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주총에서는 ‘뭔가 보여주겠다’던 국민연금이 정작 본격적인 주총 시즌이 벌어진 13일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날 서울 역삼동 현대해상빌딩 대강당 현대모비스 2015년 정기주총장. 참석자들의 시선은 온통 국민연금을 향해 쏠려 있었다. 국민연금이 현대차의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매입 과정에서 이사들이 경영진에 대한 감시·감독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모비스의 사외이사 재선임안을 반대한다고 밝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현대차 컨소시엄이 한전부지 감정가의 3배에 달하는 10조5500억원에 부지를 낙찰받아 주주 가치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현대모비스 지분율은 8%.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지분율7.0%)보다 더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지난 11일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를 열고 현대차 컨소시엄의 한국전력 부지 매입과 관련한 적정성을 논의했다. 보통 국민연금은 주총을 앞두고 기금운용본부 내에서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데 올해는 이례적으로 학계 인사 등 9명으로 구성된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까지 소집했다. 주총 참석자들은 모두 국민연금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나 정작 주총장에서 국민연금은 무기력했다. 이날 국민연금이 반대했던 이우일 서울대 연구부총장의 사외이사 재선임 안건은 표결을 통해 원안대로 통과됐다. 국민연금을 제외한 나머지 주주들이 모두 이 안건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이 부총장은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로 현대차의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매입 논란 당시 현대모비스 사외이사로 재직했다.

국민연금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글로벌 기업들의 주주총회 의결권 자문회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해외 기관투자자들의 대리인 격인 ISS는 이번 주총에서 현대차의 손을 들어줬다.

ISS는 지난 11일 의견서를 통해 “현대차가 배당금을 늘리고 자사주를 매입하는 등 주주친화 정책을 잇달아 내놓았다”면서 “한전 부입 매입은 경영을 효율화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평가했다. ISS는 전 세계 기관투자가 1700여곳을 고객사로 두고 투자 회사 주총의 각 안건에 의견을 권고하는 회사다. 해외 기관투자자들 사이에 영향력이 큰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ISS에 힘에서 밀리면서 ‘뭔가 보여주겠다’던 국민연금의 공언이 허언이 되고 만 것이다.

국민연금은 현대모비스 이외에도 다른 기업 주총장에서 쓴소리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상태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은 오는 20일로 예정된 기아차의 주총에서도 김원준 김앤장법률사무소 고문의 사외이사 재선임 안건에 반대 의사를 밝힌 상태다. 국민연금은 기아차의 지분 7.04%를 갖고 있는 최대주주다.

또 같은 날 열리는 롯데쇼핑과 아모레퍼시픽 주총에서도 경영진의 잘못을 묻겠다고 공언했다. 롯데쇼핑이 세금탈루와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혐의로 국세청으로부터 600억원대 추징금을 부과받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또 국민연금은 과도한 겸직 논란이 있는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민연금은 롯데쇼핑과 아모레퍼시픽 지분을 각각 5.02%, 8.10% 갖고 있다.

그러나 첫 단추에 해당하는 현대모비스 주총에서 ISS에 기선을 제압당한 국민연금이 호언장담한 것처럼 영향력을 발휘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