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은 지난달 14일 아리랑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129호 또는 130호 아리랑'으로 지정한다고 예고했다.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이다.

◆뒤늦게 국가무형문화재가 되는 사연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하마터면 ‘중국 것’이 될 뻔했다. 2011년 중국은 조선족 아리랑을 자국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 명록적 통지 아리랑(阿里郞) 11-147호’로 지정했다.

여기에 놀란 우리 정부는 2012년 다급히 아리랑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신청했고, ‘한국의 서정민요 아리랑’(Arirang, lyrical folk song in the Republic of Korea)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됐다.

뒤이어 북한도 201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리랑 민요’(Arirang Folk song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로 유네스코에 등재했다. 이로써 아리랑은 한민족의 노래에서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됐다.

그럼에도 아리랑은 정작 국내에서는 공식 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했다. 문화재보호법 규정 때문이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려면 종목과 함께 기능 혹은 예능 보유자(보유단체)가 있어야 하는데, 아리랑은 보유자를 특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정부는 지난해 법을 고쳐 특정 보유자 없이도 무형문화재로 인정할 수 있게 했다. 아리랑은 이제 명실상부 국내외에 걸쳐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게 됐다.

◆이미 1930년대에 세계에 널리 퍼져

하지만 사실을 따져보면 아리랑은 이미 반세기 전에 세계적인 노래가 돼 있었다. 일본을 상징하는 노래 ‘사쿠라’(サクラ·Sakura)나 중국을 상징하는 노래 ‘모리화’ (茉莉花·Jasmine Flower)보다, 아니 미국의 ‘어메이징 그레이스’(The Amazing Grace)보다 더 세계 곳곳에 알려졌었다.

그럴 수 있었던 조건은 네 가지였다. 하나는 아리랑의 내적 조건으로 곡의 간명성과 사설의 다의성(多意性)이다. 곡의 간명성이란 사설 두 번째 줄 선율과 후렴 첫 줄 선율이 유사해 후렴을 되풀이하게 하는 관성력을 말한다.

사설의 다의성이란, ‘아리랑’이 쉽고 친근한 세 음감(音感)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아리랑 고개’나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 같은 구절의 해석이 개인 이상의 국가, 민족의 의미로 확대할 수 있어 공유의 폭이 넓다는 뜻이다.

이런 아리랑의 내적 조건이 바로 어떤 노래에도 견줄 수 없는 ‘탁월한 보편성’(excellent universality)으로 작용하게 했다.

이런 속성을 정체성으로 둔 아리랑은 1930년대 중반을 전후해 한반도에 널리 확산됐다. 특히 아리랑 노래를 담은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은 전국의 극장은 물론, 벽촌의 이동 극장까지 돌고 일본과 중국 교포 사회로도 퍼져 나갔다. 바야흐로 아리랑은 전 장르에 파급되었다.

“아리랑이 완성되어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영화 ‘아리랑’과 이 영화 주제가 ‘아리랑’과 함께 조선영화계에서 보지 못한 센세이슌을 일으키었으니 지금도 그 ‘아리랑’ 노랫소리 들리지 않는 곳이 없고 춤에도, 연극에도, 지금의 영화에도 이용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일….” (나운규 은막 천일야화, 조선일보 1940년 2월15일)

아리랑이 확산한 세 번째 요인은 1930년대 중국과 일본, 러시아, 미국으로 살길을 찾아 떠난 동포들이 고국을 그리면서 현지의 각종 의례에서 불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1950~1953년 6.25 전쟁 때 참전한 유엔 병사들이 귀국하면서 함께 간직해서 간 기념품이 된 결과이다.

당시 ‘예술통신’ 1954년 7월 25일자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근착 美紙(미국 신문)가 보도하고 있는 뉴쓰에 의하면 目下(목하) 미국의 경음악계엔 난데없이 ‘아리랑’이라는 애뜻한 東洋情緖(동양정서)의 신곡이 급작스럽게 유행되고 있는데 거리에서 사교실에서 이 노래의 多情多恨(다정다한)한 멜로디는 모든 사람의 귀를 기울이게 하고 드디어는 너도나도 唱和(창화)하게 될 지경이라고 한다. 더욱이 미국에서 유명한 흑인 째즈 밴드 ‘B·C·B’의 뉴욕시 연주엔 이 노래가 가장 인기를 차지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아리랑’일 것은 틀림없는데, 바다 건너 몇 만리 미 본토에까지 그 같이 유행되어진 裏面(이면)엔 그동안 조선 三八 以南(3.8선 이남)에 주둔하였다가 제대 귀국한 병사들이 돌아가서 부른 것에서 비롯된 것이 급기야 오늘날 미 文化交流(문화교류)의 先鋒(선봉)을 차지하게 된 터이라 한다.”

