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국민연금이 해당 기업에 대한 투자를 거두면 되지 않나. 외국에도 이런 사례가 없는데 우리나라 연금이 기업의 고유 권한인 배당에 간섭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

지난 26일,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장 분위기가 급격히 얼어붙은 것은 마지막 안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때였다.

이 안건은 국민연금이 배당을 적게 하는 기업에 대해 배당금을 늘리라고 요구할 수 있는 지침을 신설한다는 내용이었다. 대다수 위원들이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재계 측 일부 인사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이 안건에 대한 토론만 1시간 넘게 이어졌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위원은 “그야말로 뜨거운 디베이트(debate·토론)였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당초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예정됐던 회의는 오후 5시가 훌쩍 넘어 끝났다. 회의가 예정보다 길어지자 중간에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위원들이 생겨났고, 재계 측 일부 인사는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결국 의결 정족수(19명 중 10명)에 못 미치는 9명의 위원들만 남아 이 안건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뤄졌다.

◆ 국민연금이 공들여 만든 ‘배당 요구 지침’이란

▲조선일보 DB 제공

이날 위원 간 갈등이 불거진 안건은 이른바 ‘배당 요구 지침’을 신설한다는 내용이다. 그동안 국민연금이 기업의 배당에 대해 관여하는 것은 사실상 금기시 돼왔는데, 정부의 배당 확대 정책에 힘입어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요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홍완선 기금운용본부장(CIO)은 배당 확대의 중요성에 대해 공식석상은 물론 사석에서도 거듭 강조해왔다. 그는 “우리나라의 배당 성향은 선진국은 물론 대만, 브라질 등 신흥국과 비하면 한참 낮은 수준”이라면서 “배당 정책으로 주주이익 환원을 위해 노력해야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배당 요구 지침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하반기부터다. 자본시장연구원에 과소배당 판단 기준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했고, 12월 최종안이 만들어졌다. 이 기준에는 자본시장연구원이 만든 ‘적정배당율’이 포함됐다. 기업의 보유자산 규모와 영업이익 등에 따라 주주들에게 얼마나 배당을 하면 적당한 지 계산할 수 있도록 일종의 공식을 만든 것이다.

만약 기업이 적정배당율을 밑도는 배당을 한 경우 1단계로 소명을 요청하기로 했다. 해명이 충분치 않다고 판단되면 1년간 중점감시 명단에 올려놓고 그후에도 배당 기조가 변하지 않으면 명단을 외부에 공개하기로 했다.

최후의 수단으로는 주주제안 방식을 이용할 예정이었다. 지분 3%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경영진에 주총 안건을 제안하는 것으로, 경영진은 이 안건이 정관에 위반되지 않는 한 주총에 올려야 한다. 즉 국민연금이 기업의 배당률을 강제로 바꾸는 것이다.

◆ “차라리 주식을 팔아라”…재계 일부 위원, 강한 반발

▲조선일보 DB 제공

재계 측의 반발은 어느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국내 상장사는 지난해 말 기준 266개에 달한다. 국민연금이 배당 확대를 요구할 경우 기업의 비용 부담이 상당히 커질 것이라고 재계에서는 주장해왔다.

그런데 안건을 상정하고 의견을 들어보니 재계 측에서는 예상보다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재계의 추천으로 선임된 한 위원은 “전적으로 기업이 알아서 판단해야 할 배당에 대해 국민연금이 개입하는 것은 경영권 침해”라면서 “배당을 늘리지 않는 이유를 소명하라고 하는데, 기업의 경영 계획을 미리 알리라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고 주장했다.

이 위원은 “적정배당률이라는 개념 자체도 너무 주관적이다”라면서 “애초에 배당을 많이 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맞지 투자를 해놓고 배당을 늘리라고 강요하는 것은 해외 주식시장에서도 유례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노동계 대표로 참석한 한 위원은 “재계 측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면서 “한 재계 측 위원이 배당이 마음에 안들면 주식을 팔면 되지 않느냐라고 주장할 때는 대다수 위원들이 놀랐다”고 설명했다.

재계를 제외한 대다수 위원들은 이 안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회의에 참석한 관계전문가 측 위원은 “이번 회의에서 안건이 처리되지 않은 것은 반대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불참했거나 중간에 나간 사람이 많아 의결정족수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면서 “대다수 위원들이 찬성하고 있어서 다음 회의에서는 통과되지 않을까 싶다”고 전했다.

◆ 횡령·배임 총수 선임반대 안건도 흐지부지된 적 있어

배당 유도 지침에 대해 대다수 위원들이 찬성하고 있지만 재계 측에서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을 경우 안건을 상정하지 못한 채 이대로 흐지부지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국민연금이 추진했던 의결권 강화 방안 역시 재계 측에서 강하게 반발했고 결과적으로 무산됐었다.

지난해 2월 국민연금은 배임이나 횡령 등 주주가치를 침해한 행위를 한 총수는 물론 함께 재임했던 이사들도 연임에 반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기존 지침에서는 '기업가치의 훼손 내지 주주 권익의 침해 이력이 있는 자'가 이사 후보에 오를 경우 반대할 수 있다고 규정했는데 이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재계에서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국민연금이 의결권 행사에 신중해야 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이 안건은 노동계가 당시 파업 여파로 계속 불참하면서 2월, 5월 회의에서 계속 다뤄지지 못했고 결국 유야무야 됐다. 다시 안건을 상정할 수 있었지만 재계 측의 반발이 상당해 그 이후로는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관계전문가 측 대표로 기금운용위원회에 참석중인 한 위원은 “기금운용위원회에는 재계, 노동계, 지역가입자 대표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고 있다”면서 “정부와 국민연금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위원들을 설득하고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 지침 개정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건이 통과되더라도 상당기간 진통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