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미국에선 '왓슨 리스트(Watson list)'가 큰 관심을 끌었다. 미국 IBM의 인공지능 수퍼 컴퓨터 '왓슨(Watson)'이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가장 받고 싶어하는 선물'을 뽑은 것이다. 애플의 스마트 시계 '애플 워치'와 삼성전자의 TV, 마이크로소프트의 신형 노트북 PC, 블록 장난감 레고 시리즈 등이 상위권에 올랐다.
IT(정보기술) 업계의 많은 전문가가 왓슨의 이런 능력에 놀랐다. 단순히 인터넷에 올라온 많은 글을 분석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생각까지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왓슨은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널려 있는 수억 개의 글 속에서 사람들의 '감정'을 읽었다. '반드시 갖고 싶다'부터 '좋아 보이지만 나는 별로다'까지 다양한 감정을 구분해낸 것이다.
8일 서울 여의도 본사에서 만난 한국IBM의 제프리 알렌 로다(Rhoda·61) 사장은 "이는 왓슨의 능력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며 "머지않아 왓슨이 한국어도 할 수 있게 되면 '한국인이 가장 원하는 선물 리스트'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왓슨은 현재 영어와 일본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자료를 자동 검색해 현지인처럼 이해할 수 있다. 지난해 4월 한국IBM 사장으로 부임한 그는 "왓슨이 다음번에 배울 후보 언어들 중 한국어가 '1순위 그룹(tier 1)'에 들어 있다"고 전했다.
◇수퍼 컴퓨터 왓슨이 곧 한국말을 이해한다
기존의 컴퓨터나 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는 숫자나 기호로 잘 정리해 놓지 않으면 처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왓슨은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로 작성한 자료의 표면적인 의미는 물론, 속뜻까지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대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로 축적해놓고 분석 대상과 비교해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다. 로다 사장은 "아무리 훌륭한 의사도 전 세계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든 의학 논문과 임상 치료 사례를 다 섭렵할 수는 없지만, (수퍼 컴퓨터인) 왓슨은 가능하다"면서 "이미 미국 몇몇 암 전문 병원에서 왓슨을 이용해 암 환자의 치료법을 조언하는 시험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IBM은 세계 최대의 컴퓨터 제조업체에서 2000년대 중반 소프트웨어와 IT 서비스 업체로 성공적으로 탈바꿈했다. 앞으로는 왓슨을 이용한 '지식 사업'이 IBM의 새 간판 사업인 셈이다. 예컨대 병원에서는 최신 의학 지식을, 로펌(법무법인)에서는 전 세계의 모든 법률과 판례를 쫙 꿰고 있는 왓슨을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비재 기업에는 수백만명의 소비자 설문조사 내용을 몇 분 만에 뚝딱 분석해 그 결과를 보여주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는 "인공지능을 이용한 '신(新) 비즈니스 혁명'이 머지않았다"면서 "이 기술의 트렌드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무인차·드론에도 인공지능 활용
구글과 애플, 아마존 같은 글로벌 IT기업도 자체적으로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애플의 음성인식 비서 서비스 '시리(Siri)'는 사람의 말을 상당히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평을 듣는다. 주인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전화를 걸어주며, 인터넷 검색을 해서 원하는 정보를 찾아주기도 한다.
구글의 인공지능 검색 서비스 '구글 나우'는 검색어를 입력하지 않아도 이용자가 궁금해할 만한 정보를 미리 예측해 추천해주는 것이 특징이다. 아마존은 사용자들의 구매 패턴을 파악해 언제 어느 지역 사람들이 어떤 제품을 많이 살지를 예측, 미리 재고를 확보해서 배송 준비까지 해놓는다. 이들은 자율주행차(무인차), 드론, 자동 번역, 전자상거래와 개인 맞춤형 광고 등 다양한 사업에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로다 사장은 대학 졸업 후 IBM에 입사해 37년간 이 회사에서 근무한 정통 'IBM맨'이다. 호주·뉴질랜드 사업부 사장, 미국 본사의 글로벌 공공부문 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한국은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 인프라가 전 산업과 사회 구석구석에 파고들어가 있어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하기 매우 좋은 환경"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 기업들은 새로운 트렌드에 앞서 나가는 데 소극적인 것 같다"면서 "아직도 '패스트 팔로어(fast-follower·빠른 추격자)'의 태도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왓슨(Watson)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고 분석해 갖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개발한 IBM의 인공지능 수퍼 컴퓨터. 2005년 개발을 시작해 현재는 음성·영상 인식, 외국어 번역, 키워드·감정 파악, 가설 수립 등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IBM의 초창기 최고경영자였던 토머스 왓슨 이름을 땄다. 2011년 미국의 TV 퀴즈쇼 '제퍼디(Jeopardy)'에 출연, 74회 연속 우승자를 꺾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기계'란 별명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