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아들러 심리학 열풍을 몰고 온 일본 작가 기시미 이치로가 22일 숭실대학교 한경직 기념관에서 강연하고 있다.

“장거리 연애하는 사람들이 저와 상담을 하곤 합니다. 함께 있을 때에는 괜찮은데,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너무나 괴롭다는 겁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동안 ‘불완전연소’했기 때문에 언제 다시 만날지 생각하는 겁니다. 그날을 정말 즐겁게 지내고 ‘완전연소’했다면 다음에 언제 만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삶을 댄스, 춤추는 것에 비유합니다. 춤을 춘다는 건 순간을 즐긴다는 겁니다. 어떤 목적을 향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춤추는 그 순간 어떤 기쁨을 느낀다는 겁니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고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아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말입니다. 생산성에만 가치를 두는 게 아니라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건 용기입니다. 내가 타인에게 무언가 공헌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그 공헌이란 특정한 행위를 통해 하는 게 아닙니다. 내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나 자신이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미움받을 용기’를 필두로 국내에 모두 10권의 책이 번역되는 등 아들러 심리학 열풍을 국내에 몰고 온 일본 작가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郎)가 방한해 강연했다. 남북 간 군사 대치로 긴장감이 팽팽했던 지난 22일이었다.

그는 교토대학에서 고대 서양철학을 전공한 뒤, 1989년부터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의 철학을 20년 이상 연구해 온 아들러 전문가다. 최근 후속 신간 ‘늙어갈 용기’ (문학동네) 번역 출간에 맞춰 한국을 찾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는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숭실대 한경직기념관 무대에 섰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마치 한 사람을 상담하듯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이날 모여든 청중은 1200석 규모의 대강당을 80% 가까이 채웠다. 대학생부터 젊은 직장인, 아이 엄마, 직장에서 은퇴한 장년층까지 다양했다.

질의응답을 합쳐 두 시간을 꼬박 채운 그의 강연 전문을 정리해 소개한다. 책을 통해 이야기해온 그의 핵심 메시지가 거의 다 담겼다.

◆자신이 가치 있다 생각할 때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오늘 오전 일본에서 출발해 한국에 왔습니다. 사실 (북한 관련) 뉴스를 보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요, 그래도 어떻게든 서울에 올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여러분이 많이 참석해주셔서 기쁘게 생각합니다.(웃음)

오늘은 인간의 가치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 젊은 분들이 생각보다 많이 참석해 주셨네요. 혹시 젊은 분 가운데 “나는 없어도 되는 존재야”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나요? 그런 분들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한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살아가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대인 관계에서 왜 용기가 필요할까요?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느니 차라리 학교에 가지 않거나, 혹은 아예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새로운 시작은 없습니다.

대인 관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는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런 겁니다. 자신의 결점, 단점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집중력이 없다, 산만하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것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거지요.

많은 분이 스스로를 어둡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 성격이 어둡지 않으냐'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성격을 어둡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게 고의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그런 자신을 굉장히 착하다고 여긴다면 자신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가치는 남에게 도움이 된다는 느낌에서 온다

심리학자 아들러의 말을 인용한다면 이런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공동체에 도움을 주는 행동을 한다는 것. 더 쉽게 말한다면 내가 어떤 일을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공헌한다고 느낄 때, 자신에 대해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겁니다. 또 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통해 공동체에 공헌할 수는 없다고 볼 수도 있겠죠. 제 아버지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았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지는 살아 계시긴 했습니다만 주변에 어떤 공헌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공헌할 수 없다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생산성으로만 가치를 따질 때의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한다, 할 수 없다로 판단할 때의 이야기지요.

