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자문으로 활약한 킵손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명예교수는 영화의 아이디어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방정식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아인슈타인이 100년전 만든 하나의 공식에서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말 개봉한 미국 공상과학(SF)영화 ‘인터스텔라’는 시작부터 끝까지 물리학과 수학에 기초해 만들어진 첫 블록버스터 영화로 화제가 됐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반상대성 이론과 여기서 파생된 웜홀(wormhole·다른 시공간을 잇는 통로), 다차원 공간 같은 어려운 이론이 영화 곳곳에 등장하지만 1027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30년 넘게 웜홀의 비밀을 쫓는 킵 손(75ㆍ사진)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명예교수는 이 영화가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일등 공신이다. 킵 손 교수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와 브랜드 박사가 먼 은하계로 빠르게 이동하는 통로인 ‘웜홀’ 이론을 처음 주장한 세계적 이론물리학자로 통한다. 2006년 제작자인 린다 옵스트와 인터스텔라 시나리오의 바탕이 된 플롯을 처음 내놓고 나서 8년 만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실제 영화로 완성했다. 영화 시나리오의 바탕이 된 트리트먼트를 직접 썼고, 제작 기간에 자문 역할을 맡았다. 그는 앞서 코스모스의 저자이자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참여한 영화 콘택트에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킵 손 교수는 20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개막한 서울디지털포럼(SDF)에서 “영화에 등장한 웜홀과 거대한 블랙홀의 모습, 빛이 블랙홀의 중력에 꺾이는 모습, 탐사선이 블랙홀에 빠져들어 가는 모습은 실제 수학적인 계산 결과를 바탕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킵 손 교수는 “영화에 등장하는 웜홀은 아직 존재가 규명되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자신과 한국 과학자들이 참여하는 레이저간섭계중력파천문대(LIGO·라이고)를 통해 웜홀의 증거인 중력파를 검출하는 프로젝트도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가 성공을 거둔 것은 튼튼한 과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생각한다”며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와 다른 물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새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킵 손 교수에 따르면 거대한 우주는 별과 행성, 성운들이 가득 차있다. 은하계에는 굴절된 이면이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는 데, 워낙 중력이 강해 모든 걸 빨아들인다. 바로 블랙홀이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계에는 블랙홀이 있지만, 태양계에는 없다.

멀리 떨어진 은하인 안드로메다에서도 블랙홀을 볼 수 있다. 안드로메다의 중심에는 거대한 블랙홀이 있는데 태양 질량의 1억배에 이른다. 하지만 안드로메다는 우리가 갈 수 없는 거리에 있다. 우리 은하에서 안드로메다까지 가는 데는 빛의 속도로 날아가도 200만년이 걸린다.

킵손 교수가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머피 역을 맡은 제시카 차스테인에게 웜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태양 주위를 도는 토성 부근에서 이상한 물체가 발견됐다. 거대한 유리구슬처럼 보이는 물체 안에는 여러 별과 성운이 보인다. 안드로메다와 흡사한 모습을 띤다. 우리 은하와 20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를 잇는‘웜홀’이다.

2차원의 평면에 한 점(우리은하)과 또 다른 한 점(안드로메다)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이 평면을 접어서 점과 점이 서로 마주 보게 해본다. 점들은 평면이었을 때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에 놓이게 된다. 웜홀은 금방 사라지는 특징이 있지만, 이 사이로 물체가 오고 가게만 한다면 수백만 광년이 떨어진 다른 은하를 왔다갔다할 수 있다.

지구에서 출발한 탐사선은 연료를 아끼기 위해 먼저 토성 쪽이 아닌 금성을 끼고 돌며 추진력을 얻는다. 토성 쪽으로 다가가자 토성의 일부분이 바나나처럼 왜곡된 모습 보게 된다. 그리고 웜홀을 통과한 탐사선은 안드로메다에서 엄청난 크기의 블랙홀을 마주하게 된다.

