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와인메이커스 100 배럴' 와인 병 레이블에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와인 생산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전 세계 와인 산지에서 매년 새로 나오는 수천수만가지 와인의 맛과 향은 천차만별이다. 다른 맛과 향을 가진 와인을 만들어 내는 요인은 여러 가지다.
포도작황에 영향을 미치는 날씨나 제반 환경을 일컫는 '빈티지'도 고려해야 한다. 이 요소들이 상호 영향을 주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을 때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와인양조가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와인을 만들며 평생을 보낸 와인 전문가들은 "와인을 만들어내는 원료인 '포도품종',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이 빚어지는 '원산지', '양조법' 등에 따라 서로 다른 와인이 탄생하는데 한 가지라도 어긋나면 와인의 균형이 깨져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2015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신대륙 10만원 이상 레드 와인' 부문 대상을 받아 더욱 주목을 받은 '탑 와인메이커스 100 배럴 카베르네 소비뇽(Top Winemakers 100 Barrels Cabernet Sauvignon)'은 이런 의미에서 아주 각별한 와인이다.

탑 와인메이커스 100 배럴 카베르네 소비뇽은 탑 와인 메이커스(Top Winemakers) 프로젝트 이름에서 따왔다. '최고의 와인메이커들'이 협업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와인이다. 프로젝트에는 칠레 와인 협회를 중심으로 칠레에서 최고 실력과 명성을 자랑하는 와인메이커들이 참여했다.

프로젝트는 칠레 건국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칠레의 10개 생산자가 모여 2007년 '바이센테니얼(Bicentennial)'이라는 와인을 만들며 시작됐다. 이 와인은 2011년 칠레와 미국 회담 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선물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1년 시작된 프로젝트는 좀 더 규모가 커졌다. '한 병에 담긴 칠레(Chile in One Bottle)'라는 캠페인으로 칠레 최고급 레드 와인의 정수를 보여주며 세계적인 수준에 맞는 품질을 구현해낸다는 목표를 세웠다. 칠레 와인의 다양함, 우수함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칠레에 있는 100군데의 와이너리에 소속된 100명의 와인메이커는 각자 1개 배럴씩 원액을 만들어 블렌딩해 총 100개의 배럴 수량만큼만 한정으로 생산하기로 했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전례가 없는 독특한 방식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와인메이커들은 와인을 만드는 포도품종으로 '카베르네 소비뇽'을 낙점했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하는 포도품종이다. 고급 레드 와인의 우아함과 오래 보관하면 숙성돼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견고함을 가진 포도품종이다. 칠레의 자연환경과 잘 맞아떨어져 세계적인 수준의 레드 와인의 품질을 구현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와인메이커들은 첫 미팅에서 와인의 콘셉트를 '균형과 조화'로 정했다. 타닌의 떫은맛이 강한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품종을 최대한 우아하고 생동감 있는 맛, 적당한 무게감의 미디움 보디 스타일로 만들기로 했다.

이들은 2011년 칠레 가장 북쪽 산지부터 남쪽까지, 동부 안데스 산맥에서 서부 해안지역까지 칠레 곳곳의 뛰어난 포도밭을 골라 포도를 수확했다.

칠레는 남북으로 4329km에 달해 전 세계 어떤 국가보다 다양한 기후대를 동시에 갖고 있다. 와인메이커들이 원했던 것은 칠레 와인의 다채로움을 전 세계 와인전문가들 및 애호가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들은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 품종으로 하지만 와인의 맛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품종들도 예비로 준비했다.

와인메이커들은 이렇게 수확한 포도를 각자 속한 양조장에서 세심하게 양조했다. 수개월에 걸쳐 여러 군데의 포도밭, 여러 방법의 양조법을 사용해 몇 가지 원액 표본(샘플)을 만들어냈다. 지역별로 네 개의 그룹으로 모여 각자의 샘플을 시음,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각 지역을 대표하는 원액을 와인메이커 당 1종씩 골라냈다.
이듬해인 2012년 7월, 지역별 샘플을 모두 모아 같은 과정을 반복했고 약 한 달 뒤에 드디어 최종 와인이 만들어졌다. 카베르네 소비뇽 93%, 시라 5%, 까르메네르 1%, 까리냥 1% 등 총 네 가지의 원액을 블렌딩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을 16개월간 오크나무통에서 숙성시켜 이듬해 2014년 병에 담아 안정화 과정을 거친 뒤 출시했다.

탄생한 와인은 목표대로 우아하고 섬세한 레드 와인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대량생산하는 저렴한 와인'이라는 칠레 와인의 인식을 뒤바꿀 만한 수준의 품질이었다. 신선한 붉은 과일의 진한 향과 오크나무통 숙성에서 배어나는 은은한 향신료 향, 우아하고 매끄러운 질감이 훌륭한 균형을 이뤘다.
와인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영국의 저명한 와인전문지 '디켄터(Decanter)'의 필진 피터 리차드(Peter Richard)는 "100배럴은 프로젝트만으로도 인상적이지만, 1000종이 넘는 칠레 레드 와인 가운데 톱(Top)10 중 하나로 꼽을 만큼 높이 추천할 만한 와인"이라고 평가했다. 별 다섯 개 만점에 네 개를 부여했다.
칠레 와인 메이커들은 100배럴과 별도로, 칠레 와인산업을 선도하는 다섯 명의 여성 와인메이커와 남성 와인메이커가 각각 20%의 와인 원액을 만들어 블렌딩한 '5X20 시리즈'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와인 전문가과 애호가로부터 칠레 와인 역사상 가장 유니크하고 실험적인 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탑 와인메이커스 100배럴' 와인의 레이블에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100개의 와인생산자 이름이 적혀 있어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는 작년 11월부터 신세계 L&B가 독점으로 수입, 유통하고 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와인메이커 카밀리오 라머(Camilo Rahmer)는 "우린 모두 와인메이커이기 때문에 와인양조에 있어 각자가 추구하는 방향, 스타일이 다르고 개인적인 취향뿐 아니라 타깃 소비자층도 다르다"며 "하지만 백 명의 와인메이커가 하나의 프로젝트를 완성했다는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 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