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충청도 말씨, 판단은 전광석화· 실무형 리더십
술, 담배 못하지만 영업을 위해선 기꺼이 하는 척이라도
행장 선임 때부터 따라다니는 '인사 잡음' 해결 과제
작년 이광구 우리은행장이 선임되자 여기저기에선 '이광구가 누구냐'는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만큼 이 행장은 베일에 쌓여 있었다. 게다가 본인은 억울해 했지만 '서금회(박근혜 대통령 모교인 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 논란'도 불거진 터였다.
그러나 평소 이 행장을 알고 지내온 사람들은 "될만 한 사람이 행장이 됐다"고 말했다. 그만큼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실력을 닦아왔던 것이다. 선후배 행원들 사이에선 '근면성실한데 조용하다', '묵묵히 실무를 추진한다'는 평이 많았다.
이 행장은 '도광양회(韜光養晦)'라는 사자성어가 어울린다. 이는 힘을 기르고 때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의 식객 노릇을 할 때 살아 남기 위해 일부러 몸을 낮추어 경계심을 풀도록 만들었던 계책이다. '도광양회'는 세계가 인정하는 국력을 갖추기 전까지 몸을 낮추었던 1980년대 중국의 외교정책으로 더 유명세를 탔다.
그 동안 조용히 실력을 쌓아온 이 행장은 행장이 되자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마치 적의 레이더를 피해 저공 비행해 온 폭격기가 적지(敵地)에 다다라 폭탄 세례를 퍼붓는 모양새다.
사외이사 후보의 '정피아(정치인과 마피아의 합성어) 논란'으로 또다시 불거진 '인사 잡음'은 이 행장의 최대 해결 과제다. 우리은행 민영화도 최우선 과제 목록에 올라있다.
◆말은 충청도, 판단은 전광석화
충남 천안이 고향인 이 행장은 말할 때엔 천상 충청도 양반이다. 하지만 직원들은 이 행장 앞에서 보고할 땐 바짝 긴장한다. 이 행장의 생각이 매우 빨라 자칫 헛점이 노출되면 연타발 족집게 지적으로 진땀을 흘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행장의 말버릇 중 하나는 "그게 정답이네"다. 문제가 생기면 직원들과 '끝장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자유 토의)'을 벌인다.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토의를 듣다가 답이 나오면 바로 "그게 정답이네"를 외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밀어부친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2007년, 카드전략팀 부장으로 있던 이 행장은 홍콩법인 법인장으로 급파됐다.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몰아치기 전 금융시장에 균열이 가기 시작할 때였다. 우리은행 홍콩법인도 가만 앉아서 자본금을 까먹을 판이었다.
이 행장이 2시간의 브레인스토밍 끝에 "그게 정답이다"를 외친 부문은 외화채권 발행주선이었다. 당시 국내 은행 홍콩지점들은 하지 않던 투자은행(IB) 업무였다. 이 행장이 머문 7개월 동안 10건의 외화채권 발행을 주선했다. 지금까지 이 업무는 우리은행 홍콩법인의 주수익원이 됐다.
이 행장은 은행 내에서 아이디어가 많고 추진력이 강한 전략기획, 영업통으로 불린다. 개인고객 담당 부행장 시절엔 개인고객수 2000만명을 달성했다. 카드전략팀 부장이었을 때는 '우리V카드'란 히트상품을 개발했다. 전 우리은행장이었던 이종휘 미소금융중앙재단 이사장은 "충청도 양반 스타일로 조용하지만 아이디어가 많고 신속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 하나만큼은 탁월했다"고 평가했다.
◆"부서, 스펙 장벽 없다" 실무형 리더십
이 행장은 2012년 개인고객본부 부행장으로 있으면서 '뱅크 2.0'이란 책을 읽고 핀테크에 눈을 떴다. 은행이 가야 할 길이 여기에 있다고 판단 내렸다. 핀테크와 직접 관련 없는 개인고객본부장이었음에도 스마트금융부 직원들과 회의를 갖고 공동 업무를 추진했다.
2013년 나온 '뱅크 3.0'도 읽고 핀테크에 더 열중하고 있다. 작년 말 취임사에선 "2015년을 '스마트디지털 뱅크' 원년으로 삼고 혁신적 디지털 뱅킹 서비스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9일 KT와 '사물인터넷(IoT) 및 핀테크 공동 사업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동에 따른 담보관리 어려움을 이유로 활성화되지 못했던 자동차, 공장설비 등 동산(動産)담보대출 활성화를 위한 협약이었다. 이들 동산 담보물건에 사물인터넷 위치기반시스템을 적용해 에셋 매니지먼트(asset management) 담보대출 관리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또 '기가 비콘(Giga Beacon) 타겟 마케팅'이라 하여 은행 영업점 근처를 지나는 고객에게 근거리통신 기술을 적용해 스마트폰으로 상품 안내와 쿠폰 등을 전송하는 신사업도 추진한다.
