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에서 원자재 시장의 상승을 전망하는 황소(강세론자)가 사라졌다."

국제 금값이 5년 만의 최저치로 떨어진 20일, 마켓워치와 블룸버그통신 같은 미국 경제 전문 매체들은 월가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원자재 담당 분석가 대부분이 "금값이나 유가 하락세를 막아줄 호재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원자재 시장의 부진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한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리스 부채 협상과 이란 핵 협상 타결로 투자자들 사이에서 안전 자산 선호가 사라졌다"면서 "원자재 시장에서 자금의 엑소더스(대탈출)가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금(金)·유가·설탕 등 원자재 가격 줄줄이 하락

이날 뉴욕상품거래소에서 금값은 직전 거래일보다 2% 넘게 하락한 온스당 1106.7달러에 거래되며 5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최고치였던 2011년 8월(온스당 1888.7달러)에 비하면 4년 만에 41% 폭락한 것이다.

21일 서울 중구 외환은행 본점 딜링룸 환율 현황판에 표시된 원·달러 환율이 전날보다 6.2원 오른 1158.30원을 기록했다. 미국의 연내 금리 인상 가능성이 커지면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최근 3개월간 90원 가까이 올랐다. 2년 1개월 만에 최고치다.

다른 원자재 가격도 줄줄이 하락했다. 8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74센트(1.45%) 떨어진 배럴당 50.15달러로 마감하며 지난 4월 2일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런던 선물시장의 브렌트유도 전날보다 1% 하락한 배럴당 56.53달러 선에서 거래됐다. 설탕 가격은 4.4% 급락한 파운드당 11.44센트에 거래됐다. 2009년 1월 이후 6년 6개월 만의 최저치다. 미 증권사인 인터내셔널 FC스톤의 투자 전략가 에드워드 마이어는 "종류에 관계없이 모든 원자재가 약세를 보이는 상황"이라며 "원자재는 당분간 좋은 투자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미국 기준금리 인상이 결정적

원자재 가격의 동반 폭락엔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원유 시장을 보면, 이란 핵 협상 타결에 따라 3000만배럴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란의 막대한 원유 재고가 수출될 것이란 공급 과잉 우려가 유가를 떨어뜨리고 있다. 최고 안전 자산으로 꼽히는 금값이 하락한 이유는 그리스와 이란 위기가 타결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자재 블랙홀이라는 중국 경제의 성장 둔화도 이유로 꼽힌다.

하지만 원자재 시장이 동반 급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르면 9월로 예상되는 미국의 금리 인상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제로(0) 금리 정책에 실망해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원자재 시장에 쏟아져 들어왔던 자금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 통화 정책을 결정하는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 당국자들은 연내 기준금리 인상을 공언해왔다. 재닛 옐런 연준 의장이 지난 14일과 15일 미 의회 청문회에서 연속으로 "경제 상황이 현재 기대대로 전개된다면 연내 어느 시점에 기준금리를 인상할 적절한 여건이 마련될 것"이라며 연내 금리 인상 방침을 재확인했다. 20일엔 제임스 블러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장이 폭스TV에 출연해 "9월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이 50%가 넘는다"고 말했다.

달러 가치 나 홀로 강세

미국의 금리 인상은 미국 경제가 정상화되고 있다는 의미로, 반드시 세계경제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유럽과 중국 같은 다른 경제권이 부진한 가운데 미국만 미약하나마 '나 홀로 회복세'를 보인다는 게 문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1990년대에 세계 GDP(국내총생산)의 30%를 차지하던 미국의 비중이 20%대 초반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미국만으로 세계경제 회복을 이끌긴 어렵다"고 전했다. '미국 경제 회복→세계경제 회복→원자재 시장의 강세'라는 세계경제의 회복 공식이 깨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가 간 경제의 펀더멘털(기초 체력) 차이를 보여주는 외환시장에서는 이미 미국과 세계경제의 불균형 회복세가 반영되고 있다. 미국 달러화 가치가 다른 통화보다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1유로당 달러 값은 작년 7월 1.34에서 현재 1.09까지 하락(달러 가치 상승)했다. 호주달러가 올해 미 달러화 대비 9.8% 하락한 것을 비롯, 뉴질랜드달러(-16%)와 캐나다달러(-11%) 등 원자재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의 통화 가치도 직격탄을 맞았다.

원화 환율, 2년 만에 1150원대로

미국 금리 인상으로 달러 가치가 높아지면서,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지난달 하순 이후 가파르게 올라 지난달 22일 달러당 1098.8원이던 환율이 21일엔 1158.3원으로 59.5원 올랐다. 2013년 6월 25일(1160.2원) 이후 2년 만에 가장 높다. 전문가들은 미국 금리 인상이 가까워질수록 달러화 강세가 지속되면서 연말 환율이 달러당 1180원대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예상한다.

환율 상승(원화 가치 하락)은 올 상반기 일본 엔화 약세 때문에 고전했던 수출 기업들에는 단비 같은 소식이다. 21일 증시에서는 현대차 주가가 7.3% 급등한 것을 비롯, 기아차와 현대모비스 등 '현대차 3인방' 주가가 일제히 상승했다. 원화 약세로 실적이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이상재 유진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원·달러 환율 상승세가 이어지면 자동차·기계·통신기기·섬유 등 환율과 상관계수가 높은 업종의 실적이 개선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있다. 외국인 투자가 신흥국에서 이탈해 주식과 채권 시장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고, 미국을 따라 한국이 금리를 인상할 경우 가계 대출자들의 이자 부담이 커진다. 다만 경제 전문가들은 미국의 금리 인상이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이어서 충격이 크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