블랙홀은 물질과 빛이 안으로만 들어가며 밖으로 탈출할 수는 없는 구형의 경계면이 있다. ‘사건의 지평선’이다.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감옥과도 같다. 블랙홀 안쪽은 욕조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소용돌이가 돌고 있다. 사건의 지평 아래로 빨려 들어가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외부에 도달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블랙홀은 주변에 토성 고리 같은 원반층이 있는데 블랙홀의 적도를 가로지른다. 블랙홀 주변에는 고리모양이 보이는데 이는 블랙홀 뒤의 원반층이 굴절된 것이다. 빛이 강력한 중력장 주변을 지날 때 휘는 중력렌즈 현상이다.

블랙홀에 가까워질수록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도 일어난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강한 곳, 즉 블랙홀 주위 같은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진행된다. 예를 들어 중력이 강한 곳에서 외부 관측자의 심장이 1초에 한 번씩 10번 박동하면 10초가 걸린다고 하면 중력이 약한 곳에서는 시간 길이가 달라 10번 박동하면 100초가 걸린다. 블랙홀 바깥의 모선에서 셔틀을 타고 블랙홀 가까이 가게 되면 시간은 느려지고 사건의 지평선에 도착하면 사실상 시간은 멈춘다.

킵 손 교수가 설명하는 웜홀을 이용한 우주 여행은 이렇다. 이는 인터스텔라에도 시각적으로 반영됐다.

-이론물리학자로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참여한 동기는.

“어릴 때부터 책과 영화를 보고 과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실제로 나를 과학자로 끌어들인 건 영화였고 책도 그 역할을 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조지 가모브의 대중서가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가모브의 책을 보면서 빚을 졌다고 생각했고 갚고 싶었다. SF분야의 뛰어난 제작자인 린다 옵스트가 참여를 제안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참여했다.”

-한국에서 영화를 본 사람만 1000만명이 넘는다. 과학자로서 어떻게 보는가.

“매우 놀랍고 고무적인 일이다. 1000만명 관객 중에 10%가 영화를 보고 과학에 관심을 갖고 가까워져도 100만명의 미래 과학자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안에 활용된 물리학 이론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철저히 녹아 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의 수식에서 시작한다. 상대성이론의 중력장 방정식을 풀면 웜홀을 기술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1912년 처음 만든 방정식을 기반으로 상대성 이론을 내놨다.

상대성 이론으로 설명하면 중력이 강한 곳에서 시간의 속도가 더디게 흐른다. 쿠퍼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블랙홀에 가까운 행성에 있었다면 딸 머피는 중력이 작고 빨리 흐르는 지구에 있었다. 지구에서도 지표면과 우주궤도를 도는 인공위성 간에 미세하지만, 중력의 차이로 시간의 차이가 난다. 스마트폰이나 위치확인시스템(GPS)은 위성과 지표면에서 발생하는 시간차를 보정해준다. 이런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수식이 아닌 화면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SBS제공

킵 손 교수는 1973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대성이론 교과서 ‘중력(Gravitation)’을 미스너, 휠러와 함께 썼다. 인터스텔라에서 나오는 웬만한 법칙은 이 책에 대부분 소개된다. 이 책에서 웜홀은 학술용어로 ‘아인슈타인-로젠 다리’라고 표현한다. 킵 손 교수는 작품 활동과 별도로 웜홀의 실체를 규명하는 연구에도 참여하고 있다.

-쿠퍼가 다른 은하를 다녀와 딸을 만나는데만 89년이 걸렸다. 웜홀은 정말 존재하고 이를 이용한 여행은 가능할까.

“1985년 웜홀 이론을 처음 내놨는데 30년간 이를 뒤집는 이론이 나오지 않았다. 웜홀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증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웜홀은 너무 빨리 닫히기 때문에 존재를 증명하기도 관측하기도 어렵다.

영화 콘택트를 만들 당시 칼 세이건 박사도 이 부분에 관해 물어왔다. 웜홀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그 사이에 뭔가가 빠져나와야 하고 중력 때문에 빨리 닫히지 않도록 음의 에너지인 ‘반중력’을 심어야 한다. 웜홀의 통로를 열린 상태로 유지하려면 이를 상쇄하는 음에너지를 삽입해야 한다. 이런 실험실에서 음의 에너지를 만들 수는 있지만, 웜홀이 열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얻는 것은 아직까지 어렵다.