그보다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타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아들러의 주장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면, 병으로 침대에 누워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계속해서 주변에 공헌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볼까요. 저도 2006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일이 있습니다.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제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가족이나 친구에게 제가 민폐만 끼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봤습니다. 만약 제 가족이나 친구가 병으로 쓰러졌다고 말이지요. 만약 그 사실을 제가 알게 됐다면, 누구보다 먼저 병원으로 달려갔을 겁니다. 그리고 입원한 가족이나 친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 그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처럼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병자도, 그냥 살아 있다는 것 자체로 다른 사람에게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저는 몇몇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학교에서 저를 해고했습니다. 그 학교에 전화를 걸어 이유를 물어봤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상황이 좋아지면, 건강을 되찾으면 반드시 학교로 돌아오는 조건입니다.” 그때 저는 ‘나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는 말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관계 속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맙다는 거죠. 혹은 도움이 됐다는 겁니다. 내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도움이 됐다는 걸 알게 되면,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에게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얻어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갖게 되는 거죠. 저 역시 주변 사람에게 ‘고맙다' 혹은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 상당히 기뻤습니다.

사람은 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가는 건 아니지만 남으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 자신이 타인에게 공헌했다고 느낌을 가진다는 점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고맙다”는 말을 할 때 중요한 점은 절대로 ‘행위’에 주목하지 않는 겁니다.

행위로만 보자면 감사하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의 경우, 아침부터 밤까지 부모 말을 듣지 않곤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부모는 아이에게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 아들이 어릴 때의 일인데, 밤늦게 저에게 “아빠, 오늘 고마워"라고 하는 겁니다. 저는 그때 참 놀랐습니다. 제가 그날 어떤 특별한 일을 했던가 생각해봤습니다만 그럴 만한 게 없었습니다. 그때 제 아들이 이야기한 건 “오늘 나와 함께 있어 줘서 고맙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그 덕분에 어떤 행위를 함께 하지 않더라도,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런 표현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아들에게 배웠고, 역으로 저도 아들에게 고맙다고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누군가가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존재 자체에 대해 고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아닌, 존재하는 것만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성에만 가치를 두는 게 아니라면, 굳이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보통으로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뭔가 특별하게 잘하려고 애쓰곤 합니다. 가령 부모의 기대를 많이 받은 자식이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좋은 성적을 내고, 유명한 대학에 진학한다고 칩시다. 어떤 의미에서 그건 성공이겠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해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때, 적극적인 성격의 어린이는 문제 행동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소극적인 성격의 어린이는 학교에 가지 않거나,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가 되기도 합니다.

아들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특별히 잘하지 않아도 되고, 특별히 나쁘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다. 보통으로 있는 것, 그 의미는 지금 당신이 있는 그대로도 좋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치매에 걸린 부모를 모시는 자녀라면,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라는 겁니다. 부모님이 하나하나 잊어버린 걸 가지고 일일이 불평하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혹은 아침에 늦잠을 잔 자녀에게 “너 지금이 몇 신데 이제 일어났니!” 이런 말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늦게 일어난 자녀에게 “그래, 살아줘서 고맙다"라고 해보는 겁니다. 늦게 일어났다는 행위보다는 아이가 일어났다는 것, 눈을 떴다는 것 자체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인간의 가치에는 상하가 없습니다. 생산성에만 주목한다면 훌륭한 사람, 가치 있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러나 인간은 모두가 대등하며, 인간의 가치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들러는 1870년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살던 때가 아주 오랜 옛날은 아닙니다만, 그 사상은 지금도 따라갈 수 없는 첨단 사상입니다. 인간의 가치에 상하 구별은 없다. 인간은 대등하다. 한국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일본에서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문제입니다.

친구가 어느 날 제게 상담하러 왔습니다. 아내가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 버렸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생각나는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나는 매주 아내와 자녀를 어딘가에 데려갔고, 1년에 한 번은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 경제적으로도 어떤 불편함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뭐가 문제고 뭐가 불만이냐”고 하더군요. 저는 “그게 바로 불만인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여성은 남성이 어디에 데려가지 않더라도, 남성이 경제적인 ‘우위’에서 부인을 돌본다는 것이 불만인 거죠.

어른과 아이를 예로 들어봅시다. 나이 많은 어른이 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저는 어른과 아이도 대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나 경험의 양은 다르고, 책임지는 능력도 다르겠지요. 예를 들어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귀가해야 하는 시각을 오후 10시로 정했다고 합시다. 그건 그보다 늦은 시각에 귀가할 경우, 아이가 책임질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른은 왜 귀가 시각을 정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 점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직장 생활에서도 분명히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는 상하 관계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간 가치의 상하 관계는 아닙니다. 회사에서 지위가 높다고 하면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서로 책임져야 하는 일의 양이 다른 겁니다.

