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시장금리 1%P 오르면 가계대출 연체율 2배로 뛰어"
지난달 25일 1억원 정도의 대출을 받으려고 근처 은행 지점을 방문한 자영업자 박 모씨는 "4000만원까지만 대출이 가능하다"는 창구 직원의 말을 들었다. 1억5000만원의 빌라를 담보로 대출을 신청하면 약 1억원쯤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최근 은행들은 아파트나 빌라 등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줄였다. 특히 연립주택이나 빌라는 보증보험 상품을 활용하지 못하면 방 개수가 같더라도 아파트보다 대출 한도가 더 많이 줄어든다. 박 씨는 "저축은행이나 대부업체를 이용할 수도 없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정부의 고위험 가계대출 억제책 시행을 한달 가량 앞두고 은행권의 대출 문턱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부터 대다수 시중은행들이 가산금리를 올리고 우대금리를 없애는 방식으로 대출자의 '체감금리'를 높인 데 이어 최근에는 대출한도 축소와 분할상환대출 권유 등을 통해 가계대출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르면 다음 주에 지난 8월 발표한 가계부채 관리방안의 세부안인 '여신 심사 강화 가이드라인'을 확정한다. 금융당국은 당초 지난달 이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려 했으나 대출 규제 강화에 따른 경기 침체 가속화를 우려한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등의 이견으로 발표시기가 늦어졌다.
◆4대 은행 LTV 한도 사실상 축소…기업銀, 거치식 대출 중단
3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들은 고위험 대출 한도를 잇따라 줄이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이달부터 모기지신용보험(MCI·Mortgage credit insurance), 모기지신용보증(MCG·Mortgage credit guarantee) 등 모기지신용상품 연계 주택담보대출을 중단하는 방식으로 현행 70%인 주택담보대출 LTV(주택담보인정비율) 한도를 사실상 축소했다. 지난달 우리은행, 국민은행, 신한은행은 이미 모기지신용상품 연계 주택담보대출을 중단했다. 이는 주요 시중은행에서 LTV 한도까지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파트 등 주택을 담보로 집값의 70%까지 꽉 채워 대출받기 위해서는 서울보증보험이나 주택금융공사가 판매하는 모기지신용보험에 가입해야 하는데, 시중은행들이 아예 이 보험과 연계된 주택담보대출을 취급하지 않거나 다주택자의 한도를 줄인 것이다.
기업은행은 이달 초부터 올해 말까지 원금을 한 번에 갚는 거치식 대출을 잠정 중단했다. 이는 금융당국이 제시한 분할상환대출 목표치(40%)를 맞추려는 조치다. 일부 은행도 분할상환대출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원금을 한 번에 갚지 말고 분할 상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은행들은 또 지난 10월부터 우대금리를 없애고 가산금리를 올리는 방식으로 대출 금리를 사실상 인상하고 있다. 변동금리형 주택담보대출의 기준금리로 이용되는 코픽스 금리도 지난 10월 10개월 만에 반등하는 등 당분간 대출 금리 상승세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DTI 60%ㆍLTV 60% 초과하면 원리금 분할상환"
금융당국이 이르면 다음 주 발표할 가계부채 관리 방안의 핵심은 이자만 갚거나 금리인상기에 취약한 변동금리·거치식 대출 대신 원금을 나눠 갚고 금리인상기에도 이자 부담이 늘어나지 않는 고정금리·원금 분할 상환 대출을 늘리는 것이다. 또 은행이 주택대출을 취급할 때 대출자의 상환 능력을 꼼꼼하게 심사하는 것도 핵심 내용이다.
이를 위해 은행권은 내년 1월부터 LTV와 DTI(총부채상환비율)가 각각 60%를 넘는 주택담보대출에 대해선 원금분할상환 방식의 대출만 내주기로 했다.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앞으로 금리가 올라갈 가능성'을 고려하는 '스트레스 금리'를 적용하기로 했다. 변동금리 대출한도가 지금보다 줄어드는 것이다.
또 2건의 주택담보대출을 보유한 사람이 세번째 주택담보대출을 신청하는 경우에도 신규대출에 대해 전액 분할 상환을 유도하기로 했다. 은행들은 신용대출 등 금융권 대출의 연간 총원리금상환액이 연 소득의 80%를 넘으면 신규 대출이나 기존 대출 증액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러한 방안들은 부실 가능성이 큰 고위험 대출을 줄여나가기 위한 것이다.
금융당국과 은행권은 당초 지난달 말 가계부채 관리방안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기획재정부·국토교통부 등 가계대출 억제에 따른 경기 침체를 우려하는 일부 부처의 반대에 부딪혀 세부 방안을 조율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발표 일정이 미뤄져 새 가계부채 관리 방안의 시행 시기가 내년 1월 1일이 아닌 1월 중순이 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9월 말 가계부채 1166조원…"美 금리인상 시 연체율 급증 우려"
금융당국이 가계부채 관리를 강화하는 것은 미국의 금리 인상 이후 국내 시장 금리가 따라 올라갈 경우 변동금리 대출자의 이자 부담이 불어나 연체자가 속출하는 등 금융·경제 시스템 전반이 불안해질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이 자체적으로 실시한 스트레스테스트(stress test)에 따르면 시장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가계대출 연체율은 0.4%(9월 말 기준)에서 0.8%로 두배 가량 오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스트레스테스트란 경기 변동 상황을 가정해 금융회사가 어느 정도의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지 미리 점검하는 것이다.
금감원에 따르면 국내 은행권의 10월 가계대출 잔액은 624조1000억원으로 전달보다 9조원(1.46%) 증가했다. 월간 증가폭으로는 금융당국이 가계대출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8년 이후 최대다. 가계대출 증가분 9조원의 76%(6조9000억원)가 주택담보대출이다. 가계대출(은행·보험사 등 금융사 대출)과 판매신용(신용카드사·할부금융사 등 외상구매)을 합한 가계부채는 9월 말 기준 1166조원으로 올 들어 81조원 급증했다.
은행권 관계자는 "정부가 가계부채 속도조절에 나서면서 일부 투기 목적의 대출은 다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아파트 집단대출 증가 규모를 감안하면 당분간 주택담보대출 증가세가 둔화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