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 미닫이문이 돋보이는 여행책방 ‘일단멈춤’. 책방의 문을 열면 작은 여행지가 펼쳐진다.

작은 책방들이 으레 그렇듯, 여행서를 전문으로 한다는 서점 ‘일단멈춤’도 뜻밖의 장소에 있었다.

지난 19일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 지하철 2호선 이대역 5번 출구에서 200m라는 지도 안내만 믿고 찾아 나선 길이었다. 좌우로 골목길을 몇 번씩 돈 끝에 비로소 노란 입간판과 하늘색 책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말 그대로 ‘일단 멈춤’만 꼭 네 번을 반복하고서야 여정은 끝났다.

7.5평 남짓한 작은 서점은 하늘색 미닫이문 뒤에 숨듯 자리잡고 있었다. 문을 열면 구석 자리에 놓인 콘크리트 침대부터 눈에 띈다. 서점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책꽂이도 없다. 대신 벽을 따라 붙은 나무 선반 위에 독립 출판물 250여 권과 단행본 100여 권이 듬성듬성 꽂혀 있다. 색색의 러그와 쿠션까지 놓인 콘크리트 침대에 앉으니 친구 방에 놀러 온 것 같았다.

여행책방 ‘일단멈춤’ 한 구석에 자리잡은 콘크리트 침대. 이사 올 때부터 있던 콘크리트를 치우기 어려워 ‘침대’로 변신시켰다.

“여행과 책을 좋아하는 친구 집에 놀러 온 느낌이길 바랐어요. 방 한 편에는 작은 서재가 있고요. 제가 이 침대에 앉아서 손님과 인사하기도 하고, 손님도 이 위에서 1~2시간씩 책을 읽고 가시기도 하죠.” 책방 주인 송은정(30)씨의 말이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라는 손님 이다정(32, 서울 관악구)씨가 맞장구쳤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여행을 떠나기가 참 어려워요. 여기 오면 ‘간접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죠. 영감을 주는 곳이에요,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던져주고요.”

◆책방에서 여행하기: 시계 방향으로 돌며 주인과 수다

7.5평 남짓, 기다란 사각형 모양의 작은 가게를 둘러 보는 데도 나름의 ‘여행 요령’이 있다. 주인장이 추천하는 ‘일단멈춤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소개한다.

여행책방 ‘일단멈춤’의 내부 모습. 작은 공간에 국내외 여행 관련서들이 빼곡하다.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오면 원목 책상이 보인다. 송 대표는 이 곳을 “대형 서점의 매대 같은 곳”이라고 했다. 책상 위에는 티백과 여행 티켓은 물론, 책방에서 가장 중요한 ‘신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소규모 책방을 소개한 신간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등이 눈에 들어왔다.

원목 책상 위에 놓인 신간들로 일단멈춤의 트렌드를 읽고 난 후 이제 벽을 따라 이동할 차례다. 가게 공간이 정방형이 아니어서 서가를 여느 책방처럼 일렬 배치하는 대신 벽을 따라 나무 선반을 거는 것으로 꾸몄다.

“문 바로 왼쪽부터 천천히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됩니다. 그 다음 ‘콘크리트 침대’에서 잠시 앉았다가, 앞쪽 거치대에 놓인 잡지도 마음껏 훑어보세요.”

출발 지점에는 마포구 작가들의 다양한 작업물이 비치돼 있다. 시기별로 바뀌는데 요즘은 서점 근처에 작업실을 둔 향초 아티스트 ‘요니 야니’의 틴케이스 향초들이 줄지어 있다. 그 옆에 엽서, 노트 같은 소품들도 놓였다.

이 작은 공간에서는 한 걸음도 허투루 내디딜 수 없다. 성큼 한 번에 꽤 많은 책들이 스쳐갈 수가 있다. 이 곳 책들은 모두 내지를 확인할 수 있게 샘플을 제공한다. 단행본은 물론 소규모 독립 출판물도 모두 작가 동의를 얻어 포장을 뜯은 채 비치한다.

하늘색 표지의 독립 출판물 ‘두 번째 퇴사’에 눈길이 멈췄다. 주인이 “우리 가게의 꾸준한 스테디 셀러”라고 했다. 이 책을 끝으로 선반 행렬은 끝이 났다. 그 바로 옆에 콘크리트 침대가 기다린다.

