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유언

임진왜란 당시 조일 양국의 최고지도자였던 조선의 선조 이연(1552~1608, 재위 1567~1608)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98)는, 사망을 앞두고 각각 자신의 후계에 대한 유언을 남겼다. 최고 권력자도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은 어찌 할 수 없으며, 살아남을 사람들의 선의(善意)에 기댈 수 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유언들이다.

“형제 사랑하기를 내가 있을 때처럼 하고, 참소하는 자가 있어도 삼가 듣지 말라. 이로써 너에게 부탁하니 모름지기 내 뜻을 본받아라.”

이것은 선조가 세자이자 자신의 계승자인 이혼에게 남긴 유언이다(“선조실록” 1608년 2월 1일. 한국고전종합DB). 얼핏 평범해보이는 내용이지만, 그 배경에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복잡한 사정이 존재한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의주로 피신하고, 자신의 둘째 아들 이혼을 세자로 임명하여 분조(分朝)를 이루어 최전방에서 활동하게 했다. 임진왜란 초기에 자신과 이혼이 보인 행적이 비교되었는지, 아니면 어떤 연구자들의 주장과 같이 이혼에게 왕이 될만한 인격이 없었음을 선조가 간파했는지는 모르지만, 전쟁이 끝난 뒤 선조는 이혼에게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만년에 인목왕후 김씨(1584~1632)를 정비(正妃)로 맞아들여, 그녀에게서 아들 이의(1606~14)를 낳았다. 후일 영창대군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광해군묘

이의가 태어나자, 정비가 아닌 공빈김씨(1553~77)로부터 태어난 광해군 이혼(1575~1641, 재위 1608~23)은 선조로부터 급격히 멀어졌다. 선조가 오래 살았다면 이혼이 아닌 이의가 후계자로 변경되었겠지만, 선조는 이의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망했다.

앞에서 소개한 유언에서는, 총애하는 어린 적자(嫡子)의 운명을 박대했던 장성한 서자(庶子)에게 맡기는 선조의 절박함, 그리고 자신이 좀 더 오래 살지 못하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선조의 예감대로, 선조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한 직후,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 이진(1574~1609)과 배다른 형제 영창대군은 차례로 반란 혐의를 받아 유배지에서 살해된다. 이 두 사람이 살해된 배경에 광해군의 의지가 얼마나 반영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이후, 광해군은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대규모의 왕궁을 건설하는 동시에 누르하치의 후금과 군사적으로 대립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가 재정을 바닥냈다.

이러한 난제를 광해군이 해결하지 못하자 서인(西人) 세력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선조의 부인이었던 인빈김씨(155~1613)의 아들 정원군 이부(1580~1619)가 낳은 손자 이종을 인조(1595~1649, 재위 1623~49)로 즉위시키고 광해군을 폐위시켰다.

같은 전주이씨 왕실 내의 권력 이동이라는 점에서는 왕조 교체가 아니었지만, 인빈김씨가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와 대립 관계였고, 정원군의 아들인 능창군 이전(1599~1615)이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자살하는 등, 사실상 왕조 교체에 준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경쟁 세력이었던 광해군은 폭군으로 간주되어 역사에서 지워졌다.

광해군에서 인조로의 정권 교체, 그리고 두 정권에 대한 해석은 연구자들 사이에 극단적으로 갈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개의 국제전쟁을 치렀으며, 사실상의 왕조 교체에 준하는 적대적 세력으로의 권력 이동이 발생한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이 문제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명기의 와 , 그리고 오항녕의 과 을 읽고 스스로 판단하시기면 좋겠다.

히데요시의 유언

다이코(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선조와 마찬가지로 애절한 유언을 남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히데요리 탄생.

