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잇감을 움켜쥔 야수처럼, 검은 뿔테 뒤로 박현주〈사진〉 회장의 눈빛이 번득였다. 연봉 1500만원의 증권사 직원으로 출발, 대형 금융회사를 일궈 국내 금융사에 '박현주 신화'를 썼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또 한 번의 빅 매치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증권업계 4위(자기자본 기준)인 미래에셋이 자기보다 덩치가 큰 업계 2위 대우증권을 인수해 자기자본 8조원에 육박하는 초대형 증권사로 거듭나게 됐다. 1위 자리를 내주게 된 NH투자증권보다 덩치가 2배 가까이 되는, 독보적 1위다.
24일 낮 대우증권 대주주인 산업은행은 대우증권과 산은자산운용의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미래에셋증권·미래에셋운용 컨소시엄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미래에셋은 앞서 지난 21일 입찰에서 2조4500억원 안팎의 최고 가격을 써내 한국투자증권, KB금융 등 경쟁자를 1000억원 정도의 차이로 제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공식 발표가 있던 순간, 박 회장은 "저성장·고령화 시대를 맞이한 한국 사회에서는 '투자' 마인드를 키워 나가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 몸집 커진 1위 증권사를 통해 앞으로 한국이 투자하는 나라가 되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이병철 정주영 회장님이 막 주판알 튕기면서 투자했나. 될 것 같다 싶으면 했고 그게 창의"라면서 "기업은 투자를 전제로 살아남는 존재인데, 지금처럼 기업이 투자를 안 해선 한국의 미래는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첫째도 투자, 둘째도 투자를 강조하는 박 회장은 "3D(3차원) 영상·로봇·바이오·전기차 등 신(新)산업에도 모험자본이 1조원 가까이 흘러들어 가게 하겠다"고 했다.
미래에셋의 대우증권 인수로, 박현주발(發) 금융업계의 지각변동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운용 자산으로 보면 미래에셋 186조원, 대우 139조원을 합해서 325조원에 달하는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중요한 큰손으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고령화·저금리 시대에 이미 400조원에 달하는 퇴직연금·개인연금 시장이 계속 커지면서 주식·채권 등 자본시장도 동반 성장하고 있다. 몸집을 키운 미래에셋대우가 이 시장에서 마치 연못에서 다른 물고기들이 활발히 움직이게 만드는 '메기'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국내에서 '1위 증권사'로 입지를 굳힌 후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한다는 구상도 갖고 있다. 자기자본 8조원이면 아시아 1위인 일본 노무라금융그룹(자기자본 24조원)에는 미치지 못해도 자기자본 10조원대의 일본 다이와증권이나 중국의 중신증권 등과는 한판 승부를 겨룰 수 있는 몸집이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이 금융계의 삼성전자를 목표로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제 막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난 셈"이라며 "앞으로 조금 더 속도가 날 것 같다"고 했다. 특히 "해외에도 미래에셋이 안 나간 데 대우가 다 나가 있다"면서 "제법 해외 네트워크도 좋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1958년생인 박 회장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1986년 동양증권에 입사했다. 연봉 1500만원의 증권사 직원으로 출발, 1997년 미래에셋을 창업했다. 그 후 증권사·자산운용사·생명보험을 중심으로 미래에셋 그룹을 일구며 '1세대 샐러리맨 성공 신화'를 만들어 왔다.
박 회장은 단순히 기업을 키우는 데 그친 게 아니라 자본시장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 왔다. 1998년 국내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건 '박현주펀드 1호'를 내놔 예·적금만 알던 국민에게 새로운 투자 방식인 뮤추얼 펀드를 소개했다. 박현주펀드는 1년 만에 수익률 90%를 올렸다. 2003년엔 '미래에셋 3억 만들기 펀드'를 출시해 매달 꼬박꼬박 적은 돈을 넣어 투자한다는 '적립식 펀드' 열풍을 이끌었다. 해외 투자에도 일찍 눈떠 2000년대 초 자산운용사로선 처음으로 홍콩·싱가포르 등 현지에 법인을 세우고 해외 주식을 운용했다. 2006년 중국 상하이에 위치한 미래에셋 타워에 투자하면서 글로벌 부동산 투자에도 눈을 돌렸다.
부침도 있었다. 2007년 글로벌 시장에 자산을 배분하는 '인사이트 펀드'를 시장에 내놔 출시 한 달 만에 4조원 넘는 자금을 모았다. 하지만 이 '대박 상품'은 중국 증시가 폭락하면서 1년 만에 원금이 반 토막 났다. 미래에셋은 와신상담하면서 재기를 모색했다. 최근 펀드 운용액이 52조원을 넘어서면서 다시 펀드 시장 1위를 탈환했다.
박 회장은 이번 대우증권 인수에 대해 "길게 보면 한국 자본시장의 지형을 바꾸는 일"이라며 "우선은 리스크(위험) 관리와 준법 관리부터 글로벌 수준으로 높이겠다"고 했다. 또 "(합병 과정에서) 감원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우리는 자산 운용에 강하고, 대우증권은 주식 중개와 투자은행 업무가 강점이어서 톱니가 완벽하게 잘 맞는다. 인력도 합쳐서 4600명은 결코 많은 게 아니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또 "사명은 미래에셋대우로 바꿔 달 생각"이라고 밝혔다.
미래에셋은 산업은행과 가격을 미세 조정한 뒤 내년 초 인수를 확정 짓게 된다. 미래에셋과 대우증권의 통합으로 시너지가 나는 게 관건이다. 노조의 반발 등 잡음만 나지 않으면 미래에셋대우의 통합은 파괴력이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그동안 '1세대 샐러리맨 신화'를 만들었던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박병엽 전 팬택 부회장 등이 제조업에서 무리한 사업 확장을 하다가 무너졌다. 이들과 달리 금융업계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기린아로 성장한 박 회장이 이번엔 미래에셋·대우증권의 통합을 통해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한국 경제에 투자 마인드가 부활해야 한다"는 화두를 던졌다. 박 회장의 도전이 성공작으로 마무리될지 한국 경제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