“이 침대가 어렵게 느껴져서인지 손님들이 이쪽으론 잘 못 오세요. 하지만 한 번 앉으면 1~2시간 머물게 되는 마성의 침대예요.”

책방 한가운데 놓인 원목 책상에서는 주인이 다녀온 여행지의 티켓과 소품, 일단멈춤의 신간이 올라있다.

이 가게는 번잡하지 않다. 손님이 몰릴 때는 하루 20팀, 적을 때는 아예 없기도 하는 통에 주인과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 손님이 바라는 책이나 가고 싶은 여행지를 두루뭉술하게 말하면 송 대표가 찬찬히 답을 찾아준다. 여행을 가기 전, 다니는 동안, 돌아온 뒤 읽을 만한 책도 물어만 보면 척척 알려준다.

책방 안을 있는 듯 없는 듯 휘감는 음악도 조미료다. 음악을 고르는 기준을 물었다. “이 책방에 록이나 힙합이 나온다고 생각해보세요. 문장을 천천히 읽으며 여행을 떠올려야 하는데 랩 비트에 맞춰 책장을 넘긴다면….” 항상 ‘책의 리듬’을 먼저 생각한다는 답이었다. 여행 책방에 걸맞게 제3세계 음악 같은 이국적인 선율로 귀를 끈다.

◆완전 초짜도 책 만들어 팔 수 있는 워크숍 프로그램

일단멈춤은 여느 서점 이상의 몫을 한다. 우선 매달 열리는 워크숍도 인기다.

여행 책방이라고 해서 여행과 관련된 프로그램만 진행하지는 않는다. 디자인 프로그램인 인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수업도 진행한다. 이런 프로그램은 4~6주 과정에 최대 8명을 받는다. 보통 6~8명의 수강생들이 한 반을 이룬다.

인디자인은 출간물, 특히 책을 디자인하는 프로그램으로 이해하면 쉽다. 15년 차 편집디자이너 유지연씨가 강사를 맡아 일주일에 한 번, 한 회 두 시간씩 프로그램을 다루는 법부터 실제 편집 디자인 실습까지를 강습한다. 수강료는 12만 원이다. 일러스트레이션 프로그램에서는 ‘실용 디자인’ 전반을 5주 동안 가르친다. 자신만의 엽서나 명함을 남길 수 있다.

인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처럼 전문 프로그램을 다루는 수업들은 ‘완전 초짜 수강생’을 대상으로 한다. 소규모로 진행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송 대표는 “수강 인원수가 적어 1대1 수업에 가깝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이야기했다.

가장 인기 높은 프로그램은 ‘나만의 여행책 만들기’. 현재 6기 수강생 모집을 마쳤다. ‘독립 출판물’ 만드는 과정 전반을 익히는데 기획, 편집, 내지 디자인부터 유통까지 다룬다. 6주 동안 매주 다른 과제를 수행한다. 끝나면 샘플 책 한 권을 만들어 보완한다. 많게는 100부 가량 찍는다. 여기서 나온 책들은 일단멈춤에서 먼저 판매한다.

‘나만의 여행책 만들기’ 워크숍은 요즘 독립 출판물 제작에 대한 높은 관심과 숱한 질문들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송 대표는 “책만 판매한다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사실 집과 가까운 서점도 있을 테고, 교보문고 같은 대형 서점도 있죠”라면서 “여행과 관련된 콘텐츠를 계속 제공해야 사람들이 올 구실이 생겨요”라고 했다.

일일행사도 다양하게 열린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덥석 섭외되는 손님들이 주도하는 행사다. 책방 근처에 사는 작가들이 이곳에 모여 소규모 워크숍을 진행한다. 책방 이웃인 밴드가 ‘홈메이드 콘서트’라는 공연을 마련한다. 끊이지 않는 행사로 이 작은 책방 안은 꾸준히 복작댄다.

‘섬머 워크숍’은 지난 7~8월 진행된 여행 토크다. 이탈리아 등 특정 지역을 여행한 작가들이 와서 자유롭게 수다를 떠는 워크숍으로, 시즌 별로 이름을 바꾸어 진행한다. 종종 SNS를 통해 공지하고, 댓글로 신청을 받는다.

