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파의 운명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전 세계를 지배하고자 함이었으나, 그 꿈이 무모하다는 것은 금방 드러났다. 그러자 그는 애초의 목표를 바꾸어 한양을 제외한 한반도 남부 4개 도를 지배하고 조선이 일본에 복속의 예를 표하게 하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히데요시는 명나라에 대해서는 '일본 국왕'에 봉해진다는 굴욕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타협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이제까지보다 더욱 강경한 전략을 취했다. 전쟁 초기에 보이지 않던 코사냥을 정유재란 때 집중적으로 명령한 것은 그 상징이다. 한편, 정치적 위기를 어느 정도 벗어난 조선 국왕 선조 역시 전쟁 초기에 자신이 보여준 무기력함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듯 전쟁과 관련한 일체의 협상을 거부하는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이처럼 조일 양국의 최고 통수권자가 상대국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며 강 대 강의 충돌 양상을 보이자, 협상 카드를 중시하던 양국의 온건파들은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어떤 타협책을 취해도 주변으로부터 스파이나 비겁자라는 비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협상 상대가 정말로 성의를 갖고 자신과 협상에 임하고 있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정유재란 초기, 고니시 유키나가가 요시라를 김응서에게 보내 가토 기요마사의 이동 경로를 알려주고 공격하라고 한 일이 있다. 이순신이 이 정보를 불신하여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파면되고, 이순신을 대신하게 된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 패하여 전사했다.

지지난 회에 살펴보았듯이, 김응서와 고니시는 1594년에 직접 만나기도 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지속적인 접촉을 가지며 전쟁을 끝내고자 협상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물밑 협상은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이고, 두 사람 모두 임진왜란 이후 비극적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애초 두 사람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순신을 위기에 처하게 한 이 협상이 어디까지 진실되었으며, 김응서와 고니시가 상대방의 진의를 얼마나 믿었는지를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력충돌만으로는 전쟁을 끝낼 수 없으며 만약 끝이 난다고 하면 그것은 양국의 모든 것이 소진된 뒤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협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명나라 장군들 역시, 무력 시위와 협상을 되풀이하며 전쟁을 끝내려 했다. 명나라 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고 생각된 시마즈 요시히로를 유인하여 거의 성공할 뻔도 했고, 순천과 울산에서는 각각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에게 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농성중인 이들을 성에서 빼내어 생포하려는 계획이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조선측의 기록에는 정유재란 끝무렵에 명나라 장군들이 일본측 뇌물을 받고 일본군의 귀국을 방임하고 있다며 분개하는 내용이 자주 보인다.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사라진 일본군이, 침략받은데 대한 복수를 주장하는 조선을 배제하고 명나라군과 직접 협상을 취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원래 일본이 명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고, 조선은 그런 일본군을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명나라 군이 참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군이 남의 나라를 돕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은 사실이고,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그렇기에, 본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주어 전쟁을 끝내려 한 명나라 군의 판단을 비판할 수만은 없다. 만약 이러한 명나라 군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조선이 독자적으로 일본에 복수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 전쟁이 끝날 즈음, 조선측의 주요 인사들은 최소한 쓰시마섬이라도 공격해서 일본측에 교훈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응서도 그 중 하나였다. '선조실록' 1599년 4월 17일자에 수록된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대마도의 형세는 군사가 매우 적고 기근 또한 심하니, 이런 때에 들어가 친다면 조금도 항전할 리 없으며 다른 섬의 왜병도 필시 구원하러 오지 못할 것이므로 진격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견을 중국 장수에게 통보하여 힘을 합쳐 나아가 무찔러 만분의 일이나마 설분(雪憤)하소서”(한국고전종합DB).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김응서에게서, 왜구의 피해가 심하던 세종조에 쓰시마를 공격하여 일본에 무력으로 경고한 이종무가 떠오른다.

