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아아, 임진년의 재앙은 참담하였다. 수십 일 사이에 한양, 개성, 평양의 세 도읍을 상실하였고 팔도가 와해되었으며 임금이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지금과 같은 평화를 되찾은 것은 하늘 덕분이다. (중략)

‘시경’에 “나는 지난 일을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징비록’을 지은 이유이다. (중략) 비록 볼만 한 것은 없지만 이 또한 그때의 일이니 버리지 못한다. 이로써 시골에 살면서도 간절히 충성을 바라는 마음이 있음을 드러내고, 어리석은 신하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 하였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죄를 드러내고자 하였음이라. /류성룡의 ‘징비록(懲毖錄)' 서문

이 책은 기사가 간결하고 말이 질박하니 과장이 많고 화려함을 다투는 세상의 다른 책들과는 다르다. 조선 징벌을 말하는 자는 이 책을 근거로 삼는 것이 좋다. 그 밖에 ‘조선정벌기’와 같은 책은 비록 한자가 아닌 일본 글자(히라가나)로 쓰였지만 이 역시 방증으로 삼기에 족하다. 오로지 이 두 책만이 실록이라 할 만하다. /일본 에도시대 유학자 가이바라 엣켄의 ‘조선징비록’ 서문

KBS가 14일 ‘징비록’ 첫 방영을 예고했다. 조선 중기 비운의 정치가 서애 류성룡(1542-1607)을 그린 사극이다.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관통한 인물의 전후 수기를 토대로 한 대하 드라마다. 작년 초 조선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을 화면에 올린 데 이어 또 한 명의 역사 속 위인을 우리 앞에 불러낸다. 드라마 정도전은 지난해 사극 바람을 몰고 왔다. 극장가에도 명량을 비롯한 역사 영화가 줄이었다. 임진왜란과 함께 충무공이 재조명되면서 김훈의 ‘칼의 노래’까지 재출간됐다.

올해 '징비록’ 역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미 작년부터 출판가에서는 류성룡과 징비록 관련 저작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교감·해설 징비록’이 돋보인다. 2013년 10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새로 읽는 우리 고전’으로 기획 출간한 책이다. 징비록 1, 2권에 대한 충실한 완역 외에도, 원본의 해제와 류성룡의 생애 해설까지 더했다.

이 책의 번역과 교감, 해제를 맡은 김시덕 교수를 만나 봤다. 왜 지금 징비록인가? 류성룡은 누구인가? 임진왜란은 무엇이었으며, 지금 우리에게 무엇일 수 있나?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그는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로 있다. 이력이 남다르다. 고문헌과 고문서 연구가 본업이다.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하던 중 ‘징비록’과 조우했다고 한다. 밖에서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동안 ‘민족의 시련이자 국난’으로만 박제돼 있던 임진왜란. 이제 차원을 높여 ‘동아시아의 국제전’으로 조명하기 시작한 학계의 신진기예(新進氣銳)다. 답변도 여실했다.

-KBS가 ‘징비록’ 방영을 예고했다. 사극의 원작인 ‘징비록’은 어떤 책인가?

전쟁 회고록에 해당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돌아본 책이다. 사적인 회고록은 아니고, 말하자면 중수필에 해당한다. 원래 초본이란 게 있고 그걸 바탕으로 나온 16권본이 있다. 보통 이야기되는 책은 1, 2권을 묶은 것이다. 나머지 3권부터 16권은 일종의 공문서 묶음으로 볼 수 있다. 사료 가치는 3~16권이 더 있다. 1, 2권은 사료라기보다 개인의 전쟁관을 보여준다.

KBS대하드라마 '징비록' 방영을 앞두고 이달에만 10여 권의 징비록 관련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징비록의 교감해설본을 냈다. 그 동안 나온 관련 서적들을 개관한다면?

내가 번역본을 내기 전까지 22권 정도 나와 있었다. 그 뒤에도 아동판을 포함해 10권쯤 더 나온 것 같다. 아마 징비록이 드라마로 나온다는 소문이 영향을 준 것 같다. 어느 출판사는 청소년용 책을 내면서 나한테 해설을 부탁하기도 했다.