"히데요리의 일이 이루어지도록, 이 글을 다섯 분께 맡깁니다. 이 밖에는 여한이 없습니다.
거듭 거듭, 히데요리를 부탁합니다. 당신들 다섯 사람만 믿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러분께 모두 전했습니다. 한스럽습니다. 이상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가게카쓰
우키타 히데이에"
-에서

쓰루마쓰가 급사한 이유로, 연못에서 물놀이 하다가 익사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사진=<에혼 조선군기> (1800년. 개인 소장)

1593년에 태어난 어린 히데요리(1593~1615)를 남기고 1598년에 사망하게 되는 히데요시는, 유언장 말미에 적힌 다섯 명의 야심가들에게 히데요리의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유언장의 문장이 졸렬하여 그 뜻을 정확히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히데요리가 자신의 후계자가 되어 도요토미 가문의 일본 지배를 이어가기를 바랬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지목한 다섯 사람 가운데 어느 하나 만만한 사람은 없었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는 히데요시가 사망한 직후부터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한 작업을 추진했다. 그리고,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를 벌여 일본의 실권을 장악하고, 1614~15년의 오사카 전투를 통해 히데요리를 제거했다.

이상의 과정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 히데요리 말고도 두 개의 선택지가 더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 하다.

히데쓰구의 악행 1 – 요리사 배 가르기.

우선, 임진왜란 직전에 첫 아들 쓰루마쓰(1589~91)가 잠시 존재했다. 1590~91년에 일본을 방문한 조선의 황윤길과 김성일이 본 어린 아이가 쓰루마쓰다. 쓰루마쓰의 어머니는 히데요리와 마찬가지로 아사이 나가마사(1545~73)의 딸 요도도노(1569?~1615)였다.

참고로, 요도도노의 어머니와 두 자매는 일본 전국시대의 저명한 인물들과 혼인하고 각기 기구한 운명을 겪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이들의 생애에 대한 드라마와 영화가 일본에서는 즐겨 제작된다.

히데요시는 50대에 얻은 첫 아들 쓰루마쓰를 매우 아꼈지만, 그는 2년 남짓 살다가 요절했다. 그때의 상심이 얼마나 컸던지 히데요시는 절에 틀어박혔고, 이 충격을 잊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이다.

자신의 피를 이은 후계자를 얻었다는 기쁨이 상심으로 바뀌자, 히데요시는 누나의 아들인 조카 히데쓰구(1568~95)를 1591년 말에 간파쿠 직에 취임시켜 일본 국내를 지배하게 하고, 자신은 다이코가 되어 침략 전쟁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광해군이 조선 시대 내내 폭군으로 간주된 것처럼, 히데쓰구에 대해서도 전근대 일본에서는 폭군의 이미지가 덧입혀졌다. 대표적인 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요리를 한 요리사의 배를 갈랐다거나, 자신의 성 위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총을 쏘았다거나 하는 속설들이다.

히데쓰구의 악행 2 – 무고한 사람에게 총 쏘기.

게다가 히데요시에게서 둘째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났으면 스스로 알아서 권력 욕심을 버렸어야 하는데, 속되게 말해서 “분위기 파악을 못해서” 히데요시에게 제거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히데쓰구는 속설과는 달리 히데요시의 부하 가운데 눈에 띄게 성과를 올린 장군이었으며, 역사상 히데쓰구의 악행이 강조된 것은 앞선 정권을 비판함으로써 다음 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주장이 오늘날 제기되고 있다.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 전쟁 중에 성과를 올렸으며, 대를 이을 아들이 없던 사이에 도요토미 정권을 지켜줄 존재로서 아끼던 히데쓰구를, 친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제거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 하다.

히데요시는 쿠데타 음모를 씌워 히데쓰구를 유배보냈다가 할복시키고, 그의 가족들을 모두 처형한 뒤 그 무덤을 ‘짐승 무덤(畜生塚)’이라고 붙일 정도로 철저히 저주했다. 그러나 이미 장성한 히데쓰구와는 달리, 히데요시가 사망했을 당시에 히데요리는 어린 아이였다.