저는 사실 이 시대가 아들러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병자나 노인들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병자 자신도 “나는 병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살아있는 것만으로 타인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가치는 어떤 행위가 아닌 존재 자체에 있다

한때 병원의 정신과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병원에서 어느 날 50명 정도 되는 환자와 함께 요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회 복귀를 위해 요리를 해보는 거지요. 그날 아침 병원에서 "요리를 하기 위해 장을 볼 텐데 도와주실 분은 함께 가자"고 했더니 5명 정도가 따라왔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요리를 하면서 "지금부터 요리를 시작할 테니 도와주실 분은 도와주세요"라고 했습니다. 15명 정도의 환자가 저를 도왔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엇을 했을까요? 그 사람들은 그냥 옆에 있었습니다. 그날 점심으로 카레라이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던 사람들도 한자리에 모여 함께 식사했습니다.

이런 걸 사회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일반적으로는 일하지 않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도 함께 먹습니다. 일하지 않은 사람은 먹을 권리가 없을까요? 그 사람들은 그때 전혀 도와주지 않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오늘 도와준 사람은 컨디션이 좋아서 도와준 것일 수 있습니다. 일할 수 없는 사람도 가치가 있습니다. 일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겁니다. 만약 스스로 일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타인보다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게 될 때, 그때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정년 퇴임한 학교 선생님에게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서 누구도 자신을 선생님으로 불러주지 않을 때,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란 아주 힘듭니다. 왜냐하면 평소 학교에 있을 때 선생님들은 ‘내가 교사라는 게 훌륭하다’ ‘나는 대단하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가 맡은 건 선생님이라는 역할입니다. 그 역할에 사람에 대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상당히 힘들 겁니다.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리거나 늙어간다는 것이 우리의 가치를 없앤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가치란 행위가 아니라 존재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실 제가 병에 걸렸을 때, 병에 걸려서 좋았다고 생각한 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자신이 병에 걸린 데에는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게 좋습니다. 인생에서 정말 다각도로 나를 바라볼 기회를 얻은 거지요.

병에 걸리고 나니 내일이란 날이 온다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1년 후, 2년 후 이런 걸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 겁니다. 그때 저는 “나는 지금, 여기서밖에 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러는 ‘현실'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현실에 속한 삶, 그러니까 땅에 발을 붙이고 산다는 말입니다. 즉 현실을 인식하고 오늘을 산다는 말이겠지요. 병에 걸린 사람은 앞날에 대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대신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평가, 그것은 나의 본질과 상관이 없지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당신은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낙담하겠지요. 그렇지만 “당신 참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나의 본질이 바뀌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 가지의 방식일 뿐, 그 평가가 본질을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평가에 좌우되지 않고 살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자신을 어떻게 그에 따라 바꿀지 신경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타인의 평가를 계속해서 신경 쓰며 살면, 결국은 자신의 삶을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제 책 중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움받을 것을 권하는 게 아니라,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깁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상황을 살아야 합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돈이든 명예든,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 그런 게 의미가 없어지겠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중요하죠.

◆과거와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자신을 산다

두 번째로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지금, 여기를 살라는 겁니다. “어떤 일이 실현된 뒤에야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습관적인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간호학과 학생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국가시험에 합격해 간호사가 된다면 비로소 내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며 “지금은 준비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에게 “지금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이유를 붙여서 ‘이런저런 게 실현된 뒤에야 내 인생이 시작된다'고 하면 인생을 10년, 20년 뒤로 연기하는 거죠. 우리의 앞날이란 내일, 모레 일도 모르는 게 아닙니까?

제가 처음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에는 ‘오늘 밤에 잠들고 내일 아침에 눈 뜨지 못하면 어떡하지’ 걱정할 만큼 앞날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지요. 내일 일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일을 생각하자고. 그 뒤로는 ‘내일 눈을 뜨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래서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집착하고 후회한다면 언제까지나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을 열심히 사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적인 나’의 모습에 눌려 신음하지 마라

세 번째로 하고 싶은 말은, 자신에 대한 ‘이상’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이상적인 자신을 바라봅니다. 이상적인 타인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지금 ‘현실의 나’는 이상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한정해서 보게 됩니다.

