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대 규모의 전자제품 전시회 'IFA 2015' 개막을 이틀 앞둔 지난 2일 독일 베를린. 일본 소니가 프레스 콘퍼런스를 열었다. 매년 IFA에 참가해 신제품을 공개해 왔던 히라이 가즈오 최고경영자(CEO)가 올해도 어김없이 무대에 올랐다.
이날 그는 세계 최초의 초고화질(UHD) 화면을 장착한 스마트폰, 두께 4.9㎜의 초고화질 TV, 게임 및 가상현실 기기 등 다채로운 신제품을 공개했다. 나무랄 데 없는 제품들이었다. 그러나 히라이 CEO가 평소 강조하던 '와우! 아이템(Wow Item·세상이 놀랄 만한 제품)'은 없다는 평가도 나왔다.
히라이의 '묘수'는 따로 있었다. 그는 '웨나 리스트(Wena Wrist)'라는 제품을 슬쩍 소개했다. 아직 개발이 진행 중인 웨나는 시계라고도, 스마트워치라고도 할 수 없는 묘한 기기였다. 웨나는 '시드 액셀러레이션(Seed Acceleration·씨앗 키우기)'이라는 소니 내부의 벤처 육성 프로그램의 산물이다. 히라이 CEO가 도입한 프로그램이다.
시드 액셀러레이션은 마음 맞는 직원들끼리 팀을 이뤄 기발한 아디이어를 내고, 심사를 통과한 제품은 신제품 개발로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3개월마다 모집하고, 합격한 안건은 분기마다 진척 상황을 체크한다. 괜찮은 제품은 '첫 비행(First Flight)'으로 명명된 온라인 자금 모금 사이트에 올려 소비자로부터 투자를 받게 된다. 지금까지 총 1200명이 응모했다. '기술의 소니'라고 불렸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움츠러들었던 소니의 엔지니어 정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환호했다.
히라이 CEO가 이 프로그램을 만든 건 비용 절감과 구조조정만으로는 소니의 회생이 어렵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는 51세였던 2012년 창업자를 제외한 역대 CEO 중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소니의 수장에 올랐다. 최초의 게임 사업부 출신이기도 했다. 회사 안팎에서는 어린 시절 해외에서 살아 영어에 능통하면서도 1984년 소니에 입사해 잔뼈가 굵은 히라이의 리더십에 대한 기대가 컸다. 히라이 자신도 당시 8년째 적자 행진 중이던 TV 사업에 대해 "2년 안에 흑자로 돌려놓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히라이 CEO의 재임 3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스마트폰은 애플과 삼성에 갈수록 밀렸고, 이제는 중국 메이커들과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TV사업은 10년 연속 적자 행진 중이다. 적자투성이 PC사업은 매각했다. 지난해엔 소니가 상장된 1958년 이래 처음으로 배당하지 못해 주주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소니의 전성기 시절을 이끌었던 원로들은 소니를 향해 "잘못된 지도를 손에 든 선장과 함께 폭풍우 속을 항해하는 배" "제대로 된 지도 없이 폭풍 치는 바다를 향해하다가는 결국 가라앉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엔지니어 출신이 아닌 히라이 가즈오가 기술 혁신을 등한시한 채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착한다는 것이었다. 구조조정을 하려면 과감하게 해야 하는데 히라이의 경영은 이도 저도 아니라는 비판도 나왔다.
진퇴양난에 처한 히라이 가즈오는 결국 소니의 역사에서 답을 찾았다. 트랜지스터 라디오,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 '워크맨', 뛰어난 화질의 트리니트론 TV처럼, 소비자들이 상상하지 못할 제품을 만들어 감동을 이끌어내던 소니의 혁신 DNA를 부활시키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시드 액셀러레이션' 프로그램이다. 엔지니어들이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용 부담도 없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그것을 제품화하는 길을 터주자는 것이 목표다. 웨나를 포함해 전자종이를 이용해 만든 시계, 일상 생활용품을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작동하게 하는 '내 맘대로 사물인터넷(DIY IoT) 센서' 등이 개발되고 있다.
히라이 가즈오 CEO는 "소비자 가전제품 분야에 혁신을 위한 무한한 잠재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한다"며 "소니는 많은 사람에게 더 나은 삶과 놀라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지난 10년간 세상을 뒤흔드는 제품을 내놓지 못한 소니의 미래는 어렵게 되살린 혁신의 불씨를 어떻게 키우느냐에 달려 있다. 히라이는 젊고 열정적인 엔지니어들의 창의성과 패기에 승부를 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