징비록이 단행본으로 내기가 딱 좋은 고전이다. 번역하기도 좋고, 읽기에도 알맞은 분량이다. 저자가 그런 것까지 다 고려해서 책을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콤팩트하다.

류성룡에 대한 후대의 평가만 해도 북인과 서인 모두 안 좋게 봤다. 특히 선조실록의 수정본을 만든 서인의 평가를 보면 재상의 도량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의 저술인 징비록만큼은 널리 읽혔다.

사실 지금 우리가 아는 임진왜란에 대한 큰 그림이 징비록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속의 인물 평가가 정설로 굳어져 있기도 하다. 이순신은 선이고 원균은 악이라는 구도도 거기서 나왔다.

국내뿐만이 아니다. 특히 일본에도 출판이 되면서 깊은 영향을 줬다. 19세기 청나라로 넘어가서 한중일 공통의 임진왜란관을 만드는 코어(core)가 됐다.

-임진왜란이나 관련 기록인 징비록이라면 통상 국사학과 영역이다. 본래 전공이 뭔가? 어떻게 징비록에 손을 대게 됐나?

원래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본 문학, 문헌학이 주전공이다. 그중에서도 전쟁 문헌, 대외 전쟁 기록을 많이 본다. 당시 일본이 주변국인 조선과 류큐왕국(오키나와), 러시아, 몽골 등과 벌인 전쟁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공연에는 어떻게 묘사됐는지. 일본은 공연이 중요하니까, 가부키라든지 그런 걸 연구한다.

이런 전쟁이 다 국제전이다 보니 자기 이야기만 하지 않고 다른 나라 기록도 열심히 받아들였다. 그걸 보던 중에 징비록과 조우하게 됐다. 일본 문헌에서 처음 본 것은 10년 쯤 됐다. 전혀 엉뚱한 일본 소설책에서 봤다. 1801년에 나온 책이다.

이게 왜 여기에 나올까 궁금해서 찾아 봤다. 그러다가 일본인이 만든 한중일 종합판 임진왜란 담론 속에서 징비록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걸 언젠가 손대야겠다 싶었는데, 마침 규장각 고전총서 기획자 가운데 한 분인 서울대 국문과 이종묵 교수가 규장각 고전 총서를 내실 때, “징비록은 김 선생이 한번 해보라”고 해서 내게 됐다.

김시덕 교수가 번역하고 해설한 교감·해설 징비록(아카넷)

-원래 문헌학자로 일본 에도시대 대외 전쟁을 집중 연구하다가 징비록을 보게 됐다는 얘긴데, 국내 역사학계나 국문학계와는 반대 방향에서 접근해온 셈이다. 거기서 오는 어떤 차이 같은 게 있나?

이전 연구는 한반도 밖의 시각에 소홀한 감이 있다. 사실 징비록에 일본과 중국 이야기도 무수히 나오는데 그 부분은 차치하고, 이건 ‘국난 극복의 책’이라는 관점이 주종을 이뤘다. 그것도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류성룡이란 사람이 그저 국난 극복을 이야기하자고, 일본은 나쁜 나라, 중국은 못 믿을 나라라고 말하려고 이 책을 썼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됐다.

결국 이 책은 자기 반성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됐다. 국난에 직면했을 당시 우리는 어땠고 밖은 어땠나를 다 알아야 한다는 건데, 그 시기에 나온 책들, 나아가 조선 시대 책을 통틀어 외국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한 보기 드문 책이었다.

국학이나 국문학 쪽에서는 그런 점을 제대로 못 짚어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 당시 조선의 다른 책들도 보면, 1680년대쯤 이항복이나 김성일 등의 문집이 일본 쓰시마로 해서 다 넘어갔다. 목록이 남아 있어서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유독 징비록만 일본에서 널리 읽혔나. 그건 이 책이 (조선 입장에서 볼 때 일본에 유리한) ‘매국 책’이라서가 아니라, 누가 읽어도 납득이 될 만한 중립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보편성이 있었다는 얘기다. 조선에서 그런 책이 딱 두 권 정도 나오는데 하나가 신숙주의 해동제국기이고, 또 하나가 류성룡의 징비록이었다.

-펴낸 책의 부제도 ‘한국의 고전에서 동아시아의 고전으로’라고 붙였는데, 실제 해외에서 위상이 어느 정도인가?

