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젤엔진 배출가스 조작 사태로 위기에 봉착한 폴크스바겐은 최근 친환경 자동차 개발을 위한 미래전략을 발표했다. 핵심은 친환경차의 동력원을 '클린디젤'에서 '전기'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헤르베르트 디스 폴크스바겐 승용차 부문 대표는 "소형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새로 개발해 아우디·폴크스바겐·슈코다 등 그룹 브랜드들이 공유할 것"이라며 "최대 500㎞를 달릴 수 있는 전기차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폴크스바겐이 전기차 중심의 미래 전략을 공식화함에 따라 전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는 전기차 개발과 생산 경쟁이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2차 전지(電池) 수요도 크게 확대될 전망이다.

국내 업계에서는 휴대전화 등에 들어가는 소형 배터리 분야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선 우리 배터리 업체들이 전기차 분야에서도 일본 업체를 넘어 세계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갈 기회를 맞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전기차 대중화, 한국 배터리 업체에 기회

LG화학·삼성SDI 등 한국 2차 전지업체들은 올 2분기 소형 배터리 시장에서 합계점유율 43.4%로 압도적인 세계 1위를 차지했다(일본 시장조사기관 B3). 업체별로는 삼성SDI가 25%, LG화학이 18.4%의 점유율로 나란히 세계 1·2위였다. 소형 전지 분야는 국내 기업이 일본보다 10년 늦게 진출했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성장해 4년 전인 2011년 일본을 넘어섰다.

하지만 전기차 배터리 분야는 아직 일본 기업에 밀리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EV옵세션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일본의 파나소닉이 39.7%로 1위, AESC(닛산과 NEC의 합작사)가 23.6%로 2위에 올랐다. 한국 기업인 LG화학(12.9%), 삼성SDI(4.6%)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업계에서는 전기차 시장이 대중화되면 한국 기업들이 일본 기업을 따라잡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파나소닉은 미국 테슬라에 공급하는 물량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고, AESC는 닛산의 자회사여서 다른 자동차 업체에 납품하기가 쉽지 않은 등 고객사 확대에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LG화학, 20개 글로벌 자동차사에 배터리 납품

일본 업체와 달리 한국 업체들은 다양한 자동차 제조사들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LG화학은 GM·포드·르노·아우디·볼보·현대기아차·상하이자동차 등 전 세계 20개 업체에 배터리를 납품하고 있다. 삼성SDI도 BMW와 아우디·마힌드라·포드 등과 공급 계약을 맺고 수주량을 지속적으로 늘려가고 있다.

미국·유럽 자동차 메이커들이 한국 업체의 배터리 성능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르노닛산의 카를로스 곤 회장은 지난달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현재 세계 최고의 배터리 업체는 LG화학"이라며 "르노에 이어 닛산에도 AESC가 아닌 LG화학 배터리를 채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SDI 역시 최고급 럭셔리카 브랜드인 벤틀리의 첫 플러그인하이브리드카(PHEV)에 배터리를 공급할 예정이다. 조남성 삼성SDI 사장은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나온 신차 중 절반 정도가 삼성SDI의 배터리를 쓰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조사업체인 럭스 리서치는 최근 전기차 시장 전망 보고서에서 독일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판매 비중을 6% 이상으로 늘리면 한국 배터리 업체들이 세계시장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LG화학이 40%, 삼성SDI 9% 등으로 한국 업체들이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절반 가까이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곽진희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폴크스바겐 사태로 클린디젤의 신화가 깨지면서 전기차·스마트카 등 미래차의 대중화에 속도가 붙고 있다"며 "이런 환경 변화가 한국 배터리 업체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친환경차 급증하는 중국 시장 잡아라

20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에너지플러스 2015'에 르노의 전기차 트위지가 전시돼 있다.

세계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출시를 서두르고 있다. 아우디와 폴크스바겐 등 독일 업체는 내년부터 현재 보유한 모든 차종에 걸쳐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나 전기차 모델을 개발해 출시할 계획이다. GM도 조만간 전기차 볼트(Volt)의 2세대 모델 판매에 들어간다. 내년 10월에는 한 번 충전하면 320㎞ 이상 주행이 가능한 차세대 볼트를 출시한다는 일정을 잡고 있다. 닛산 리프 2016년형, 테슬라 SUV 모델X 등도 내년 출시를 앞두고 있다.

중국이 전기차 시장 확대 정책을 펴고 있는 것도 한국 기업에 호재이다. 중국 정부는 2010년부터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정책을 실시하고 있으며, 각 지방 단위로 전기차 보급을 확대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인 HIS에 따르면 중국 친환경차 시장은 올해 11만대 규모로 성장하고, 2020년에는 65만5000대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이런 중국 시장을 잡기 위해 국내 업체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LG화학은 올해 내로 중국 난징(南京)에 연간 10만대 이상의 전기차에 공급이 가능한 배터리 공장을 준공한다. 또 지난달 체리 자동차에 배터리를 공급하기로 하는 등 중국 10대 자동차 회사 중 절반 이상을 고객사로 확보했다. 삼성SDI도 중국 시안(西安)에 연간 4만대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