김응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실록에는 우호적인 논평이 실려 있다. 명나라 군대가 도와주지 않더라도 조선의 힘으로 이 정도 군사행동은 펼칠 수 있으며, 이처럼 가상한 주장을 한 김응서는 일본과의 화의만 주장하는 조정 사람들보다 낫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7년 전쟁 끝에 국가가 피폐해진 상태였으므로 쓰시마 공격을 위해 새로이 병사를 징발하고 군량미를 모으고 바다를 건널 배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물러났다고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이처럼 군사 행동을 구상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임하는 강온 양면 정책을 구사한데 대해서는 평가할 만하다 하겠다.

1419년에 쓰시마를 공격한 이종무 군은 일본측의 복병을 만나 피해를 입은 뒤, 쓰시마측의 화의 요청을 받아들여 귀국했다. 이로 인해 조선 조정의 일각에서는 이종무 군이 복병을 만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죄를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이종무 군이 쓰시마 측을 위협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지 않았느냐는데 대해서는, 군인된 자가 전쟁을 치르는 것이 무슨 치하할만한 일이냐는 반박도 있었다. “종무 등이 비록 공이 있다고 하지만, 모두가 다 신자된 직분에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인데 무엇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조선왕조가 무신보다 문신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나라라 해도 목숨을 걸고 전쟁을 치른 무신의 공과를, 그 사이에 한양에 앉아만 있던 문신들이 왈가왈부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사르후 전투와 ‘임진록’

김응서 역시 이종무와 마찬가지 상황에 처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명나라의 견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여진족 세계를 거의 통일한 누르하치는 여진족의 금나라에 이어 후금국 건국을 선언하고, 1618년에 명나라에 대해 일곱가지 원한(nadan amba koro, 七大恨)이 있다며 전면전을 선언했다. 이에 맞서 명나라는 여진족 가운데 누르하치의 통일 전쟁에 반대하는 여허족(Yehe, 葉赫)과 연합군을 결성하고, 조선에도 참전할 것을 요청했다. 조선측은 임진왜란 당시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강홍립과 김응서에게 1만 명의 병력을 주어 파병했다. 이리하여 명나라 주도의 국제연합군 16만 명이 누르하치의 후금군 6만 명과 요동반도 동북쪽의 무순(撫順) 근처 사르후(Sarh、薩爾滸)에서 충돌했다.

이 전투에서 후금군은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전략을 구사하여 승리했다. 김응서와 이름이 비슷한 김응하 장군은 이 때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고슴도치처럼 무수히 화살을 맞고 선 채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전쟁이 끝난 뒤 불과 2년만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충렬록'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또한, 이 전투 때 포로가 되어 후금 측에 있다가 귀국한 이민환의 '책중일록'에 따르면, 강홍립과 김응서가 이끈 조선군은 화약 상자를 터뜨려 자살하기로 했다고 한다. 광해군이 열심히 싸우지 말라는 밀명을 내렸기에, 조선군은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다가 후금에 투항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 전황을 보면 조선측의 피해도 컸다.

그 뒤 강홍립과 김응서는 어떤 사정에서였는지 (아마도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후금측과 협상하여 투항했다. 누르하치의 실록인 '만주실록'에 따르면, 조선군을 이끌던 강홍립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투항했다. “우리 병사들은 이 전쟁에 원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왜자국(倭子國, 일본)이 우리 조선을 공격하여 토지와 성곽을 모두 약탈했습니다. 그 환란의 때에 대명 군사가 우리를 도와 왜자를 물리쳤습니다. 그 때의 댓가로 우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당신들이 살려준다 하면 우리는 투항하겠습니다. 우리 병사들 가운데 대명 군대에 합류하여 간 자들을 당신들이 모두 죽였습니다. 우리의 진영에는 조선인 뿐 입니다. 대명군 장군 한 명과 그를 따라온 병사들 뿐입니다. 그들을 잡아 당신들에게 보내겠습니다”('만주실록' 소명출판).

이처럼 조선군이 투항하자, 조선군과 함께 있던 명나라 유격 교일기는 자살한다. 투항한 강홍립과 김응서에게 누르하치 등은 임진왜란 때의 은혜를 갚기 위해 조선군이 어쩔 수 없이 참전한 것을 잘 알겠으니, 다시는 후금과 명나라 간의 전쟁에 조선이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강홍립은 그 후 후금 진영에 머물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후금군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강홍립이 후금군을 길안내했다는 소문이 돌고, 강홍립을 만악(萬惡)의 근원처럼 그리는 '강로전'이라는 소설도 등장했다.