한국 사람들은 흔히 한국 문화가 일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 쪽 자료와 함께 보자면 그 근거가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우리는 삼국 시대에 우수한 문화를 가진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삼국 문화가 일본에 영향을 줬다고 본다. 반면 일본에서는 당시 삼한이 일본에 부용(附庸)했기 때문에 인력이 동원된 것이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약탈한 동국통감을 17세기 후반 일본에서 ‘신간동국통감’이란 이름으로 새로 만들었다. 그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이 흥미롭다. 임진왜란 때 포로가 돼 일본에 끌려간 강항(姜沆)이란 학자이자 문인이 있다. 그에게 감화를 받은 사람이 에도시대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그 제자가 일본 주자학의 흐름을 만든 하야시 라잔(林羅山)이다. 그리고 그 아들인 하야시 가호(林鵞峰)가 이 책의 서문을 썼다. 그 내용이 이렇다.

“삼한이 역대로 일본에 부용한 건 명확한 사실이다. 일본서에 그렇게 나온다. 그런데 동국통감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조선에서는 그 역사가 부끄러워서 숨긴 거다. 일본에 백제사라는 절이 있는 건 저들이 일본에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친 증거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이 그쪽에선 명확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영향이 뚜렷한 것으로는 신라의 원효, 조선의 이퇴계 등이 있었다. 그 밖에 일본에 문화적 흔적을 남긴 것으로는 징비록이 가장 크지 않나 싶다.

일본에서 임진왜란 관련 문헌을 확인한 것만 백 여 종이 된다. 그 속에서 징비록의 영향이란 근본적인 위상을 누리고 있다. 징비록의 영향이 아니었다면 그런 책들이 성립되지 못했을 정도다. 조선의 책 중에 이 정도로 일본에 영향을 준 책은 없다.

중국의 경우, 양수경(楊守敬)이라고 초대 주일 청국대사로 갔던 하여장(河如璋)을 따라간 학자가 있었다. 하여장이 학자 둘을 데려가는데 양수경과 황준원이었다. 우리가 아는 조선책략을 쓴 그 황준원이다.

양수경은 당시 유명한 고증학자였다. 그가 한 일이 메이지 유신 뒤에 옛 지배계급이 몰락하면서 시장에 대거 방출된 고서를 수집해서 그 가운데 귀중한 중국 책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일본 방서지란 책을 썼다. 거기에 징비록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에 이렇게 썼다. “명나라의 임진왜란 기록을 보면 ‘류성룡은 간신, 이덕형은 나라를 팔아먹었고, 선조는 음락했다’고 나오는데, 일본에서 나온 이 책을 보니 류성룡은 충신인 것 같다”라고.

그러면서 명나라 사람들의 임진왜란관은 편협하다고 썼다. 청나라는 만주족 국가이긴 했지만 양수경은 한족이었다. 한족이 자기 선조들의 외국관을 바꿀 정도로, 수정을 요할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징비록이 준 거다. 중국인이 역사관을 바꿀 정도로 우리 저술이 영향을 준 일은 내가 알기론 많지 않다.

-류성룡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려 왔다. 그간의 논의를 간략히 소개해 줄 수 있나? 김 교수 눈에는 어떤가?

일단 조선 당쟁 구도에서 남인으로 본다. 동서 분당에 책임이 있달까. 그 당시 중요 인물이란 건 합의된 해석이다. 붕당 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류성룡을 인격적으로 공격하는 당파가 있었다. 당파적인 이유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는 재상 자질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남인 쪽에서는, 그 뒤 역사에서 남인이 소외되다 보니 그 때문에 류성룡이 정당하게 평가를 못 받고 있다고들 한다.

나는 뭐 국사학과나 국문학과도 아니고, 국내 당파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다. 조선 시대에는 당파가 너무나 명확했으니 논란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당파가 맞고 틀린 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나로서는 이 책과 관련해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 19세기 초 정한위략이란 책을 쓴 가와구치 조주라는 일본 학자가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한다.

