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 1760만명을 모은 '명량'은 상영 기간 내내 역사 왜곡 논란에 시달렸다. 지난 14일 방영을 시작한 KBS 대하 사극 '징비록(懲毖錄)'도 주인공 류성룡과 대립하는 정철 등이 음모가로 묘사된다. 심지어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는 조선시대 화가 신윤복이 여자로 나왔다. 제작진은 "영화나 드라마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만큼 극적 재미를 부각하기 위한 설정은 불가피하다"며 "그래서 '일부 허구가 있다'는 안내 문구를 내보낸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극의 재미를 살리기 위한 허구가 실제로 사람들의 역사적 지식까지 바꿔놓기 때문이다.

영화가 역사 지식을 바꾼다

23일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는 '아메리칸 스나이퍼' '이미테이션 게임' '셀마' '사랑에 대한 모든 것' 등 근현대사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가 4편이나 포함됐다. 워싱턴대 제프리 잭스 교수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도 영화에서 왜곡된 장면을 보고 나면 기존 지식이 바뀔 수 있다"면서 여러 실험 결과를 소개했다.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오른쪽)과 2차 세계대전 중 그의 활약을 다룬 영화‘이미테이션 게임’.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잘 알고 있더라도, 극적인 재미를 지나치게 강조해 사실을 왜곡한 영화를 보고 나면 기존 지식에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듀크대 연구팀은 2012년 국제 학술지 '응용인지심리학'에 실은 논문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친 뒤 해당 사실을 완전히 다르게 다룬 영화 장면들을 보여줬더니 오류를 평균 35% 정도만 찾아냈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글로리'에서 흑인 부대 구성원들은 남부 노예 출신으로 설정돼 있지만, 실제로는 북부 출신 일반인이 대다수였다. 학생들은 이런 사실을 분명히 배웠는데도,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흑인 부대원들이 노예 출신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해 배우고 나서 영화 '아마데우스'를 본 학생들은 모차르트를 어린아이 같고, 식사 예절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한 철부지로만 인식했다. 학생들이 영화에 더 몰입할수록 오류를 찾아내지 못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워싱턴대 앤드루 버틀러 교수도 영화가 학생들의 역사적 지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했다. 우선 역사 교과서를 구체적으로 가르친 뒤 교과서와 다른 부분이 포함된 영화 여러 편을 보여줬다. 학생들에게는 "영화는 허구가 포함돼 있고, 교과서는 완전히 사실만을 담고 있다"고 여러 차례 알렸다.

일주일 뒤 학생들의 지식을 테스트한 결과 교과서와 영화가 일치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과서와 영화가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학생의 3분의 1이 영화 속 장면이 맞는 것으로 기억했다. 버틀러 교수는 "영화의 교육적 효과가 크다고 해도 허구가 섞여 있다면 오히려 독(毒)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보 출처는 기억 못 해

사람이 영화 속 허구와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잭스 교수는 "사람은 정보를 기억하는 과정에서 출처가 어딘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초원의 물웅덩이에서 사자에게 공격당한 사람이 주변에 이런 위험을 알리면 다른 사람들은 살고자 필사적으로 그 정보를 기억한다. 하지만 누구에게 이 정보를 들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의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이다.

정보 출처를 기억하는 일은 뇌의 전전두피질(PFC·prefrontal cortex)이 맡는다. 이곳은 뇌의 다른 부분보다 늦게 발달하고 노화 과정에서 쉽게 손상된다. 어린이나 노인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면 쉽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단어나 문장의 목록을 읽어주면 내용은 잘 기억하지만, 읽어준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출처 기억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영화나 드라마가 사실과 허구를 분명히 구분해서 보여주기는 어렵다. 실제 역사와 다른 장면이 나올 때마다 해설을 붙일 경우 재미가 반감할 것이 뻔하다. 현재로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역사 왜곡 논란을 부를 정도로 결정적인 허구적 요소는 자제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