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 '그리스인 조르바(열린책들, 177쪽)' 중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문장들을 곱씹으면, 삶은 구름 위에 발을 담그는 것과 같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한창 젊었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삶의 본질들을 찾고 그 무엇에 매이지 않은 자유의지로 살고 싶었다. 닥치는 대로 서책들을 읽으며 그 해답을 얻고자 애썼으나 요원했다. 정신은 무르고, 의지는 나약했으니,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생’은 무적(無敵)이었다.

거의 날마다 시립도서관 참고열람실에 처박혀 책을 읽거나, ‘르네상스’나 ‘필하모니’의 구석에 숨어 종일 음악을 듣는 일에 자신을 방기하고 무위도식했다. 더러는 북한산 골짜기의 누군가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가에서 한나절을 뒹굴다 오거나, 시외버스를 타고 나가 안양의 철 지난 유원지를 걷다가 돌아오곤 했다. 최소한도 ‘납득할 수 있는 생’을 살 수만 있다면, 나는 부나 명예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크레타의 햇빛과 진흙, 그리고 바다를 섞고 그 질료로 빚어낸 인간 조르바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젊은 작가 카잔차키스는 항구의 술 냄새와 사람 냄새가 뒤섞인 냄새가 진동하는 한 카페에서 한 늙수그레한 노동자를 만난다. 노인은 책만 읽으며 살아온 젊은 작가에게 다짜고짜 “날 데려가시겠소?”라고 묻는다.

카잔차키스가 34세일 때 전쟁으로 석탄 연료가 부족해지자 우연히 오다가다 만난 기오르고스 조르바라는 노동자를 고용해 펠로폰네스에서 갈탄 탄광 개발 사업을 벌인다. 그 사업은 여섯 달 만에 실패한다. 조르바는 평생 책만 읽고 살아온 젊은 작가의 머리와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그들은 여섯 달 동안 먹고, 마시고, 웃고, 놀고, 바닷가에서 밤새워 얘기를 나눈다.

갈탄 사업은 실패하고 갖고 있던 돈은 다 털어먹고 거덜이 났지만, 그는 이렇게 고백하기에 이른다. “굶주린 영혼을 만족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책과 선생들에게서 받아들인 영양분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에게서 얻은 꿋꿋하고 용맹한 두뇌를 돌이켜보면 나는 격분과 쓰라린 마음을 견디기가 힘들다.” 작가는 조르바 앞에서 그토록 수치를 느꼈던 적은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곧 헤어졌고, 제각각 갈 길을 간다. 카잔차키스는 간간이 조르바의 소식을 듣는다. 조르바는 세르비아에서 마그네사이트 광맥을 찾아내 물주를 끌어들여 갱도를 뚫고, 그걸로 한 몫을 챙기고, 예쁜 과부인 류바라는 여인과 결혼해서 아이도 낳는다. 두 사람은 태풍 속에서 서로를 잃기도 하고, 간혹 가느다란 인연의 끈이 전하는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작가는 58세 되던 해인 1941년에 ‘조르바의 성스러운 삶’이라는 제목을 소설을 쓰고, 이윽고 1943년 63세 때 이 소설을 완성한다. 굶주림과 살육의 광기들이 세계를 지배하던 그 시절 종이와 잉크에 의지해 삶을 가로질러가려 했던 한 영혼의 아주 깊은 자국을 남긴 채 지나간 위대한 영혼의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2013년 여름, 나는 지중해를 여행하며 흠모하는 그리스 국민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에 붉은 꽃 한 송이를 바치려고 크레타 섬을 찾아간다. 그 가슴 벅찬 순간이라니! 그동안 나는 이 소설을 몇 번이나 읽었다. 매혹되어 열광하며 여러 번 읽다 보니, 소설의 문장들을 거의 외울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이 문장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앞에 얘기했듯이 조르바는 실존 인물이다. 도자기를 빚는 녹로를 돌리는데 손가락이 걸리적거리자 주저하지 않고 단박에 잘라버린 사내,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만난 숱한 여인들의 음모(陰毛)를 모아 베개를 만들어 베는 사내, 산투리를 연주하며 세상을 떠도는 사내, 술과 음식과 여인만 있다면 더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내, 뼛속까지 자유인이던 사내, 그가 바로 조르바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야성적이고 호방하며,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노동자의 삶을 통해 위대한 영혼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장석주는 스무살에 시인으로 등단하여 서른 해쯤 시인, 소설가, 문학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 여름, 서울 살림을 접고 경기도 안성의 한 호숫가에 ‘수졸재’라는 집을 지어 살면서, ‘일요일의 인문학’ 등 다수의 저작물을 냈다. 최근 40년 시력을 모아 시집 ‘일요일과 나쁜 날씨’, 시인 박연준과 결혼 식 대신 쓴 책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