병을 앓아 본 사람은 알 겁니다. 재활 훈련을 할 때 갑자기 장거리를 갈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50미터 정도를 왔다갔다 해 보고, 그 뒤에 100미터를 가보는 거죠. 조금씩 조금씩 발전시켜 나갈 수는 있지만 하루아침에 이상적인 자신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나를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한 번은 제가 3만 행짜리 코드로 이뤄진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제출하기 하루 전날, 이걸 저장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실수로 삭제했습니다. 2~3일에 걸쳐 했던 작업이 쓸모없어진 거죠. 그 때 한 30초 동안 저는 굉장히 낙담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무리 한탄하고 슬퍼해도 사라진 프로그램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고민 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저는 병에 걸린 것을 계기로 이런 것,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병에 걸리지 않아도 아는 분이 있을 겁니다. 불교에서 생로병사를 네 가지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대인관계는 고뇌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늙어가는 것과 병에 걸리는 것, 죽어가는 것을 이야기하지요.

하지만 죽음을 생각해봅시다. 누구도 죽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죽음을 모르느니 죽음은 무서운 거라고 하자" 하는 식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어떤 것이든, 우리는 언젠가 죽어야만 합니다.

저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막힌 혈관을 여는 수술을 했습니다. 그때 전신마취를 했습니다. 당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동맥에 주사를 맞은 기억은 나는데, 그 뒤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인공호흡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기억나지 않는 그 몇 시간 동안 저는 죽음이란 게 이런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우린 죽음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죽음이란 그렇게 무서운 게 아닐 수 있습니다.

◆ 매 순간 완전연소하는 삶을 살자

장거리 연애하는 사람들이 저와 상담하곤 합니다. 함께 있을 때에는 괜찮은데,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너무나 괴롭다는 겁니다. 늘 그렇게 괴롭다면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날 수 없을 겁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동안 ‘불완전연소’했기 때문에 그다음에 언제 다시 만날지 생각하는 겁니다. 그날을 정말 즐겁게 지내고 ‘완전연소’했다면 다음에 언제 만날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지금 현재를 열심히 산다면 그 다음, 그 뒤의 일이 신경 쓰이지 않을 겁니다. 다음 번이 신경 쓰인다는 말은 현재에 충실하게,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대신 함께 있는 동안에도 미래에 집착했다는 거죠.

미래에 집착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것에 대해 보상받고 싶어하는 사람일 거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한 일을 인정받거나 칭찬받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거죠.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칭찬으로 인해 인간관계에 상하 관계가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대인 관계에서 칭찬이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관계에서도 아래에 있는 걸 기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이에게 칭찬을 많이 했는데도 아이가 생각처럼 자라지 않아 고민이라면 이렇게 바꿔봅시다. 칭찬 대신 “고맙다” “네가 내게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하는 겁니다.

한 예로 제게 상담을 받으러 온 한 어머니가 3살 짜리 아이를 데려오곤 합니다. 아이가 얌전하게 기다리면 “너 훌륭했다”고 칭찬합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 “얌전히 있어줘서 고마워, 도움이 됐어”라고 해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아이도 ‘아, 내가 조용히 앉아 있었던 것만으로 엄마가 굉장히 고마워했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죽음에 대해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제가 강연하는 도중에 마이크 전원을 끄면, 여러분은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겁니다.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저는 말을 계속 하겠지요. 마이크가 고장 나는 건 우리 육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떠난 분을 직접 만나거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더라도, 그 사람을 생각하며 기억하는 한 그 분은 거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 헤어진다는 건 슬프지요. 슬픔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사람이 과연 그 슬퍼하는 모습을 본다면 기뻐할까, 그런 생각은 해볼 수 있겠지요. 누군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앞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산다는 것은 춤추는 것, 순간을 즐겨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살아간다는 건 처음과 끝이 있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일본 교토에서 왔는데, 오사카 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두 시간 걸렸고 지금 이곳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사실 뉴스를 보고 오늘 한국에 올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요, 저는 지금 여기에 와 있습니다.