문제는 김응서였다. '만주실록'이나 명나라 측 문헌에는 강홍립과 김응서가 별다른 이견없이 함께 행동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강홍립에 앞서 투항 협상을 하러 가는 김응서에 대해, 이민환은 “대사(大事)를 이렇게 대충 처리할 수 있습니까”라고 외쳤고, 김응서는 “병법에는 기발한 계책이 있으니 종사관이 어찌 알겠는가”라고 외면하고는 후금 진영으로 갔다고 한다. 조선군이 투항한 뒤 김응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한동안 불분명한 상태였으나 1738년 평양에서 출판된 '김장군유사'에서는 김응서가 투항하려는 강홍립에게 극렬히 저항하다가 어쩔 수 없이 행동을 함께 하게 되었고, 투항한 뒤에도 후금측의 정보를 조선에 전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고 주장한다. '김장군유사'에는 김응서가 조선측에 몰래 보낸 한글 편지를 번역했다고 하는 한문 서한도 여러 편 실려 있다. 후금과 싸우다 전사한 김응하가 한양의 중앙 정부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 동안, 열심히 싸우다가 투항하였으나 끝까지 충성을 지키다 처형당한 김응서는 중앙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조선시대에 피차별 의식을 강하게 느끼던 서북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전쟁 때 도망다니기만 한 문신들이 남쪽으로는 일본, 북쪽으로는 여진족과 싸우는 희대의 경험을 하다가 전사한 무신의 운명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모습은 이종무 때와 흡사했다. 이러한 지배층의 행동에 대한 반발은 비단 서북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김장군유사'와의 관련성은 명확하지 않지만, 임진왜란을 군담으로 만든 '임진록'이라는 일군의 소설이 있다. 이 소설들은 누가 언제 지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진록'을 짓고 베낀 사람들은 중앙 관료들과는 달리 김응서를 불운한 영웅으로 기억했다.

이 소설에서 김응서는 강홍립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임진왜란을 복수하기 위해 일본을 공격한다. 1599년에 쓰시마를 공격하자고 주장한 김응서가, 소설속에서나마 실제로 복수의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강홍립이 배신하여 일본에 투항함으로써 김응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결말은 명백히 1619년의 사르후 전투를 의식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詩)는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고 진지하다”고 주장했다. 예술이 현실보다 더욱 완벽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처럼 김응서는 두 민족과 두 개의 전쟁을 치러야 했던 16~17세기 한반도 사람들의 비극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복수와 인정받지 못한 충성을 소설속에서 완성할 수 있었다.

세키가하라 전투과 가톨릭 반란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이 끝나자 귀국하여 자신의 영지인 구마모토 우토로 돌아왔다. 가톨릭 포교를 금지하던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지금, 고니시는 주군에 대한 충성과 신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영지 내에서 맹렬히 가톨릭을 확산시켰다. 특히 선봉에 서서 포교를 추진한 인물이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5월 동대문 오간수문을 뚫고 가장 먼저 한양에 진입한 고니시 사쿠에몬 스에사토라는 무사였다. 그 결과, 고니시가 다스리는 야쓰시로에서는 인구 약 1만5천명 가운데 2천5백명 정도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예수회 선교사들은 로마에 보고했다('재검증 고니시 유키나가' 99쪽).

구마모토현 가미아마쿠사시에 세워진 아마쿠사 시로의 동상. 유럽풍의 복장이 인상적이다. 위키커먼즈

1600년 9월, 일본이 둘로 나뉘어 싸운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났다. 한반도가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을 거쳐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면, 일본 열도는 임진왜란을 거쳐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 1614~15년의 오사카 전투를 거쳐 도쿠가와 가문이 안정적으로 다스리는 근세기로 접어들었다. 이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규슈 지역에서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만한 사람으로 고니시가 아닌 가토 기요마사를 선택했다.

