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이나 차고에서 혼자 창업을 준비하는 시대는 끝났다. 창업 준비 과정에서부터 서로의 꿈을 얘기하고, 뜻이 맞는 사람이 힘을 합쳐 시너지 효과를 내는 젊은 '공유와 협업'의 공간이 속속 등장 중이다.
무료 혹은 저렴한 가격으로 업무 공간을 이용하거나, 창업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소도 많아지고 있다. 정부기관이나 대기업이 운영하는 창업 지원 기관, 공동의 업무 공간에서 일하며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카페형 공간 등 그 형태도 다양해지는 추세다. '벤처의 산실'을 찾아가 봤다.[편집자주]

27일 오후 디캠프 6층 다목적홀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모여 있다.

27일 저녁 6시,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자 강남 선정릉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적갈색 건물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6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파티 음악과 테이블 위에 깔려 있는 명찰들이 참석자들을 반긴다. 입구 한쪽에선 커피머신이 돌아가고, 바로 옆 테이블에선 즉석에서 참석자들이 원하는 문구를 그림처럼 그려주는 캘리그라피(Calligraphy, 손으로 그린 그림 문자) 작업이 한창이다.

100여명에 이르는 참석자들로 이미 홀은 가득 차있다. 한 손에 맥주와 샌드위치를 든 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하기도 한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간이 부스에서 회사 제품이나 서비스를 홍보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 대표는 야외 테라스에서 우연히 만난 벤처투자가를 대상으로 즉석 1분 피칭(설명)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 스타트업의 산실이라고 불리는 디캠프(D.CAMP)의 2주년 기념 파티 모습이다.

27일 오후 디캠프 6층, 참석자들에게 캘리그라피를 그려주고 있다.

지난 2013년 3월 27일 문을 연 디캠프는 은행권청년창업재단이 설립한 창업 지원 기관이다. 2, 4, 5, 6층 4개 층에 총 1196평 규모의 공간을 보유하고 있는데, 창업가들을 위한 80석 규모의 협업 공간, 스타트업 입주 및 보육 공간, 해외 투자자와 스타트업을 위한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D.Office)’등으로 구성돼 있다.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투자를 받은 창업가들이 서로 인맥을 쌓으면서 정보를 나누고,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 조언을 해주는(멘토링) 등 창업과 관련된 여러가지 일을 모두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창업 생태계 허브를 지향한다’고 표현한다.

27일 오후 디캠프 6층 테라스에 스타트업 관계자들이 모여 있다.

창업 관련 경력을 써넣는 멤버십 등록을 거치면 누구나 디캠프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 현재 디캠프에 창업 프로필을 등록한 창업자는 1만명이 넘는다. 지난 2년간 약 3만1500명(누적)이 디캠프 협업공간에서 창업을 준비했다.

◆ 한국 벤처 생태계의 허브

비트코인 업체 코빗(korbit)의 유영석 대표는 2013년 초 이곳에서 김진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창업을 준비했고, 지난해엔 소프트뱅크벤처스 및 미국 실리콘밸리의 유명 벤처캐피털(VC)로부터 3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유영석 코빗 대표.

유 대표는 2013년 3월 디캠프 오픈 직후인 4월부터 디캠프에 나왔다고 한다. 사무실 하나 없이 디캠프 건물 4층에 마련된 협업 공간에서 홀로 창업을 준비했다. 이후 김 공동 창업자가 합류해 창업팀이 만들어졌고, 7월에 법인을 설립했다. 국내 최초의 비트코인 거래소 운영 업체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만해도 두 명의 창업가는 디캠프 4층에 있는 공용 사물함을 사용했으나, 그해 9월부터 12월까지는 디캠프의 정식 입주사 자격을 얻어 5층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5층 세미나실에서 한국 최초의 ‘비트코인 밋업(meetup)’ 행사를 개최해 인맥을 쌓고 최근엔 유료 임대 공간인 2층 사무 공간을 이용하기도 했다. 창업 준비 과정에서부터 투자 유치 이후까지 디캠프 공간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활용했다.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웹사이트 차단으로 화제가 된 레진엔터테인먼트가 태동한 곳도 여기다. IT업계에서 실력파로 알려졌던 개발자 권정혁 레진엔터테인먼트 최고기술책임자(CTO)가 2013년 KTH를 그만두고 디캠프에서 창업을 준비했는데, 이 무렵 한희성 레진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만나 회사를 설립하게 됐다. 레진엔터테인먼트는 현재 700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웹툰 서비스 업체다.

디캠프 4층에 비치되어 있는 사물함.

◆ 벤처기업 입주공간부터 대규모 다목적 홀까지

디캠프 멤버십에 등록하면 80석 규모의 좌석으로 이뤄진 협업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각 좌석에는 맥북이 설치돼 있는데, 폭스콘 회장이 디캠프에 방문했다가 무상으로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4층 한쪽엔 창업가들이 다양한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제품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장소도 마련돼 있다. SK텔레콤이 제공하는 오픈랩(open lab)실이다.

창업가들이 디캠프 4층에 마련된 협업공간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디캠프 4층 오픈랩실.

스타트업 입주 공간과 세미나실로 구성된 5층에는 스마트 가드닝(gardening) 서비스 업체 엔씽(n.thing) 등이 입주해 있다.

엔씽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물을 주거나 조명을 조절할 수 있는 화분 ‘플랜티’를 개발한 업체인데, 2013년 미래창조과학부가 주최한 글로벌 K스타트업 프로그램에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디캠프가 개최하는 사업 모델 발표 행사인 ‘D.DAY’에서 우승해 입주하게 됐다.

디캠프 5층 사무실에 입주해 있는 엔씽.

이날 파티가 열린 6층은 1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홀과 회의실로 구성돼 있고, 2층엔 디오피스(D.Office)라는 이름의 유료 임대 사무실이 마련돼 있다. 현재 2층 유료 사무실에는 실리콘밸리 투자업체인 포메이션8(대표 구본웅) 등이 입주해 있다. 2층 한쪽에 마련된 카페테리아는 일반 커피숍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디캠프 2층에 입주해 있는 벤처투자업체 포메이션8.
디캠프 2층 카페테리아.

◆ 김광현 센터장 “창업가들의 사랑방...온라인 교류도 활발”

올해 초 디캠프 운영을 맡게 된 김광현 센터장은 디캠프를 ‘창업 생태계의 사랑방’이라고 표현했다. 2층 카페테리아에 창업가들이 수시로 모이고 벤처투자가와 창업가의 미팅도 잦다는 것이다.

강석흔 본엔젤스 이사가 디캠프 2층 카페테리아에서 스타트업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코워킹(co-working) 스페이스로서 디캠프만이 가진 특징에 대해선 “하드웨어 공간 자체의 차별성은 크지 않지만, 그동안 구축해온 소프트웨어와 스탭들의 노하우가 강점이다”라고 말했다.

1만명에 이르는 온라인 디캠프 회원들이 창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 자체가 하나의 창업 인프라가 된다는 설명이다. 그는 “온라인 회원들이 디캠프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웹상에서 자유롭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며 “이곳에서 사업 계획서를 벤처투자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도 많다”고 말했다.

김광현 디캠프 센터장.

김 센터장은 “2년 전 선정릉에 디캠프가 생긴 뒤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고, 최근엔 비슷한 스타트업 지원 공간도 많이 생겨났다”며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에 힘을 합칠 수 있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창업을 희망하는 분들이 디캠프를 가장 먼저 떠올렸으면 한다”며 “정부나 대기업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유연한 사고와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기업 문화를 바꾸는데 디캠프가 기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