“명나라 책에 류성룡이 간신으로 나와서 처음에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류성룡의 서애집(16권본)을 보니 처음엔 간신이었을지 모르겠다. 당파 싸움 문제 때문에. 그러나 전쟁 이후 이 사람의 행적을 보면 우국의 기질에 있어서 두보와 같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평가를 하기 어렵다.”

아마도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조선의 다른 평범한 재상처럼 당파 논란에 휩싸여 귀양 간 사람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전쟁이 끝나자마자 삭탈관직당하고 한이 맺혀서 이 책을 썼다고 나는 보는데, 그런 의미에서, 글이 사람을 얼마나 반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임진왜란 7년 전쟁에 관한 한 역할을 다 한 사람이라고 본다. 이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류성룡에 대한 모든 기록이나 평가를 검토한 위에서 전모를 평가할 입장은 못 된다는 이야기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나까지 그렇게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이미 국학계에서 그런 각도에서는 많은 평가가 이뤄져 왔다. 나로서는 당파라든가 그런 문제를 두고, 여전히 집안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한 상황에서 나까지 그런 면에 개입하는 데엔 관심 없다는 얘기다.

-그동안 국학계와 국문학계에서 소홀히 한 바깥, 즉 국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췄다는 이야기 같다. 해외 평가를 통해 그동안 간과돼 온 류성룡의 진면모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국내 정치에서와는 별도의. 신숙주도 비슷한 거다. 단종이니 뭐니 해서 말들이 많지만, 해동제국기의 편집자로서 외교관으로서 역할을 달리 평가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류성룡도 국난시에 전쟁 지휘자로서, 그 후에 삭탈관직당한 사람이자 징비록의 저자로서 따로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국내 정치로만 연관 지어 일관되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된다.

-그 동안 축적된 국내 평가와 새로 소개되기 시작한 국제적 시각을 통합해서 봐야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자면 징비록이나 임진왜란에 새로운 잣대를 가져온 셈인데, 왜 하필 지금 시점에 징비록이 조명받는다고 보나?

솔직히 그 점은 나도 잘은 모르겠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든다. 2012년에 임진왜란 7주갑(420주년)이 끝나고 관심이 사그라들 줄 알았다. 그런데 작년에 영화 명량이 뜨면서 임진왜란이 다시 뜨기 시작했다. 같은 감독이 한산대첩과 노량대첩도 찍는다던데. 그런 흐름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에 대한 해석을 두고 지금 시대가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 같은 국난의 분위기이고, 이순신 같은 구국의 영웅을 원하는데, 이순신은 너무 이야기가 많이 됐으니 다른 영웅으로 류성룡이 호명됐다는 식으로 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서 역(逆)추산해서 굳이 설명을 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2012년에 나도 임진왜란 관련 책을 낸 적이 있다. (학고재에서 나온 ‘그들이 본 임진왜란’) 특히 나는 평소에도 일본 쪽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러다 보니, 심심찮게 ‘친일’ ‘매국’이라는 비난이나 댓글이 붙는다. 온라인 뉴스는 잘 안 볼 정도다.

그런데 그 책이 나왔을 때는 의외로 그런 반응이 적었다. 오히려 “그래, 우리가 욕하는 건 이제 됐고, 이제 저쪽 이야기도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투의 말을 생각보다 많이 들었다. 그런 걸 보면 이제 한국도 성찰의 시기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작년에 인기를 끈 영화 ‘명량’ 속에서도 사실 충무공이 최고가 아니다. 전쟁의 맨 밑바닥을 박박 기어다녔던 사람들 하나하나가 열심히 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최근 영화 ‘국제시장’도 그런 면에서 일맥상통하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이제 국제 정세가 나날이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상대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는, 그런 니즈가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징비록 책 자체가 그런 자기 반성의 책이다.

반성의 심도가 너무 크다 보니, 중국으로 일본으로 해외로 나갔을 때는 오히려 조선이 잘못했다는 명분을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성숙한 책이다. 다른 책을 봐도 이 정도의 자아 성찰을 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류성룡이 이 책에서 자기 자랑도 많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잘못한 것이 있음을 반성한다. 제일 잘못한 게 일본 정황을 잘 알지 못했다는 거다. 그래서 서문을 보면 신숙주의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100년 간 저 나라가 변하는 걸 우리가 몰랐고 그래서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비슷한 걸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동안은 먹고살기에만 바쁘고 힘들었는데, 그래서 남의 나라까지 알 필요는 없고 그저 돈이나 벌자고 했는데, 이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준비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나 남을 좀 더 알자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징비록을 드라마로 만든 결정의 이유야 KBS에 물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 역시 어떤 사회 흐름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겠다. 방송 이외 학계나 다른 영역에서는 징비록에 대한 재조명의 움직임은 없었나?