고야산으로 유배된 히데쓰구와 부하들이 할복하다.

그렇기에 이에야스가 자기 세력을 키우고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히데요시가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릴 자충수를 왜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그는 아마도 자신이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숱한 배반과 이합집산을 경험한 그가, 자신의 부하들이 어린 히데요리에게 정권을 고이 안겨줄 것으로 믿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히데쓰구의 아내와 자식들이 처형되어 ‘짐승무덤’에 묻히다.

훗날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유언을 조작해서, “히데요리가 장성할 때까지 지켜보았다가, 그가 일본을 다스릴만하면 정권을 물려주고, 아니면 이에야스 당신이 정권을 잡으시오”라고 히데요시가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도요토미 정권에 대해 일반인이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금지시킨다.

제거된 황제, 광종

조선의 광해군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쓰구와 마찬가지로, 명나라에도 임진왜란 이후 권력이 복잡하게 움직이는 과정에서 잊혀진 최고지도자가 있다. 태창제 광종 주상락(1582~1620, 재위 1620)이다.

1601년에 황태자가 된 그는, 아버지인 만력제 신종 주익균(1563~1620, 재위 1572~1620) 치하의 어지러운 정치를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즉위한지 한 달만에 급사했다. 당시 동림당(東林黨)과 명나라 정치를 양분하던 엄당(閹黨)에 속한 환관이 환약을 먹여 독살했다는 설이 제기될 정도로, 명나라를 재흥시켜주리라 기대되던 광종의 죽음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황태자로서 오랫동안 정치 훈련을 받아온 광종이 급사하자, 광종의 두 아들인 천계제 희종 주유교(1605~1627, 재위 1620~27)와 숭정제 사종 주유검(1611~1644, 재위 1627~44)이 잇따라 즉위했다.

이 두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엄당 세력은 명나라 정치를 흔들었다. 이리하여 국내적으로는 엄당의 득세와 농민 반란, 국외적으로는 후금 세력의 공세로 인해 명나라는 멸망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사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후금이 아니라 이자성의 농민 봉기군이라는 사실이다. 농민군이 1643년에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사종은 자금성 북쪽 경산에서 자살했으며, 이 소식을 접한 대청군은 사종의 죽음을 복수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산해관을 넘는다.

명의 숭정제가 자살한 자금성 북쪽 경산.

17세기 전기 명나라의 멸망 과정을 보면, 주씨 왕조는 이어졌으되 실권을 잡은 것은 신하들이었다는 점에서 조선과는 다르고, 비록 허수아비에 가깝기는 하지만 일정 정도의 권력을 쥐고 있던 덴노 가문이 온존한 상황에서 도요토미 정권에서 도쿠가와 정권으로 실질적 지배자가 교체된 일본과는 비슷하다.

권력은 독점될 수 있는가

한편, 만주 세력도 임진왜란 후 명나라를 무너뜨리기까지 복잡한 권력 투쟁을 펼친다. 건주여진 부족장 아이신기오로 탁시(?~1583)에게는 유력한 두 아들 누르하치(1559~1626, 재위 1616~26)와 슈르하치(1564~1611)가 있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협상을 진행중이던 1595년, 조선 정부는 신충일을 건주 여진에 보내 정세를 살피게 했다. 신충일은 귀국후 ‘건주기정도기’라는 문건을 작성하여 건주 여진의 상황을 알렸다. 이에 따르면 누르하치가 슈르하치에 비해 우세를 보이기는 하지만, 슈르하치는 형제가 동등한 권력을 누린다는 여진인의 관습을 어기려고 하는 누르하치에게 불만을 표출했다고 한다.

이후 누르하치는 부족의 관습을 깨고 권력을 독점하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명나라와 조선이 경계를 늦추던 틈을 타 1599년에 여진을 거의 통일한다. 그리하여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하고 1618년에 명나라에 전쟁을 선언한 누르하치는,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요동반도를 장악하지만, 산해관 앞 영원성을 둘러싼 1626년의 전투에서 전사한다.

