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이하 산은)에서 사모펀드 투자를 담당하는 A씨는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11년 미국 태양광부품업체 스타이온사에 575억원을 투자하는 내용의 투자집행 보고서를 투자심의위원회에 올렸다. 그런데 A씨는 '중국의 저가 수주 공세로 태양광 부품 시장이 악화되는 국면이고 해당 회사의 성장성이 불투명하다'는 회계법인 보고서를 고의로 누락했다.
산은 투자심의위원회는 A씨가 올린 긍정적인 전망 일색의 보고서만 보고 투자 집행을 의결했다. 하지만 스타이온사는 2년을 버티지 못하고 2013년 도산했고 산은은 투자금의 대부분인 423억원을 손실처리했다.
감사원은 올초 스타이온사에 대한 산은 투자가 부적절했다고 지적했다. 감사원은 해당 투자를 집행한 책임자가 회계보고서 등 내부검토 과정에서 사업 성장이 불확실하며 해당 회사의 부실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에도 투자심의위원회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금융권에서는 산은의 벤처 투자 기준이 모호하다고 지적한다. 정부에서 밀고 있는 업종은 꼼꼼한 심사 없이 대규모로 투자하고, 투자금이 절실한 벤처기업들은 회수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며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9월부터 12월 9일까지 진행된 감사원의 '투자업체 실태' 감사에서도 이 같은 지적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 MB정부 때는 녹색성장 기치로 내건 기업들에 '묻지마' 집중 지원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감사원은 지난 9월부터 12월 9일까지 실시한 '금융공공기관 출자회사 관리실태' 감사에서 부적절하게 집행된 기업투자 부분을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에선 산은의 벤처 투자 문제점으로 2가지를 꼽는다. 첫번째는 벤처 투자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녹색성장'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투자지침에 따라 쏠림 현상이 심하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정책금융기관이 정부의 지침에 따라 투자의 비중을 조정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스타이온사의 사례처럼 실적 채우기식 투자가 적지 않았다는 게 문제점이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녹색성장기업에, 현 정부 들어서는 창조경제를 기치로 내건 기업에 투자가 집중되고 있다.
국회 등에 따르면 산은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부터 2014년 6월까지 녹색성장을 기치로 내건 기업 927개사에 총 6조4861억원을 투자했다. 대기업 100개사와 중견기업 186개사, 중소기업 641개사였다. 투자 비중은 대기업 60%(3조9167억원), 중견기업 21%(1조3332억원), 중소기업 19%(1조2362억원)를 기록했다.
하지만 중소기업 중 상당수는 녹색성장 기업이라고 판단될 만한 근거가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효율성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제조기업은 모두 녹색성장 기업으로 판정됐다"면서 "상당수 기업은 실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해 산은 국정감사에서 "녹색성장, 녹색금융의 실체가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이전 정부 때 녹색성장기업이라고 지원받았던 기업 중 이번 정부 들어 창조경제기업으로 둔갑해 또 다시 투자를 받은 사례도 적지 않았다. 김기식 의원실에 따르면 산은으로부터 녹색성장기업, 창조경제기업으로 복수 지원받은 기업 수는 104개사, 220여건에 이른다.
◆ 벤처투자 간판 걸어놓고 회수 편한 성숙기 기업에만 투자
두번째 문제점은 산은이 벤처투자를 한다고 밝혀놓고 성숙기 기업에 투자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성장초기 기업은 시중은행들이 외면할 때가 많기 때문에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이 도와줄 필요가 있다"면서 "이들이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투자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산은이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로 활용하는 주요 수단은 성장사다리펀드다. 산은과 기업은행, 창업재단이 일정 부분 자금을 출자해 펀드를 조성하고 이를 활용해 벤처기업 등에 재투자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성장사다리펀드 집행내역을 보면 업력이 7년 미만의 벤처기업은 해당 펀드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추진된 성장사다리펀드 집행 현황을 보면 업력 7년 미만인 기업이 받은 펀드금액은 3200억원에 불과하다. 7년 초과 기업 대상 펀드 금액인 6957억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벤처업계의 한 관계자는 "성장사다리펀드는 말이 좋아 벤처대상 펀드일 뿐이지 실상 업력이 낮은 벤처기업은 쉽게 투자를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구정한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정책금융이 이미 지원된 기업 등 회수가 검증된 기업에 대해 관성적으로 지원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구 연구위원은 "5년 미만 창업기업, 5년에서 10년사이 기업에 대한 지원액이 전체 정책금융 지원 중 25%를 넘지 못한다"고 말했다.
벤처캐피털(VC) 투자액이 너무 적다는 지적도 나온다. 올해 산업은행 VC펀드 출자집행 목표액은 1500억원이며 이 가운데 9월말까지 1464억원이 집행됐다. 국내 VC펀드 전체 규모가 4조2000억원인 것에 비하면 턱없이 작다는 것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벤처투자를 위한 조직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책금융의 대표기관인 만큼 벤처 투자 규모를 더 확대하고 더욱 꼼꼼히 심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