◆‘오늘도 별일 없이 여는’ 작은 책방

일단멈춤에 방문하기 전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다. 일단멈춤의 SNS에 찾아가 ‘오늘도 별일 없이 열어요’ 공지를 찾아보는 것. 보통 오픈 시간은 1시에서 8시이지만 때로 지키지 못할 때가 있어 매일 공지를 올린다. ‘별일 없다’는 확인을 받으면 일단멈춤으로 출발해도 좋다.

가게를 나서기 전 송 대표에게 몇 가지를 더 물어봤다.

블로그의 첫 화면을 소개하는 송은정씨. 그는 네이버블로그, 페이스북 등 SNS에 꾸준히 에세이를 올린다.

-어떤 생각에서 이런 책방을 시작하게 됐나?

‘책방을 열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는 나 역시 독립 출판물 서점을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책방을 차리려 하니 ‘유어마인드’ 처럼 이미 잘 하고 있는 곳이 많았다.

물론 독립 출판 시장이 커지고는 있지만, 책 자체는 무척 제한적이다. 책방마다 비슷한 책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같은 책을 구비했을 때 사람들이 굳이 내 책방을 와야 할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확실한 콘셉트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마침 제가 여행을 좋아하고, 우리나라에는 아직 여행을 다루는 책방이 없는 것 같아서 작게 시작하게 됐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이 사업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계기라고 한다면 ‘어쩌다가’였다. 편집자로 출판사를 다닐 때였다. 회사를 그만두려고 준비를 하는데, 그때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나는 A도, B도, C도 할 수 있는데 왜 내 머릿속에는 ㄱ회사, ㄴ회사, ㄷ회사만 들어가 있나. 대학원을 가거나 그냥 쉬거나, 어학 연수를 떠나거나 선택지가 많은데 말이다.

당장 이직을 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다른 길을 알아보다가 북아일랜드의 장애인 공동체 ‘캠프힐’을 듣게 됐다. 망설임 없이 선택해 자원봉사를 떠났다.

-운영은 어떤 식으로 하고 있나?

우리 서점은 여행 관련 단행물과 독립출판물을 함께 다룬다. 독립 출판물은 위탁을 받아 판매한다. 한 달에 한 번 수익을 작가들과 나눈다. 이런 정산이 끝난 다음 월세와 세금을 낼 수 있는 정도라도 지금은 괜찮다. 내 인건비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굳이 이런 주택가에 이런 서점을 낸 이유는?

이 동네에서 시작하려고 했을 때, 막말로 ‘망할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이대역과 가깝고, 마포구 안이라는 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생뚱맞은 동네이지 않나.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곳에 있으면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여기를 개척해나간다는 모험심도 있었고. 꾸준히 열심히 하면 자리를 잡지 않을까했는데 책방 시작 반 년만에 근처에 이것저것 많이 생겼다.

-’일단멈춤’이 들어온 뒤로 동네가 변했다는 말인가?

분위기가 그렇게 조성되는 것 같다. 아무 것도 없을 때는 무언가 시작하기 두려운데,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이 곳에서 무언가 하고 있으면 ‘어, 여기가 나쁘지 않네?’하는 판단도 생긴다.

물론 동네, 골목의 특성이 있으니 연남동처럼 빠르게 변하지는 않을 거다. 그래도 천천히 하나 둘씩 바뀌고 있다.

-앞으로 구상은?

당장의 계획은 2년 계약 기간을 채우는 거다. 1년 반 남았다. 그 2년 동안은 정확한 정치성을 규정하고 싶지 않다. 워크숍이나 공연, 여행 토크도 하고 독립 출판물도 팔아보고, 이 작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보고 싶다.

계약 기간 2년이 다 끝났을 때 해봤던 일을 되짚으며 가지치기를 하는 거다. 이것저것 다 해보니 우리 책방에 가장 적합한 일은 이거구나, 이 일이 우리 책방을 움직일 수 있구나. 그 고민이 끝난 뒤에는 압축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하다가 재미 없으면 책방 문을 닫을 수도 있고.

책방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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