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부터 제임스 본드로 활약해 온 대니얼 크레이그.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을 들으면 권총과 여자, 마티니가 떠오른다. 50년 넘은 최장수 프랜차이즈 영화가 남긴 조건반사다. 007이 24번째 시리즈 '스펙터'로 다시 돌아왔다. 먼저 개봉한 영국에서는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번에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는 자신이 최악의 조직 스펙터와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멕시코에서 폭발 테러가 일어나고 해체 위기에 몰린 MI6도 그를 포기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2006년 골수팬들의 떨떠름한 반응 속에 6대 본드로 투입된 금발의 대니얼 크레이그(47)는 '카지노 로얄' '퀀텀 오브 솔러스' '스카이폴'을 거치며 이 노쇠한 영국 첩보물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듯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

본드는 나쁜 남자?

007 시리즈는 1962년 스코틀랜드 출신 전직 트럭 운전사 숀 코너리가 본드 역을 맡은 '살인번호'로 출발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본드를 연기한 배우 6명이 영화 속에서 살인, 성관계, 음주를 얼마나 했는지 조사했다. 킬러로 으뜸은 피어스 브로스넌이었다. '바람둥이'는 조지 레이전비와 숀 코너리로 나타났다. 크레이그는 평균 12.66명을 처치했고 마티니 한 잔을 마셨으며 여자관계는 가장 깨끗했다〈그래픽〉.

냉전 시대의 본드들은 미끈한 신사였다. 낭만적이고 유머러스한 이미지랄까. 크레이그는 전혀 달랐다. 상대적으로 작았고 근육질 노동자 냄새가 났으며 진지했다. 하지만 007 시리즈는 그와 더불어 회춘했다. 고난도 묘기로 승부하는 톰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 실전무술로 속을 채운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와 차별화되는 스파이 영화로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 맨주먹 액션의 쾌감도 수직 상승했다. 적과 아군을 분간할 수 없는 세상이 됐다는 공포가 새로운 활로를 뚫어줬다.

크레이그의 007은 리부트(reboot ·재시동)라는 낱말과 잘 어울린다. 영화평론가 윤성은씨는 "크레이그는 능청스러운 본드가 아니라 상처를 지닌 고독한 본드"라며 "첩보물다운 진지함과 비정함, 철학이 더 깊어진 것 같다"고 평했다. 관객도 사뭇 달라졌다. 김형호 영화시장 분석가는 "크레이그가 본드를 맡은 이후 007 시리즈를 보는 여성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팬들도 함께 나이를 먹으며 30~40대 관객이 핵심이 됐다는 점도 흥행 청신호"라고 전망했다.

굿바이, 크레이그?

'스펙터'에서 제임스 본드는 자신이 믿어온 모든 게 붕괴되는 상황과 맞닥뜨린다. 상처 입은 남성성을 보여준 크레이그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007에 이별을 고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달 '타임아웃'과 인터뷰하면서 그는 "다시 007에 출연한다면 돈 때문일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7대 본드로는 미국 TV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데이미언 루이스를 비롯해 톰 하디, 이드리스 엘바, 휴 잭맨 등이 후보로 꼽힌다. '스펙터'는 '스카이폴'에 이어 샘 멘디스가 연출했다. 영국 국립극단에서 연출을 익힌 그는 영화 '아메리칸 뷰티' '로드 투 퍼디션' 등에서 사람의 내면을 시각화하는 솜씨를 증명했다.

007 시리즈는 스마트폰, 맥주, 자동차 같은 상품의 광고판 역할을 해 '브랜드 올림픽'으로도 불린다. '본드 걸'로는 레아 세이두와 모니카 벨루치가 출연한다. 11일 개봉. 148분, 15세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