징비록은 모르겠고,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은 계속 있었다. 국내외 영화나 다큐멘터리 제작을 비롯한 움직임이 계속돼 왔다.

-징비록도 임진왜란에 대한 관심의 곁가지나 연장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긴가?

그렇다. 이순신은 워낙 많이 소개됐고 재해석도 많으니까, 아예 새로운 아이템으로 주목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자체가 궁여지책이든 아니든, 그래도 의미는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또 알게 되는 거니까.

-일본의 대외 전쟁을 연구하다가 임진왜란을 국제전으로 보게 됐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연구를 하게 됐나?

고등학교 때부터 전쟁에 관심이 있었다. 내가 사실 사람 마음을 이해하는 데 서툰 편이다. 사람들은 왜 서로 오해를 하는 걸까. 그 고민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데. 팩트가 있으면 이야기를 나누면 될텐데, 왜 서로 이야기를 안하고 일단 싸우려 들까. 그런 오해의 가장 첨예한 형태가 국제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막연하지만 나로서는 그게 근본적인 문제 의식이었다. 그 연장선 상에서 일찍부터 한일 역사, 특히 고대사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은 일문학과로 갔는데.

이유가 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 한일 고대사를 보니 너무 진흙탕이었다. 문자로 남은 것도 얼마 없고, 그나마 남은 것들에 대해서도 서로 너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걸 지금 연구 테마로 삼으면 안되겠다 싶었다. 일단은 일본 쪽 문헌을 봐야겠는데, 일문과가 서울대에는 없고 고려대에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서 고대로 갔다. 일본을 먼저 찍고 그 다음 한일 관계를 다루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굉장히 조숙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하면 좀 그랬던 것 같다.(웃음)

-학자 집안이었나?

그런 건 아니다. 큰 할아버지 쪽만 공부하는 집안이었고, 직계인 셋째 할아버지 집안은 다 장사꾼이셨다.(웃음) 여하튼 처음엔 북구 바이킹에도 관심이 있었다. 바이킹 역시 문화를 파괴하면서도 문화를 전달하지 않았나. 또 그쪽도 첨예한 전쟁이 바이킹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자꾸 일본 고전으로 갔다. 근현대엔 별 관심이 없었고, 가능하면 가장 오랜 고전, 신화 시대 같은 것을 하려고 했다. 게르만 신화도 좋았고. 우리나라는 현실적으로 고전을 연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 쪽으로 눈을 돌린 거다.

헤이안 시대의 겐지 이야기, 마쿠라노소시 등 천 년 전 일본 글을 많이 봤다. 그런 문학을 보면 일본만의 독특함이 있다. 한국과 중국과는 전혀 다른. 비슷한 한자를 쓰고 같은 동아시아에 속해 있는데 정말 많이 달랐다. 감각적으로 그렇게 다른 점에 대해 흥미를 느꼈던 거 같다.

대학 때 게르만족 신화를 번역해서, 영어 중역이긴 했지만, 1999년쯤 온라인에 올린 적도 있다. 당시 PC통신 시절인데 고대 일문과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 하이텔을 하다가 1년쯤 끊었다. 1년 뒤에 다시 들어갔더니 이메일이 와 있었다. 모 대학의 북유럽 관련 학과 교수님이 내 글을 보고 보낸 것이었다. 아이슬란드에 교환학생으로 가보라는 권유였다. 아마 그걸 제때 봤으면 그리로 갔을 거다.

그 무렵 영어책을 보면서 게르만 신화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언어를 9개 10개는 알아야겠다 싶었다. 그리스어, 라틴어, 러시아어, 아랍어를 다 깔고 들어가야 하는데 저들과는 상대가 안 되겠구나 싶었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앞으로 취미로라도 북유럽 신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다. 나이 마흔까지는 일본 고전어를 익혔고, 앞으로 한 십 년쯤 러시아어 공부를 할 생각이다.