하지만 그간의 연구를 모아보면 웜홀을 우주 공간에 충분히 존재할 것으로 본다. 다만 웜홀이 빨리 닫히는 이유를 증명하는 게 제일 큰 숙제다. ”

-영화에는 인간이 사는 3차원을 뛰어넘는 다차원 공간이나 웜홀처럼 시각화하기 어려운 개념이 많이 등장한다. 어려움이 없었나.

“웜홀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과 여기서 파생된 공식에 넣어 계산된 것이다. 여러 수학자와 개념을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 실제 수식을 계산했고 이를 바탕으로 화면을 만들었다. 앞에서 언급했듯 아인슈타인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시작했고 방정식을 이용해 시각화했다. 실제로 영화에서 광원에서 나와 카메라 렌즈에 도달한 빛도 모두 수식으로 계산해서 미리 살펴봤다. 영화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철저히 이용해 만든 첫 블록버스터이고 그 덕분에 아카데미상도 받았다.

인터스텔라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모든 개념을 3차원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4차원을 3차원으로 줄이는 것처럼 우리 눈이 인지하도록 차원을 줄이는 일이었다. 차원수가 줄면 상실되는 정보가 있는 건 사실이다. 마음 속에서 그림을 그려보고 수학으로 계산하면서 꼼꼼히 점검했다. 지금은 4차원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 직감이 생겼다.”

-웜홀의 존재를 밝혀줄 중력파 검출 연구에 대해 소개해 달라.

“우주에는 작은 블랙홀이 있다. 두 블랙홀이 충돌하면 사건의 지평선이 충돌해 서로 연결되면서 소용돌이가 담배연기를 내뿜듯 물결처럼 우주 밖으로 발산된다. 이 물결을 중력파라고 하는데 안드로메다에서 웜홀을 통해 우리 은하 쪽으로 넘어온다. 한국을 포함해 레이저간섭계중력파천문대(LIGO)는 200만 광년을 이동해서 도달한 중력파를 검출해 웜홀의 증거를 잡는 프로젝트다. 정밀도가 0.1펨토미터(Fm·1000조분의 1)로, 인류가 여태껏 만든 과학장비 가운데 가장 높다.

라이고는 우주 중력파의 실체뿐 아니라 블랙홀에 대해 나온 가설을 직접 확인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라이고는 우주를 해석하는 창이다.”

-일부 학자들은 영화가 물리학 이론을 왜곡했다고 지적한다.

“대중에게 물리학 이론을 전달할 때 언제든 왜곡 소지가 있다. 심지어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왜곡이 일어난다. 물리학은 매우 어려운 학문이다. 보통 수학 공식을 통해 진리를 도출하지만, 개념을 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도식화한 그림을 통해 동료 과학자에게 개념을 전달한다. 그림은 개념을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러다 보니 왜곡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를 왜곡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게 임무라고 생각한다.”

킵 손 교수는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과 제작자인 린다 옵스트와 새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다음 작품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인터스텔라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한 이론 물리에 대한 얘기가 소재로 작업을 하고 있다. 인터스텔라는 2006년 8월 제안된 지 8년 만에 제작을 마쳤다. 현재 준비 중인 영화는 8~10년 정도 뒤에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9개 이야기로 초안을 만들었다. 대략적인 소개와 적용될 과학 이론을 담은 개요다. 놀란 감독은 작품 내용을 사전에 전혀 공개하지 않는 걸로 신비감을 확보했다. 나 역시 비밀스럽게 조금씩 정보를 흘리면서 관심을 끌 계획이다.”

-반 세기간 한 길을 가는 게 쉽지 않다. 그 길을 가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게 바로 호기심이 아닌가 한다.

“호기심은 과학자로서 내 자신을 발전하게 한 원동력이다. 우주를 이해하게 해주는 법칙을 찾거나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처럼 고도의 기술을 만든 원동력도 호기심이다. 파인만이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이 내놓은 이론들도 모두 호기심에서 기인한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들보다는 호기심이 떨어진다.(웃음)”

킵 손 교수는 마지막으로 “아인슈타인과 같은 선배 과학자에게 빚을 졌고 앞으로 이 빚을 후배 과학자에게 어떻게 갚아 갈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과학자가 하지 않은 영역을 충실히 연구해 답을 찾고 후배 과학자들은 그 토대 위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빚을 갚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