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업계에 또다시 빅딜(big deal)이 이뤄졌다. 세계 4위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업체인 미국 샌디스크웨스턴디지털이 190억달러(약 21조원)에 21일(현지 시각) 인수한 것이다. 낸드플래시는 스마트폰이나 PC 등에서 데이터 저장용으로 쓰이는 반도체다.

세계 반도체 업계가 이번 빅딜에서 규모보다 더 관심을 쏟는 것이 있다. 바로 중국이 드디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진입했다는 점이다. 하드디스크(HDD) 제조사인 웨스턴디지털은 미국에 본사가 있지만 최근 최대 주주가 중국 국영 기업 칭화유니그룹의 자(子)회사인 유니스플렌더로 바뀌었다. 중국이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반도체 시장에 우회 진출한 것이다.

중국은 이번에 낸드플래시의 원천 기술을 대거 보유한 샌디스크를 인수하면서 단숨에 메모리 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지금까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2위를 지켜온 한국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거대 자본과 기술을 겸비한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난 셈이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 진입한 中

중국 정부는 작년 6월 '국가 집적회로(IC) 발전 추진 요강'을 발표하면서 1200억위안(약 21조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주로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국한됐다. D램과 낸드플래시 등이 있는 메모리 반도체는 장비·기술력을 지닌 선두권 업체들이 과점(寡占) 체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칭화대가 소유한 국영기업 칭화유니그룹이 메모리 산업의 '돌격대장'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 회사는 지난 7월 세계 3위 메모리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에 전격적으로 인수를 제안한 바 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샌디스크 인수로 선회해 뜻을 이뤘다. 낸드플래시는 전원을 꺼도 데이터가 계속 저장돼 있는 메모리 반도체로 최근 수요가 늘고 있다.

샌디스크는 낸드플래시의 핵심 특허를 다수 보유한 회사다. 일본 도시바 등에서 부품을 사와 완제품을 만들어 판다. 작년에는 "SK하이닉스가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냈다가, 지난 8월 기술 로열티를 받기로 하고 제휴를 맺으면서 취하한 바 있다. 삼성전자도 샌디스크가 보유한 특허를 확보하기 위해 2008년 58억달러에 인수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다.

샌디스크를 인수한 칭화유니그룹은 다른 미국 주주와의 관계 등을 고려해 곧바로 기술 확보 같은 움직임은 보이지 않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하지만 회사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반도체 수요가 큰 국가다. 중저가 낸드플래시를 제조해 중국 업체에만 공급해도 삼성·SK하이닉스 등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한국 반도체산업 압박하는 中

중국은 해외 반도체 기업이나 인력 유치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0일 세계 최대의 반도체 업체 인텔은 최대 55억달러를 투자해 중국 다롄에 낸드플래시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중국 정부는 인텔에 법인세 면제, 토지 무상 대여 등 지원을 약속했다. 또 인력 역시 대거 확보하고 있다. 디스플레이 산업을 육성하면서 해외 엔지니어를 영입해 재미를 봤던 것처럼 반도체에서도 같은 경로를 걷겠다는 것이다.

업계는 이번 샌디스크 인수가 한국 업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본다. 특히 타격이 예상되는 업체로 SK하이닉스가 꼽힌다. D램과 낸드플래시에서 모두 1위인 삼성과 달리 SK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에서는 세계 5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수 소식이 전해진 22일 SK하이닉스 주가는 전날보다 5.05% 하락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메모리 반도체에 중국이라는 신규 플레이어가 등장한 것"이라며 "깊이 있게 모니터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반도체마저 중국에 역전당할 경우 한국이 세계시장에서 내세울 수 있는 산업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한국의 8대 주력 수출 업종 중 스마트폰·자동차·조선해양·석유화학·정유·철강 등 6개 분야에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