아까 일본 얘길 했는데, 에도시대 전쟁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 사학과에 갈 생각도 했다. 순수 문학을 하거나, 아름다움을 탐구하려는 건 아니었고. 왜 사람들이 이렇게 글을 써 나가고 해석하고 또 왜곡해 나가는지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건 처음엔 팩트를 알고 싶어서인데, 보다 보니까 팩트라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기록되던 당시부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견해가 충돌하고 어느 순간에 소설이 나오게 되는 것 아닌가. 팩트라는 것도 무지개처럼 스펙트럼 속에 있는 것 아닌가.

그럼 나도 역사나 문학이나 관계없이 다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헌학을 공부하게 된 거다. 그렇게 마음먹은 게 석사 과정 때였다. 그래서 옛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화 쪽은 한국에서 연구가 어려웠다.

그 다음 관심있던 게 임진왜란이었다. 다른 대외 전쟁은 한국에 자료가 없다.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게 임진왜란인데, 그나마도 일본에선 2차대전 패전 후 전쟁에 관한 연구를 중단했다. ‘평화 일본’ 어쩌구 하면서. 그래서 대부분 자료들이 활자화돼 있지 않았다.

결국 석사 과정 학생이 일본 초서 원전을 붙들고 씨름하는 상황이 벌어진 거다. 어찌어찌해서 논문을 마치고 나니 원전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에서 자료를 찾다 보니 그동안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역사든 문학이든.

하지만 문학 쪽에서는 문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사학 쪽에서는 사료가 아니라는 이유로 양쪽에서 배척한 게 있었다. 말하자면 '잡사(雜史)'라고 할까. 그런 문헌이 많아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유학 간 곳이 일본에 있는 국문학자료연구관(国文学研究資料館)이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모든 고서(古書)를 수집할 목적으로 세운 국가 기관이다. 거기에 현재 30만점 정도의 필름이 있다. 그걸 열심히 돌려보면서 연구를 했다.

그때 1801년에 나온 일본 책 안에서 징비록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여기에 왜 이게 나오나 싶었다. 그 전까진 한국 책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걸 보고서는 추적을 해봐야겠다 결심했다.

추적을 하고 보니 한국에서는 임진왜란이 중요한데, 일본이 볼 때 어떤 국제전이 중요했을까 궁금해졌다. 조사해 보니 임진왜란이 있었고, 시마즈 집안의 류큐왕국-그러니까 지금의 오키나와-정복,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러시아와의 충돌이었다.

재미있는 건 그게 여전히 현재진행형 전쟁이란 점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에도시대 때 일본 사람들은 러시아 이야기를 함부로 못했다. 당시에도 현재진행 중인 안보 문제였기 때문에 일반인이 함부로 말했다가 처형 당하곤 했다.

그래서 필사본으로 전해지는 어떤 기록을 보면 '러시아'를 '몽골'로 치환해서 이야기를 했다. 러시아 침략을 몽골 침략이라고 써놨다. 지금도 러-일 갈등에 관심이 있다.

일본에서 임진왜란 정리를 하다 보니 관련 문헌이 워낙 방대했다. 또 이게 다른 대외 전쟁 문헌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직간접적으로. 그 근원 중의 하나가 징비록이었다.

-흔히 임진왜란 때 일본 입장이라고 한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중국으로 가려고 조선에 길을 열라고 한 것으로 회자된다. 일본에서는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나?

가장 큰 것은 그거다. 중국까지 가려고 했다는 것. 그동안 국내 통설은 히데요시가 작은 섬나라 출신인데 조선의 화려한 문화를 탐내서 왔다는 것이었다. 나처럼 이야기하면 친일파 취급 받는다.