전투가 발생하자 고니시는 중부 일본의 세카가하라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모리 데루모토, 시마즈 요시히로 등과 함께 서군(西軍)을 구성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東軍)과 싸웠다. 전력상으로는 서군이 우세했지만 서군에 속해 있던 일부 장군들이 비밀리에 이에야스와 내통하여 배신하는 바람에 서군은 패했다. 전투에 패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산속을 헤메다가 린조스라는 사람을 만났다. 도망자들을 찾아내 포상금을 받으려 하던 린조스였지만 고니시를 보고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어딘가로 도망치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니시는 “나를 이에야스에게로 데려가면 포상을 받을 터이니 그리하라”며 “내가 여기서 할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나는 크리스트교를 믿기 때문에 자살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린조스는 이 사실을 동군 측에 알렸고, 고니시는 처형되었다. 예수회 측의 기록에 따르면 고니시의 시체는 교회가 인계했다고 하며, 전 세계의 예수회 교회에서 가톨릭 장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미사가 열렸다고 한다('재검증 고니시 유키나가' 134-135쪽).

한편, 고니시의 정적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구로다 일족과 함께 규슈에 남아 동군(東軍)의 일원으로써 전투를 치렀다. 고니시의 부하 가운데 일부는 일단 가토의 가신으로 흡수되었지만, 그 후 가토는 이들에게 크리스트교를 버려야 계속 가신으로 데리고 있겠다고 선언한다. 이를 거부한 열 한 명이 순교했다. 이를 시작으로 도쿠가와 치하에서 대규모의 종교적 박해가 이어졌다.

또한, 1637~38년에는 고니시의 영지 근처인 시마바라에서 옛 가톨릭교도 영주들의 부하와 농민들이 불교도 영주의 억압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봉기를 지휘한 것은 프란시스코 아마쿠사 시로라는 10대 소년이었다. 고니시의 가톨릭교도 가신이었던 페트로 마스다 요시쓰구의 아들인 아마쿠사 시로를 대장으로 내세워, 십자가와 성배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농성하던 반란군은 맹렬히 저항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교 국가인 네덜란드의 조력을 얻은 막부군이 결국 성을 함락시켰고, 한때 일본 열도를 석권할 기세였던 가톨릭은 이후 계속된 탄압 끝에 사실상 소멸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나치가 패전 직전에 감춘 '황금열차'로 생각되는 열차가 최근 폴란드에서 확인되었다고 하는데, 시마바라의 봉기 때에도 아마쿠사 시로가 대량의 금을 숨겨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가톨릭교도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의 처형과 일본 가톨릭의 소멸이라는 사건은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1783년 이탈리아에서는 '비극 : 일본의 순교자 아그네스'라는 연극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고니시의 가톨릭교도 부하였다가 1603년 순교한 시몬 다케다 고로의 아내인 아그네스의 순교가 주제다('재검증 고니시 유키나가' 104~105쪽). 이처럼 유럽에서는 미사를 올리고 성가극을 제작하는 등 고니시로 상징되는 일본 가톨릭의 종말에 안타까워 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도쿠가와 일본에서는 가톨릭이 유럽과 결탁하여 일본을 전복시키려는 세력이라며 이들을 철저히 탄압하고 기억에서 지웠다. 그래서, 오늘날 고니시와 관련된 일본 내의 기록은 여타 전국시대 인물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소략하며, 유럽에 소장된 관련 기록을 통해 고니시의 행적이 재발견되고 있다.

그나마 김응서는 같은 조선사람들에게 추모되고, 현재 북한에서는 '민족 영웅'으로 재평가되고 있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같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금단의 가톨릭교도로 잊혀지고 할복하지 않은 무사라고 경멸받았으며, 그를 기억한 것은 유럽인들이었다. 1980년에 고니시의 동상을 세웠다가 테러 위협 때문에 하루만에 슬레이트로 가려버리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우호적이지 않다.

다음 회에는 김응서나 고니시 유키나가와 달리 한 일 양국에서 각각 승리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이순신과 가토 기요마사에 대해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