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된다. [편집자주]

유라시아대륙에서도 중앙부에 자리잡은 건조지대를 통칭해서 ‘중앙아시아’라고 한다. 이 지역이 요즈음 과거 어느 때보다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소련이 붕괴한 지 사 반세기가 지났지만 이 지역은 여전히 개별 국가들이 독자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각축의 현장이다. 여기에 과거의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러시아와 이 지역에 대한 경제 진출을 강화하려는 중국,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움직임까지 교차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이 지역은 오늘날 국제적 차원의 정치, 경제적 중요성이 새삼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 또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2013년 10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시한 바 있다. 한반도와 아시아, 유럽을 잇는 유라시아 대륙을 단일 경제권으로 발전시켜 나가려는 신유라시아 건설 구상이다.

이 지역을 두고 벌어지는 각국의 관심과 진출 경쟁을 두고 혹자는 ‘거대 게임(Great Game)의 재판(再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 19세기말부터 이 지역을 둘러싸고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러시아와 벌인 경쟁 비슷한 양상이 지금 다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유라시아 대륙의 연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과거 동서 간의 교통로였으며 문명 교류의 장이었던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One Belt, One Road: 육·해상 실크로드) 구상에서도 확인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것을 ‘신실크로드 전략’이라고 불렀다.

지난 8월 21일 경주에서 개막해 10월 18일까지 계속되는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의 주제가 ‘실크로드 경주 2015 – 유라시아 문화 특급’이라는 사실은 우리 또한 실크로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열기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본래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였던 페르디난트 리히트호펜(Ferdinand von Richthofen, 1833~1905)이 ‘중국(China)’이라는 책에서 '비단길(Die Seidenstraße)'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에서 유래했다.

이 용어가 단순한 지리적 명칭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제국주의의 진출이 본격화하면서부터였다. 이 길을 따라 유럽인들의 탐험이 이루어지면서 고대 유럽 문화가 멀리 동아시아까지 전파된 흔적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기원전 4세기 알렌산드로스 대왕(BC 356~323)의 동방 원정 이후 전파된 그리스의 조각이 불교와 만나 간다라 양식이 생긴 후, 이것은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과 한국까지 이어지면서 엄청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이것은 당시 유럽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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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신을 유럽 문명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서 이를 적극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로스의 위업을 재현하고자 했던 유럽 제국주의자를 본딴 일본으로서는 이것은 아시아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중요한 이념적 도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한동안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중앙아시아라는 독자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움직임을 정리하고 설명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중국과 유럽을 그저 매개하고 연결시켜준 교통로라는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실크로드에 대한 국내 인식도 마찬가지다. 과거 제국주의 열강의 탐험가들이 보여준 ‘대탐험’의 유산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차원에서만 실크로드를 이해해왔다.

특히 여기에는 1980년대 초 일본 공영 NHK에서 제작한 20부작 다큐멘터리 ‘실크로드’가 큰 영향을 끼쳤다. 화면 한가득 그려진 사막과 오아시스, 그리고 초원과 험준한 설산을 타고 넘는 카라반(隊商)의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강한 잔상으로 남았다.

이런 이미지는 그 후에도 반복해서 확대 재생산되면서 실크로드는 그야말로 몽환적 이미지를 덮어쓴 체, 환상과 신비가 가득한 곳으로 한 번쯤 탐험을 해야 할 것 같은 미지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각인돼 있다.

더욱이 이 미지의 땅이 사실은 우리와도 예전부터 문화적으로 연결돼 있었다는 증거가 확인되면서 마음 속의 동경은 더 심화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 고대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경주의 불교문화 유산이 간다라 미술의 동진(東進) 결과라는 의견이 제출됐다.

그밖에, 경주 고분에서 발굴된 찬란한 황금 문화와 대륙 초원 문화의 동질성, 한반도에서 파견된 사신의 모습이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서 발견된 것, 그리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고구려의 후예로 알려진 고선지의 원정과 탈라스 전투 이야기 등은 우리와의 깊은 관련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육로와는 별도의 바닷길 또한 마찬가지였다. 9세기 해상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동아시아 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가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하게 조명되었다. 실크로드에 대한 높아진 관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연구 축적을 가능하게 했고, 이를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런 차원에서의 해석에 국한될 경우에는 자칫 실크로드를 단순히 과거 문화 전달의 가교 정도로만 설명하는 수준에 머물게 된다. 실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실크로드의 무대였던 중앙아시아는 초원과 오아시스라는 독특한 인문 지리적 배경을 토대로 세계사의 전개 과정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이것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단위로서 의미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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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 우리 역사와 직접 관계된 것에만 관심을 갖거나 아니면 유럽이나 중국 중심적 시각에서 접근해온 경향이 있다. 이제는 이를 극복하고 실크로드 나름의 독특한 역사적 전개 과정에 대한 객관적 접근과 평가를 토대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러한 접근은 자국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세계 보편주의를 회복해 중앙아시아의 독자적인 문화적 가치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보편적 문화 현상을 동등하게 보려는 노력이야말로 문화적으로 교감하고 수평적으로 교류하는 미래지향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세계인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실크로드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틀이자, 중앙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이해 방식이 될 수 있다. 특히 과거 제국주의 침략을 당한 경험이 있는 우리로서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공감대를 이뤄 협력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기획은 이런 관점에서, 독자들이 비교적 친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인 실크로드의 역대 주요 여행가들을 재조명하려고 한다. 친숙한 소재라고는 하지만 이 내용 역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행 목적만 하더라도 정치적 교섭부터 무력 정복, 경제적 이익을 위한 통상, 종교적인 선교와 구법, 그리고 20세기 제국주의자들의 탐험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그뿐 아니다.

이동 방식 역시 일시적 여행 혹은 이주를 통해 새로운 역사적 판도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무대였던 통로 역시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사막의 길만이 아니었다. 초원, 산악, 밀림, 그리고 바다 등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이뤄졌다.

이런 다양한 내용들을 한번의 기획으로 다 포괄할 수는 없다. 우리는 새로운 접근을 위해 먼저 실크로드라고 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물 이야기를 통해 기존의 편견을 불식시켜 나갈까 한다.

이와 더불어 실크로드의 역할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을 발굴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을 보다 구체화시켜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 역사와 관련이 깊은 인물은 물론 우리에게는 좀 낯설 수 있지만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인물들을 통해 실크로드의 역할과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보려고 한다.

일반 독자들도 이번 연재를 통해 실크로드가 단순한 호기심이나 관광여행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새 관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 우리나라가 진정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주도할 수 있는 인식의 기초가 되었으면 한다.

본 연재에 참가하는 필진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된 1990년대 이후 실크로드와 관련한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전문 연구자들로 짜였다.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에 대한 이해와 비판을 기초로 중앙아시아를 새롭게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정재훈 (丁載勳)

현재 경상대 사학과 교수이면서 중앙아시아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 중세 대외관계사 및 중앙아시아사(고대 투르크 유목민족사)를 전공했다. 2006년과 2013년 미국 일리노이대 동아시아태평양연구소의 방문학자로 있었다. 저서로 ‘위구르 유목제국사’, 공저서로 ‘몽골의 역사와 문화’ 등이 있고, 공역서로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