저는 삶을 댄스, 춤추는 것에 비유합니다. 춤을 춘다는 건 순간을 즐긴다는 겁니다. 어떤 목적을 향해 춤을 추는 게 아니라, 춤추는 그 순간 어떤 기쁨을 느낀다는 겁니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에서 끝나는지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른 나이, 스무 살이나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물론 젊은이에게는 정말 안 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마지막 날까지 열심히 살았다면, 그 죽음은 그렇게 슬픈 게 아닙니다.

아들러가 자신의 제자에게 들려준 이솝 우화가 하나 있습니다. 두 마리의 개구리가 놀다가 우유가 담긴 양동이에 빠졌습니다. 한 마리의 개구리는 비관주의자입니다. 이 개구리는 양동이에 빠진 뒤 삶을 포기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 마리의 개구리는 낙관주의자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계속해서 생각하며 다리를 움직여 헤엄쳤습니다. 계속해서 다리로 우유를 휘저은 셈인데요, 그 덕분에 우유가 버터로 변했습니다. 그 개구리는 딱딱하게 굳은 버터 덩어리를 딛고 양동이를 빠져나왔습니다.

홀로코스트 당시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도 끊임없이 자신이 어떤 쪽의 개구리인지 생각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자신을 낙관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수용소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것으로 끝이라고 여긴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이상해졌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가혹한 현실 속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렇게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이 말은 심각하진 않지만 진지하게 살자는 겁니다. 대충 사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살지만, 한 번 게임에 졌다고 해도 심각하게 여기지 말고 또 도전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순간 ‘아, 내가 멀리까지 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고, 용기를 갖고 늙음이나 병, 죽음을 맞는다면 인생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중요한 건 용기입니다. 내가 타인에게 무언가 공헌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그 공헌이란 특정한 행위를 통해 하는 게 아닙니다. 내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나 자신이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역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것. 우리가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할 때에는 용기가 필요하죠. 그런데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철 역에서 만난다거나, 같은 전철을 탄다거나.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인사라고 한다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는 겁니다. 그때 인사한 열 명 가운데 여덟 명은 같이 “안녕하세요” 하고 대답해줬습니다.

나 자신을 다른 누군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건 컴퓨터 하드웨어를 바꾸는 것과 같지요. 그렇지만 자신을 ‘갱신’할 수는 있습니다. 소프트웨어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을 계기로 타인에 대한 관점을 약간 바꿔보시길 바랍니다. 자신을, 타인을, 그리고 세상을 다르게 생각해보고 변화하는 시간이 되셨길 바랍니다.

저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의 삶, 지금 제 삶은 여생(餘生)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게 플러스 된, 더 주어진 삶인 거죠. 제가 그때 죽었다면 이렇게 여러분과 만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여러분도 다른 삶을 살았다면, 오늘 저와 이 자리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겠지요. 오늘 만남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질의응답

-'늙어갈 용기'에서 대화할 때 '누구와 이야기하는지'를 정확하게 정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회사에서의 대화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상사가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으로 부하 직원을 혼낸다고 해봅시다. 그때 ‘상사에게 혼났다’는 데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어떤 내용으로 혼내는 것이며 그 내용은 이치에 맞는 것인지 보라는 겁니다. 그게 이치에 맞지 않으면 저항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으로 혼내는데도 부하 직원이 참는다면, 어떤 목적이 있으니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사의 지시대로 하는 일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면 그 책임을 상사에게 전가하고 싶은 목적일 수 있죠.

