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수출국기구(OPEC) 정례 회의에서 생산량 감축 합의가 실패하면서 국제 유가가 심리적 저지선인 배럴 당 40달러선 밑으로 떨어졌다.

국제 유가가 작년 대비 반의 반토막까지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과거 저유가는 한국 경제에 ‘축복’이었다. 특히 1985년~1986년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3저(低) 시대’를 맞아 한국 경제는 급격한 수출 증가와 무역 흑자 등 호황을 누렸다. 투자할 돈은 많았고, 수입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 유가 부담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달라졌다. 더 이상 기업과 소비자, 누구도 저유가를 반길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의 저유가는 과거와 달리 세계적인 경기 불황의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다. 수출이 늘어날 여지가 줄어든 상황에서 ‘저유가’는 기업들의 수출 부진과 매출 감소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고유가 정책에 고통받는 국내 소비자들은 유가 하락이 기름 값 인하로 연결되길 기대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큰 기대를 걸지 않는게 좋다”고 조언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지난해 11월 28일, OPEC의 감산 합의 실패로 국제 유가가 급락하자 주유소에 기름을 넣기 위해 줄 서있는 자동차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국제 유가 하락폭만큼 국내 기름값은 내리지 않았다.

◆국제유가 40% 내릴 때 국내 휘발유는 10% 내려

현재 국제 유가를 끌어내리는 요인은 세계적인 공급 과잉 때문이다. 올해 세계 원유 수요는 하루 평균 9400만 배럴이다. 공급은 9570만 배럴이다. 공급이 수요 보다 많다. 오일은 더 이상 희귀한 자원이 아니다.

특히 미국이 셰일 오일을 무지막지하게 퍼내고 있다. 세계 최대 석유 수입국에서 석유 수출국으로 전환했다. OPEC 국가들은 독점적인 지위를 잃고,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공급을 늘리고 있다. 석유 공급은 넘치는데 수요는 한정돼 있다. 가격이 하락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국제 유가는 작년 12월 배럴당 66달러에서 올해 12월 38달러(두바이유 기준)로 42% 폭락했다. 국내 기름 값은 어떤 수준일까?

오피넷에 따르면 전국 주유소 판매되는 보통 휘발유 평균 가격(7일 기준)은 리터(L)당 1450.35원이다. 작년 같은 기간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698원이었다. 국제 유가는 40% 넘게 폭락했는데 국내 기름 값은 14% 떨어졌다.

◆리터당 1456원=세금 878원 + 원유 수입가 447원 + 정유사 이익 130원

정유업계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있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원유를 수입해 정제한 뒤 팔기까지 한 두 달 시차가 있다”고 설명한다. 지금 시중에 공급하는 기름은 두 달 전쯤 비싼 값에 산 원유를 정제한 제품이란 설명이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세금도 한 몫 한다. 현재 국내 기름 값의 60% 정도가 세금이다. 세금이 떨어지지 않는 한 국제 유가 하락이 국내 판매 기름 가격 하락으로 직결되지 않는 가격 구조다.

현재 정유사 보통휘발유 판매 가격(리터당 1456.7)원 중 60.3%인 878.8원이 세금이다. 이 중 교통에너지환경세(529원), 교육세(79.3원), 주행세(137.5원) 등 유류세는 국제 유가의 변동과 상관없다. 보통 휘발유 1리터를 살 때마다 국민들이 무는 세금이다. 정유사와 주유소들이 걷어 세금을 내기 때문에 국민들이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정유사들은 “리터당 800∼900원의 고정 유류세는 국제 유가가 하락할 때 소비자들에게 유가 하락의 수혜가 가는 것을 막고, 국제 유가가 상승할 때는 국내 기름값 폭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수입 원유의 세전 가격은 판매 가격(보통 휘발유 기준)의 30% 수준인 447.1원 정도다. 정유사들의 마진은 9%(130.8원)이다.

국제 유가가 40달러선에서 다시 반토막이나 배럴당 20달러로 떨어져도, 900원 가까운 세금은 유지된다. 리터당 1100원대가 마지노선이라는 의미다. 리터당 1100원이면, 정유사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무리 많더라도 200원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저유가의 가장 큰 수혜자는 ‘정부’라는 지적이 많다.

에너지 업계 고위 관계자는 "기름값 하락으로 국민의 사용량이 늘어나면 유류세 수입도 비례해 커진다. 2000원대 휘발유 값에 맞춰진 세금과 물가 수준은 국제 유가가 떨어질수록 정부만 막대한 세수를 거둘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주는 기업들이 부리고, 이익은 정부가 챙긴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 “미국과 중동의 치킨 게임 시작...유가 하락 지속될듯”

지난 4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OPEC 정례회의에서 감산 논의는 무산됐다. 이란이 “경제 제재 이전 수준으로 산유량이 회복될 때 까지 감산이 어렵다”는 입장을 고집했다.

국제유가는 급락했다. 4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유(WTI)는 전날보다 배럴당 1.11달러(2.7%) 떨어진 39.97달러를 기록했다. 두바이유도 38달러선에 거래됐다.

전체 원유 공급의 40%를 좌지우지하는 OPEC가 감산하지 않으면 유가는 더 떨어질 전망이다.

이란은 공개적으로 “증산하겠다”고 했고,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미국 등 OPEC가 아닌 국가들의 원유 생산을 막기 위해 감산에 합의하지 않겠다”고 했다. 국제적 물량전이 벌어지면 유가 추락은 불을 보듯 뻔하다.

골드만삭스 등 투자은행(IB)은 “유가가 배럴당 20달러 선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럴 경우 글로벌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 국면에 들어갈 가능성을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유가 하락은 물가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이 추가로 하락하면 국내 석유·조선·철강·기계 등 관련 수출 경기 회복도 늦어질 것”이라고 했다.

세계 통화 흐름도 저유가 못지 않게 ‘재앙’을 경고하고 있다.

미국의 12월 정책 금리 인상이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박 연구원은 “유럽과 일본 등 주변국도 통화 완화 정책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저유가와 함께 ‘치킨 게임’식의 글로벌 통화 정책은 경기 회복을 가로 막을 것”이라고 했다. 내년 경기가 더 악화될 것이란 우려가 짙어지고 있다.

☞참고기사
"유가 20달러 시대 오나"...정유·화학·조선업계 '공포의 12월' <2015.12.04>
국제유가 6년 10개월만에 최저...휘발유 리터당 1449원<2015.12.08>
국제유가 38달러대도 붕괴....휘발유 평균 1447원, 0.6원 내려<2015.12.09>
"일본보다 유류세 30% 많아...미국보단 5.7배"...한국 기름 값 미국의 두 배<2015.12.09>
휘발유, 같은 지역도 600원 차이...주유소마다 천차만별<2015.12.10>
국제유가 37달러대도 붕괴....휘발유 평균 1445원<2015.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