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이 만든 현대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은 계열사 98개에 종업원 21만2700여명(2014년 기준)을 거느리고 있다. 이들 범(汎)현대가 기업이 지난해 올린 매출 합계는 235조원으로 우리나라 GDP (국내총생산)의 14%에 해당한다. 그런 정주영의 삶에는 한국 경제의 위기를 푸는 해법이 숨겨 있다. 그의 출발은 빈손이었고 그가 달려온 시간은 위기 아닌 순간이 없었다.

1.시련과 실패를 이겨내

정주영의 삶은 얼핏 성공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그 과정은 무수한 실패와 시련으로 점철됐다. 첫 사업체였던 쌀가게 운영은 1년 만에 일본의 쌀배급제 실시로 문 닫았다. 빚을 내서 시작한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서비스는 문 연 지 20여일 만에 전소(全燒)했다. 다시금 빚을 내 정비업소로 재기했지만 일본의 태평양 전쟁 도발로 '군수 물자 동원령(令)'이 내려져 폐업했다. 광복 후 세운 '현대건설'은 간판을 단 지 6개월 만에 6·25전쟁을 맞았고, 전쟁 직후 따낸 고령교 공사에서는 공사 대금보다 더 많은 손실을 입었다. 이두원 연세대 교수는 "정 회장은 어려움을 한번 이겨내면 더 큰 기회가 온다고 굳게 믿었던 신념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2.현장에서 답을 찾다

울산 현대조선소의 건설소장을 맡았던 임형택(79) 전 한라건설 부사장은 "정 회장은 일주일에 3~4일은 현장에서 살았는데 늘 오전 4시에 일어나 현장을 한 바퀴 돈 뒤 오전 5시에 직원들과 아침 먹으며 회의를 했다"고 말했다. 직접 본 현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원인을 찾아내 해결책까지 만들어주며 직원들을 독려한 리더라는 것이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의 전략은 있으며, 그걸 찾으려면 현장에 가야 한다는 게 정주영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25일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세계 굴지 기업을 키워냈다. ①정주영이 1980년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전시된 현대의 첫 독자 기술 자동차 '포니'(위)와 그리스로 수출한 26만t급 대형 선박 모형을 바라보고 있다. 이 두 작품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정주영의 역작으로 꼽힌다. ②1983년 고 이병철(왼쪽) 삼성그룹 회장, 고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 함께 서울의 한 미술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있다. ③1980년대 강원도 강릉 현대호텔에서 열린 현대건설 여름 수련회에서 트럼펫을 불며 직원들과 어울리고 있다. ④집 앞마당에서 신문을 읽는 모습.

3."시간은 평등한 자본금"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최악의 난구간(難區間)이던 당재터널(현재 옥천 터널) 공사는 준공식에 맞추려면 한 달 만에 끝내야 했다. 하지만 현장 관계자들은 최소 두 달이 걸린다고 했다. 그러자 정주영은 인력을 두 배로 지원하고 낮과 밤 모두 공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현장 관계자는 "두 달짜리 공정표를 만들어서 한 달 만에 끝낸 '돌관(突貫) 정신'의 전형"이라고 했다.

정주영은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며 나는 그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다.

4."신문대학 나왔습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소(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분이 어떻게 명문대 직원들을 잘 다루나"고 묻자, 그는 "신문(新聞) 대학을 나왔다"고 대답했다. 그는 "신문에 글을 쓰는 문필가, 철학자, 경제학자가 모두 나의 스승"이라고 말했다.

임형택 전 부사장은 "그는 본인의 아이디어도 많았지만 배운 사람의 지식을 듣고 난 뒤 기업에 도움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최고였다"고 말했다.

5.상상력을 행동으로 실천

정주영이 197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은 직후였다. 20층짜리 회관 건립을 지시했더니 "인근 국회의사당에 배치된 수도방위사령부 방공포대가 시계(視界)를 가린다고 허가를 안 내준다"고 했다.

이때 정주영은 "포대의 시계를 가리기 때문이라면 포대를 더 높은 곳으로 옮겨준다고 하라"고 해결책을 내놨다. 결국 전경련은 20층짜리 회관을 지었고 포대는 전경련 옥상으로 옮겨 왔다. 서산간척사업 당시 '유조선 공법'이나 소 1001마리를 끌고 방북했던 것도 그의 상상력에서 나온 일들이다. 그는 1992년에 정계에 투신해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 이후 자녀들의 후계 구도를 말끔히 정리하지 못해 '형제간 분란'이 생긴 것은 그의 삶에서 아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