최근 영업점 빠른창구 업무를 전담하는 정규 행원을 공채하면서 학력, 전공 및 연령 제한을 없앴다. 신상에 결격사유가 없으면 모두 지원 가능하도록 했다. 그 결과 150명 채용에 8000여명이 몰려 약 54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공부할수록 인사 혜택을 주는 새로운 인사 실험에도 나섰다. 의무 직무 교육에 경쟁 체제를 도입, 성과가 뛰어난 직원을 원하는 지점으로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강한 은행이 되기 위한 영업 승부수도 띄웠다. 올 상반기에 한해 목표의 70%를 달성하도록 임직원들에게 주문했다. 3분기가 끝나는 9월말까지 사업목표 100%를 달성한다는 복안이다.
◆'술, 담배 하는 척이라도…' 적극적 리더십
이 행장은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매일 저녁 고객들과 만나는 약속으로 일찍 귀가하는 날이 적다. 저녁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직원들 옆에서 '뻐끔담배'를 기꺼이 핀다. 우리은행 직원들은 "주변 분위기를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는 스타일"로 표현한다.
상업은행 출신의 이 행장은 행장직을 경합했던 한일은행 출신 고참 임원들을 유임시켰다. 대주주인 정부로부터 2년이라는 짧은 임기를 보장받아 갈 길이 먼데 조직 화합을 우선 챙긴 것이다. 행장 취임 후 이순우 전 행장이 사용하던 집기를 그대로 쓰고 있다. 온 직원이 한자리에 모인 경영전략회의에서는 외국인 일부 계약직원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깜짝 인사를 단행하기도 했다.
이런 이 행장을 직원들은 'K9'이라 부르며 친근감을 나타낸다. '광'의 영문 이니셜 K와 '구'의 아라비아 숫자를 합성한 말이다. 한 자동차 브랜드의 최고급 모델명과도 같다.
정초 새벽엔 본부장급 이상 간부들을 강원도 하조대 앞바다로 불러모아 단체 입수를 감행했다. 둘레길을 걸으며 해맞이하는 정도로 알았던 간부들에게 한겨울 바다 입수는 날벼락이었다. 이 행장이 먼저 몸을 던지니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옥정 부행장 등 여성 간부들도 예외 없이 얼음장 바다에 몸을 담근 채 "강한 은행"을 외쳤다.
이 행장은 취임 후 두달여 동안 우리은행 농구단 춘천 홈경기 6차례 중 4차례나 참관했다. 1월1일 경기를 시작으로 지난달 1일엔 역대 행장 5명(김진만, 이덕훈, 황영기, 이종휘, 이순우)을 초청해 경기를 관람했다. 4년전까지만 해도 꼴찌였던 농구단이 3년 연속 우승을 거머쥔 농구 명가로 재탄생한 DNA를 본받아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취임 직후 집무차 번호를 '1899'에서 '1050'으로 바꿔 달았다. 이전 번호는 우리은행의 전신 대한천일은행의 설립연도인 1899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순우 전 행장이 달았다. 이 행장은 아시아 10위, 글로벌 50위 은행으로 도약하자는 의미에서 차번호판을 교체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 인사 잡음 없애야…민영화 과제도
하지만 이 행장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인사 잡음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 행장이 혜성 같이 등장해 행장에 오를 때부터 의혹의 시선들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잠잠해지나 싶더니 지난 6일 사외이사를 선임하며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사외이사 후보 4명 중 3명이 정치권이나 박근혜 정부와 연이 닿아 있는 '정(政)피아' 인사였기 때문이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민영화를 달성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 정부의 공적자금 회수를 위해서뿐 아니라 시장 원리에 따른 은행 경영을 하기 위해서 민영화는 필요하다. 그 동안 4번이나 실패한 민영화를 속전속결하기 위해선 기업 가치를 높여야 한다. 기업가치 제고엔 수익원 개발과 지배구조 투명화 등이 필요조건이다. 지배구조 투명화를 위해선 인사 잡음을 없애야 한다.
대주주인 정부와의 의견 조율사로서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정부는 이전 우리은행 매각 시도에서 교보생명 같은 민간회사나 중국 안방보험 같은 외국계에 넘기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렇다고 경영권 프리미엄을 포기하고 지분을 쪼개 파는 것에 대해 결단을 내린 것도 아니다. 이 행장은 정부와 시장 사이에서 최대 교집합을 찾아내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