상대가 상사냐 아니냐가 아니라 혼내는 내용이 맞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리고 목적에 따라 싸울지 안 싸울지, 대항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게 맞습니다. 그의 말에 수긍을 할 수 없다면 ‘또 시작이구나, 또 떠드는구나' 하는 눈으로 쳐다보면 됩니다.(웃음) 정말 훌륭하고 능력있는 사람은 자신이 대단하다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무능한 상사 때문에 소중한 삶을 불필요하게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회사생활을 할 때에는 일을 잘했다 못했다를 즉각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년 퇴임 한 뒤에 제가 하는 일이 공헌한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에 대한 공헌을 바르게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류라는 의미의 큰 공동체에 대한 공헌은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반응을 곧바로 확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다못해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식사 후 가족들이 모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군가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대부분 주부가 설거지를 하지요. 다른 가족들은 주부가 설거지 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설거지하는 주부는 ‘왜 나 혼자 여기에서 이렇게 설거지 해야 하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설거지를 한다는 건 가족을 위한 공헌이지요. 그렇게 여긴다면, 공헌하는 자신은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대인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왜 다른 가족은 안하나’ 생각할 수 있겠지요. 즐거운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는 겁니다. 다른 가족이 도와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 주부는 자신이 설거지함으로써 가족에게 공헌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공헌이란, 자신이 스스로 느끼느냐 아니냐가 중요합니다. 타인의 인정과 평가에 의존하는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남자가 어느 날부터 집 앞을 지나는 차에 손을 흔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다들 그 남자를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점차 그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출근할 때 그 집 앞을 지나지 않던 사람들도, 그 남자를 보기 위해 일부러 그쪽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손 흔드는 행위에 대한 결과가 바로 돌아온 거지요.

그런데 그 행위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큰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 지역 신문이 이 이야기를 기사로 썼고, 그 이야기를 한 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책에 실었습니다. 그게 일본어로 번역됐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책을 읽었습니다. 미국 작은 마을의 한 무명 남성이 한 행동이 지금 한국, 서울에 있는 여러분에게까지 전달된 겁니다.

한 사람의 힘이란 의외로 큽니다. 자신의 힘이 어디까지 전달될지 그것을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눈 앞에 있는 사람이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힘은 세계 저 끝까지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런 힘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헌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공헌이 더운 한여름에 추운 겨울을 상상하는 것만큼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래도 한 번쯤 이런 공헌에 도전해보셨으면 합니다.

-33살 직장인입니다. '미움받을 용기'에서, 타인의 칭찬에 연연하지 말고 용기 있게 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변에서는 제게 결혼이나 직장 등 사회적 안정에 대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저를 낙오자로, 열등하다고 봅니다. 자꾸 자존감이 낮아지는데 어떻게 하면 이런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긴 합니다. 인간에겐 세 가지가 있는데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간단하게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게 제일 낫겠지요. 그런데 열등감을 느낀다는 말은, 해야만 하는 것,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필요합니다.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해야 하는 것이 훨씬 높은 곳에 있다면 그만큼 스트레스가 생기지요. 할 수 있는 것에서 해야만 하는 것을 향해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목표가 정당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동차를 갖거나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하는 것, 많은 재산을 쌓는 것. 그게 정말 가치가 있는 걸까요? 내가 병에 걸렸을 때,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됐을 때에도 그걸 원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그럴 때에도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것, 그런 게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늘 작은 가방에 필요한 것들을 담아 다니곤 했습니다. 그가 어느 날 냇가에서 어린 아이가 손에 물을 담아 떠 마시는 걸 보고는 “이 아이에게 내가 졌다”며 가지고 다니던 가방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처럼 모든 것을 버리는 경험을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그 경험에서 정말 자기가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일본 아이들을 예로 들면, 거의 모든 아이들이 게임기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걸 왜 갖고 싶은지 물어보면 “다른 애들 다 갖고 있으니까”라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아이에겐 게임기를 사 주면 안 되겠지요.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 게임기를 갖고 싶어하는 아이와 같지 않나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다고 하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계속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郎, 59)

일본 교토대에서 그리스 로마 철학을 전공했다.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던 중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을 접하고 1989년부터 집중 연구해왔다. 저서로 ‘행복해질 용기’, ‘늙어갈 용기’,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총 10권의 책이 번역돼 나왔다. 2013년 작가 고가 후미타게와 함께 펴낸 ‘미움받을 용기’가 2014년 11월 한국에 번역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유명세를 탔다. 현재 일본 아들러 심리학회 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