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한국은 '화폐개혁' 논란으로 뜨거웠다. 박승 당시 한국은행 총재가 "디노미네이션(화폐 액면절하)을 포함한 화폐 선진화 조치를 정부와 협의하겠다"고 밝히면서 새해 벽두부터 논란을 촉발했다.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디노미네이션을 거론할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다"며 수위 조절에 나섰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화폐개혁의 필요성이 다시 부상한 것은 그 해 가을이었다. 이번엔 이헌재 부총리가 방아쇠를 당겼다. 이 부총리는 국회 예결위 답변에서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연구 단계를 지나 구체적인 검토 단계에 와 있다"며 정부가 화폐개혁을 검토하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이 부총리는 "4~5년 후 경제규모를 봤을 때 화폐단위 변경을 다시 검토해야 할 상황이 올 것"이라며 "당장 경제적 비용이 들더라도 근본적인 화폐제도 개선을 위해 검토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밝혔다.
화폐개혁 방안이 곧 발표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경제주체들은 각 자의 득실 계산에 분주했고, 주요 포털게시판은 찬반 논쟁으로 가열됐다. 하지만 2004년 화폐개혁 논란은 인플레이션 우려와 뇌물 등 부패에 대한 경계론이 득세하면서 결국 백지화됐다.
11년만에 화폐개혁이 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이번에도 촉발은 한국은행 총재가 했다. 이주열 총재는 지난 17일 국정감사 답변에서 "화폐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한다"고 말해 오랜 논란을 다시 수면위로 끌어올렸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논란이 확산되자 한은은 해명자료를 내는 등 수위 조절에 나섰지만 지난 10여년간의 진행과정을 감안한다면 굳이 해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박승 전 한은 총재는 지난 2010년 발간한 회고록에서 한국은행내에 17명으로 구성된 '화폐개혁추진팀'을 구성해 화폐개혁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준비해놓은 사실을 공개했다. 국가경제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사안인만큼 기획재정부 역시 충분한 시나리오 검토와 정책대안을 마련한 것으로 전해진다. 화폐개혁의 필요성을 양대 경제부처가 인정하고, 다양한 정책 대안을 마련해 놓았다는게 현재까지 확인되는 정황이다. 언제 시행할 것인지 시기 선택의 문제만 남았을 뿐이다.
시기 선택은 리디노미네이션 단행시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한 상황 판단에 달렸다.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을 정도로 주변 상황이 개선됐는지에 대한 판단이다. 화폐단위 절하로 예상되는 부작용은 크게 물가상승 우려와 결제시스템 변경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 등이 지목된다.
물가 상황은 10여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인플레가 아니라 디플레를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소비 촉진을 위해 정부가 재정 투입까지 검토해야 하는 지경이다. 화폐개혁으로 인한 물가 오름세는 현 경제여건에 비추어 충분히 감내할만한 수준이며, 오히려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요소로 바뀌었다.
ATM 등 결제시스템 변경에 들어가는 비용은 화폐개혁을 한다면 언젠가는 지불해야 할 고정비용이다. 시스템이 더 고도화되고 복잡해지기 전에 교체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타당할 수 있다.
국민들의 인식 또한 충분히 바뀌었다. 리디노미네이션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국민들이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메뉴판에 7000원을 7.0원으로 표기하는 업소가 자발적으로 늘고 있다. 국민들이 스스로 디노미네이션을 앞서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1953년과 1962년에 단행된 두 차례의 화폐개혁은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발표됐다. 군사정권 하에서 단행된 62년 화폐개혁은 심지어 한국은행 총재 조차 발표 당일까지 그 내용을 까마득히 몰랐을 정도다. 이처럼 극비리에 화폐개혁이 진행된 결과 국민적 충격은 컸고, 경제 효과는 반감됐다.
반대로 지금은 화폐개혁에 크게 나쁠게 없는 상황이다. 국민들이 10여년 전 부터 화폐개혁 논의 과정을 익숙하게 지켜봐왔고, 물가 상황도 바뀌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어설프게 봉합하고 넘어갈게 아니라, 이제 실행의 단계에 들어설 때가 됐다고 본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발표하더라도 당장 하루 이틀 사이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고, 수년간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진행할 수 밖에 없다. 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국민들에게 미리 충분히 공개해 스스로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될 일이다. 그동안 뜸은 충분히 들었다. 이제 밥솥을 열고 밥을 퍼 담아야 할 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