이상과 같은 내외적 조건으로 ‘아리랑’은 1960년대를 맞으며 “아리랑은 우리 민족이 가진 정서에 가장 잘 적응하는 곡조로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되었다고 당시 평론가 이흥렬은 세계일보 1958년 3월 18일자에 적었다. 동시에 아리랑은 세계에서도 곧 'KOREA'로 통하게 된 것이다.

◆다면체의 노래 아리랑

앞에서 ‘세계인의 노래’로서 아리랑의 위상을 제시했는데, 이때의 아리랑은 사실은 50여 종 중 소위 본조아리랑을 말 한 것이다. 아리랑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로 탄생했다고 해서 ‘주제가 아리랑’, 영화 ‘아리랑’이 개봉된 곳이 서울 단성사였다고 해서 ‘서울경기 아리랑’, 1800년대 말 H. B. 헐버트의 채보 아리랑 이후 것이라고 해서 ‘신아리랑’, 1930년대 이후 가요와 연극, 무용, 문학 등 다른 장르에도 소재로 활용됐다는 점에서 ‘본조 아리랑’이라 했다. 그리고 50여 종 중에서도 그 대표성을 인정해 수식 없이 그냥 ‘아리랑’으로도 불렸다.

사랑받는 아이는 이름이 많다는 옛말처럼 아리랑은 출현 당시나 지금이나 가장 폭넓게 사랑받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아리랑의 세계는 복잡하기도 하다. 형성 지역과 시기, 유통 매체, 수용과 향유 층에 따라 각기 달리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또한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오늘의 것이면서도 옛것이다. 이러한 ‘아리랑의 세계’는 중층적이고 다면적인 현상들에 의해 형성된 것인데, 주로 1930년대 말의 일이었다.

이때 형성된 체계는 1970년대 국악계가 제2세대로 교체되는 인적 변화 속에서도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렀다.

◆아리랑 확산에 日 레코드회사, 요정도 기여
민족의 노래인 아리랑이 초기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컬럼비아 레코드 같은 일본의 대형 음반사가 관여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당시 컬럼비아 레코드는 서울에 지사를 두고 전국적인 유통망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상업적으로 조선인의 기호를 따랐고, 경성방송의 우리말 방송인 제2방송을 통해 음반과 음반 취입자인 기생들을 출연시켜 정기적으로 국악을 소개했다. 조선일보 같은 일간지도 고정란을 두고 프로그램 해설 기사와 특집을 다뤘다.

특히 일본인 관광객을 중시했던 각 권번과 명월관 같은 요릿집에서 아리랑을 조선 성악의 주 레퍼토리로 삼은 것이 크게 기여했다.

이번에 우리가 유네스코에 제출한 아리랑 등재 신청서에는 정선아리랑을 비롯한 20여 가지 지역명을 단 아리랑이 제시됐다. 이 목록과 1930년대말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된 아리랑들을 비교해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936년 12월 12일 방송된 특집 ‘아리랑집(集)’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아리랑(산아리랑·서울경기·본조아리랑)②京(경)아리랑(서울경기아리랑)③密陽(밀양)아리랑④景福宮(경복궁)아리랑(H. B. 헐버트 채보)⑤元山(원산)아리랑(어랑타령)⑥江原道(강원도)아리랑⑦江原道메나리(정선아라리)⑧全羅道(전라도)아리랑(진도아리랑)⑨긴아리랑(長調장조아리랑)⑩新(신)아리랑(창작 가요아리랑)⑪咸慶道(함경도)아리랑(서도아리랑)

이 중 유네스코 신청서에 기재한 것과 다른 것은 ⑤元山아리랑(어랑타령)과 ⑪咸慶道아리랑(서도아리랑)이다. 전자는 오늘날 어랑타령이라고 하는 것으로, 후렴이 없으면 아리랑에 넣지 않는다는 기준에 따른 것이다.

