 발전은 우리 선조들이 보고 듣고 이해했던 몽골 시대의 유산이 꽃을 피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4세기 후반 대몽골국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동서를 잇는 무역로는 더 이상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양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거나 ‘약탈’해오던 유럽은 새로운 길을 찾아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라시아를 잇는 육로의 상황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5세기의 육로를 통한 교류는 당시 한반도의 조선, 만주, 몽골 고원, 남러시아초원을 지나 유럽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이후 러시아는 모피를 구하기 위해 ‘담비의 길’을 따라 동진하게 된다.

바로 이런 교류의 한 예로 고려(조선)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이 구텐베르크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활발하게 금속활자 주조와 인쇄가 실행되고 있었고, 아시아와 유럽의 교량역할을 했던 노브고로드는 독일의 한자동맹(Hansa)에 가입하여 활발한 교역 활동을 했다. 따라서 이 길을 오갔던 상인 또는 여행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고려(조선)의 금속활자 기술이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 주제도 고려지(高麗紙) 연구와 함께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김장구(金壯求)

동국대학교 유라시아실크로드연구소 연구원으로, 중앙아시아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동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몽골국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몽골사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문명교류사를 주로 연구한다. 최근에는 몽골문 사료, 불교경전 역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역주 몽골 황금사’ ‘중국 역사가들의 몽골사 인식(공저)’ 등을 썼고, ‘몽골 세계제국’ ‘몽골의 역사’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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