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본사에서는 국내 1위 정유사인 SK이노베이션의 주주총회가 열렸습니다.

의장:부득이하게 무배당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원안대로 승인해도 되겠습니까?”

우호주주: (큰소리로 다 같이) 동의(同意) 합니다.

의장: (4~5초간 여유를 두고) 예, 감사합니다. 다른 의견 없으시고 참석하신 대다수 주주님들께서 찬성하시므로 제1호 의안이 원안대로 승인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각본처럼 짜여진 주주총회’.

말은 많았지만 사실 그동안 실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주주총회가 의사봉 몇 번 땅땅 두드리는 이벤트로 전락해도 그러려니 했습니다.

국내 1위 정유사 SK이노베이션의 주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날 주총에서 회사는 재무제표 승인과 이사 선임 등의 과정을 무난하게 마쳤습니다.

지난해 37년 만의 적자를 기록했다는 이유로 무배당을 결정했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반대는 없었고, 안건은 모두 원안대로 통과됐습니다. 여느 주총과 마찬가지로 끝나는데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각본대로 였습니다. 무배당 결정, 정철길 대표의 사내이사 선임, 이사의 보수 한도 등은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SK이노베이션은 사회자의 개막식 안내 문구부터 의장인 구자영 부회장의 개회사, 안건 회부와 주주 동의 과정을 연극 각본처럼 미리 작성했습니다. 이 원고는 현장에서 일부 직원들에게 배포됐습니다.

반대 의견을 낸 주주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대세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겁니다. 회사 측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시나리오를 다 짜뒀기 때문입니다.

반대 의견이 나오면 다른 주주가 바로 원안에 찬성 발언을 해 분위기를 전환하고, 다른 대부분 주주들이 박수를 쳐 의견을 몰아갑니다.

정철길 대표의 사내이사 선임에 반대하는 의견이 나왔더라면, 또 다른 주주가 제청을 통해, “정철길 후보는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최고경영자까지 오른 능력이 입증된 분”이라며 “과거 회사의 석유개발을 담당하신 경력이 있을 뿐 아니라 SK C&C 대표이사 재임 당시 어려운 상황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달성했다”고 말했을 겁니다. 대본에 그렇게 써 있으니까요.

이날 별다른 반대의견이 없어, 원안대로 통과시키자는 의사진행 발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부 소액주주가 “(새 대표인) 정철길 사장이 나와서 인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재계에서는 이러한 주총 대본에 대해, “대부분의 기업이 미리 준비해 놓는다”고 토로합니다. SK이노베이션만의 특별한 사례는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 많은 기업이 주총 하루 전 실제와 같은 리허설을 통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합니다. 원고 정도는 기본에 속하는 일이죠.

아무리 복잡한 이슈가 있더라도 별다른 논란 없이 거의 모든 주총이 20~30여분 만에 끝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철저한 사전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재계 관계자는 “당사자들이 사전 리허설을 통해 내용을 철저히 숙지하고 대본 문서 자체는 대외비에 부쳐진다”며 “외부인은 물론, 내부에서도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재계에선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당연하게 보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출입문을 아예 걸어 잠그고 주총 내용을 외부에 일절 공개하지 않는 상장사도 허다합니다. 다만 말로만 듣던 주총 대본을 직접 접하고 나니 허탈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이 이끄는 투자 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는 매년 5월 축제와도 같은 주주총회를 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지난해에도 주주 3만여명이 참가해 워런 버핏은 물론, 경영진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지요.

워런 버핏은 가수 폴 앵카와 함께 애창곡 ‘마이 웨이’를 불러 주주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은 주요 언론은 물론, SNS를 통해 생중계 됐습니다.

워런 버핏처럼 주주들과 함께 즐기고 소통하는 기업 오너나 CEO를 우리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아직 미성숙하기만 한 한국식 자본주의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