유네스코 신청서에는 아리랑을 ‘아리랑, 또는 그와 유사한 발음의 어휘가 들어 있는 후렴을 규칙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띄엄띄엄 부르는 한 무리의 노래’라고 규정했다.

북한도 “아리랑이란 곡명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후렴의 첫 구절을 따 붙인 것”이라고 하여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여기서 문제는 북한은 우리가 ‘본조아리랑’으로 말 하는 것을 ‘1920년대 아리랑’으로 말하고 ‘함경도아리랑’, 즉 서도아리랑을 ‘본조아리랑’으로 규정해 우리와는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세계에 유례 없는 다양성과 자발적 전승

문화재청이 아리랑을 국가지정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한 발표문에서 ‘아리랑’은 기존 아리랑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세심한 해석이 요구된다.

아리랑의 시원과 각 아리랑의 형성 시기도 그렇고, 음악적 특징과 기능의 차이, 토속아리랑과 신민요아리랑과 가요아리랑 간의 변별과 성격 문제도 규명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현실적으로 아리랑을 둘러싼 기원의 문제는 남북한과 중국, 3자 간에 심각한 논쟁거리이다. 우리는 청동기 시대 강원·경상 지역 일대의 메나리조 음악권에서 출현했다고 보는데, 북한은 조선 초기 함경도 지역 농민 봉기에서 형성됐다고 하고, 중국은 한사군 시대 중국 내륙 부족 집단이 평양에 세워진 낙랑군으로 이주하며 부른 노래라고 주장한다.

이런 심각한 견해 차이는 북한은 혁명사관에 따라, 중국은 동북공정 논리에 따라 아리랑의 발생 문제에 접근한 데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에도, 아리랑은 다른 어떤 노래와도 다른 고유한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이번 문화재 지정을 계기로 새삼 우리가 모두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아리랑은 시대와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형성, 진화해 왔으며, 오랜 역사적 전승 과정에서 지역민 스스로 자발적으로 계승해 온 문화유산이라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22만평방km라는 그리 넓지 않은 국토에서, 나아가 중국(장백산아리랑 등 ), 일본(아리랑 야곡 등), 러시아(사할린아리랑) 등지로 나가 살면서도 고향 아리랑을 전승함은 물론 새로운 아리랑을 지어 불러 그 종류가 무려 50여 종에 이른다는 사실은 누가 봐도 놀라운 것이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이 다양한 변천사는 그 자체로 연구 주제가 될 만하다.

또한 전승의 자발성도 주목에 값한다. 각 지역민에 의해 보존회가 결성되고, 지역 정서를 반영해 대대로 향유됨으로써 굳이 인간문화재를 지정하지 않더라도 미래 계승이 보장된 사실은 다른 유산들과는 현저히 다른 양상이다.

◆민족의 고난 극복 의지의 추동체

경북 직지사(直指寺)의 방장 관응스님은 “아리랑은 진언(眞言)”이라고 했다. 시인 고은은 아리랑을 ‘고난의 꽃’이라고도 불렀다. 근대사 속에서 아리랑은 개인에게나 집단에나 나아가 국가적으로도 고난을 극복하는 데 함께했다. 다양한 지역과 성격과 형성 시기의 차이에도 아리랑은 공통의 요소, 즉 저력을 갖고 있음을 웅변했다.

그것은 때로는 이별과 애수로 인한 정한(情恨)의 노래로 함께했고, 때로는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저항심의 발현체로 함께 했으며, 양 극단이 부딪히는 상황에서는 차단체(遮斷體)로 기능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고난과 역경의 시기에는 극복 의지의 추동체(推動體)로 역할을 했다. 지금도 국내외에서 국가적 행사나 남북 간 행사가 열릴 때마다 아리랑의 가락이 뜨겁게 불리는 것은 이와 같은 민족사 속에 깊이 자리잡은 내력 때문이다.

◆김연갑 사단법인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김연갑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아리랑 박사' '아리랑 연구가'로 불리는 아리랑 연구의 권위자다. 1986년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펴낸 뒤 쉼 없이 아리랑, 애국가, 우리 노래 관련 논문과 저서를 발표해 왔다. 현재 사단법인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