에는 선조나 히데요시의 유언을 떠오르게 하는 누르하치의 애절한 유언이 실려 있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의 두 사람과는 달리, 이 유언에서 누르하치는 유일한 후계자인 홍타이지에게 모든 부족이 복종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홍타이지를 비롯해서 주요한 장군들이 협력해서 공동 통치할 것을 당부한다.

자신이 깼던 권력 분점 원칙을 후대 사람들이 지키라고 당부하는 누르하치의 생각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실제로 세력을 지니고 있던 장군들을 이런 식으로 우대함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를 권력에 안착시키려는 뜻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리하여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1592~1643, 재위 1626~1643)가 1626년 한으로 즉위하지만, 홍타이지는 즉위하는 날에 다이샨・아민・망굴타이 등에게 절하고, 즉위 후에도 이들 세 명과 나란히 남쪽을 바라보고 앉아 정사를 보았다.

사실상 4명의 연합정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아버지 누르하치와 마찬가지로 서서히 권력을 독점해나갔다.

즉위 직후인 1627년에 조선을 침공하고(정묘호란), 1636년에 몽골 황제의 옥새를 손에 넣어 후금의 국호를 몽골어로 ‘전사(戰士)’라는 뜻의 다이칭(daicing, 大淸)으로 변경한 직후인 1637년에 또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병자호란).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킨 대청국이 조선에 세운 “대청황제공덕비”, 일명 “삼전도비”. 잠실 석촌호수 소재.

누르하치에 이어 홍타이지도 명나라와의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1643년에 유언없이 급사하자, 홍타이지의 아들 풀린 순치제(1638~1661, 재위 1643~61)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누르하치의 아들인 도르곤(1612~50), 그리고 슈르하치의 아들 지르갈랑(1599~1655)이 순치제의 섭정을 맡았다. 한때 홍타이지의 후계자로 선정될 뻔했을 정도로 실권을 쥔 도르곤은, 홍타이지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후거(1609~48) 대신, 후거의 아직 어린 동생 풀린을 황제로 옹립시켰다.

도르곤은 후거를 옥사시키고 지르갈랑의 실권을 빼앗는 등 권력투쟁에서 잇따라 승리했으며, 도르곤이 죽은 뒤에야 순치제는 친정(親政)할 수 있게 된다. 도르곤의 권력 독점을 미워한 순치제는 그의 무덤을 파헤쳐 채찍을 때리고 목을 베어 각지에 효수시켰으며, 그의 묘호와 시호를 박탈했다. 도르곤의 신원이 회복된 것은 아이신기오로 훙리 건륭제(1711~1799, 재위 1735~96)의 치세인 1778년이었다.

이상과 같이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기 사이에 조선・일본・명・만주에서는 권력이 복잡하게 옮겨다녔고, 그 과정에서 광해군・광종・히데쓰구・도르곤과 같이 불완전한 권력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이 시기 네 나라의 권력 이동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에서는 조선인의 이씨 왕조가 이어지면서 광해군과 인조라는 경합하는 두 왕족 집단이 교체했다.

일본에서는 일본인의 덴노 가문이 이어지면서 도요토미 가문에서 도쿠가와 가문으로 권력이 이동했다.

만주에서는 만주인의 아이신 기오로 왕조가 이어지면서 누르하치 일족과 슈르하치 일족의 두 세력이 권력을 다투고, 누르하치 일족 내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명나라에서는 한족의 주씨 왕조 치하에서 황족의 권력이 약화되고 동림당과 엄당이 권력을 경합하다가, 한인 왕조에서 만주인의 왕조로 민족이 교체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한・중・일 삼국에서 정권이 바뀌었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만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일본・만주에서는 핵심 지배층이 교체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이고, 한족의 명에서 만주족의 대청으로 지배층이 바뀐 오늘날의 중국 지역만이 특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