일본이 무슨 중국을 노리나, 그건 명분이었지 사실 조선이 목표였다는 게 국학계 통설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일본 영향을 받은 서양 학계의 해석은 히데요시의 목적 자체는 중국에 있었다고 본다. 나아가 인도까지 가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왜 히데요시가 그렇게 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내놓는다. 그중 하나는, 히데요시가 꿈이 컸지만 일본에는 텐노(天皇·일왕의 일본식 이름)가 불변이니 밖으로 나가서 하려 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히데요시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꿈이 원래 세계 정복이었는데, 주군의 꿈을 이어받아 실행에 옮긴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런 문헌들이 발견되기도 하고, 중국학을 연구하는 일본 학자들과도 교류하면서 여러 해석이 나온다. 기본적으로는 히데요시가 세계 정복을 꿈꿨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대목은 국내에서 긴장을 유발할 수 밖에 없겠다. 자칫하면 일본 제국주의나 대외 팽창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이어질 수 있으니까.

그렇다. 재미있는 사실은 히데요시를 바라보는 입장이라는 게 일본의 시대를 반영한다. 에도시대 내내 일본인들이 히데요시를 좋아한 이유는 그가 농민에서 출세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에도시대 지배층은 히데요시가 원래 텐노의 핏줄이라는 설명을 한다. 이렇게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히데요시가 평민일 리 없다는 계급의식이 있었다.

근대로 와서는, 처음엔 조선을 정복한 선구자로 해석을 한다. 한반도 침략이 대충 완성된 시점에 와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전쟁 초기에 간도에 침입한 적이 있다. 이걸 가지고 만주 진출의 선구자라 주장하기도 했다.

히데요시는 인도와 마닐라 등에도 항복하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걸 남방 침공의 선구로 해석한다. 그 다음 패전 이후엔 화려한 황금 다실, 도자기 같은 것을 사랑한 문화의 첨단인으로 조명한다.

-일본을 제대로 알려면 그 내부의 논리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을 전하려고 임진왜란 책을 냈다. 욕 먹을 각오로. 그런데 뜻밖에도 각오한 만큼 욕이 안 왔다. 온라인 댓글을 봐도 2대 1 정도로 이제는 우리도 상대를 알아야겠다는 반응이 더 많았다.

우리가 이제는 좀 살 만하니까,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으니까 상대도 제대로 알 필요가 있겠다 이런 심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을 보면 한국이 얼마나 성숙했는지도 알 수 있는 것 같다.

-징비록에 묘사된 임진왜란의 전체적인 그림이 후대에도 각인됐다고 했는데, 어떤 문제가 있나?

징비록의 기본 틀을 먼저 말해보겠다. 우선 류성룡이 모든 막후의 주역이란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주역이었나. 하나는 전쟁을 당한 조선으로서는 명나라가 도와준 게 큰 일이었는데 류성룡 자신이 명나라 군대가 먹을 식량을 마련해줬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군량미 얘기가 끝없이 나온다.

사실 지금은 별로 주목하지 않지만 당시로선 보급이 중요했다. 그만큼 중요한 측면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비록을 보면 명군은 그렇게 무적이 아니었다. 중요한 시점에서 항상 패한다. 이건 선조의 시각과 다른 점이었다.

선조가 볼 때는 명나라가 제일 중요했고, 이순신을 포함한 모든 의병은 무의미했다고 말한다. 거의 노골적으로. 명이 제일 중요했고 그 명을 데려온 일등 공신이 자기였다고 말한다. 선조의 자기 정당화는 전란을 극복하고 종묘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자신에게 있다며 스스로 존호를 부여하는 지경까지 갔다.

류성룡의 기록을 보면 그건 아니었다. 명나라 군은 종종 패했다. 패한 직후에 등장하는 게 이순신이다. 한 번씩 툭툭 튀어나온다. 그러니 진짜 국가를 구한 건 이순신이다. 그런데 그런 이순신을 천거한 게 바로 류성룡 자신이란 말을 한다. 물론 이 부분에도 논란은 있다. 당파마다 설명이 다르다. 이순신을 천거한 게 어디 류성룡뿐이었냐는 시비도 있다.

-공치사가 많았다는 얘긴가?

그런 점은 특히 일본 학자들이 많이 지적했다. 자기 자랑이 심하다고. 중국 책 같은 걸 보면 이 사람이 뻥이 심한 걸 알겠다고 한 글도 에도시대 때 이미 나타난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징비록은 공명정대한 문서라기보다 사적인 회고로 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오히려 보란 듯이 자기 공적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걸 알기가 쉽다.

-사실 관계의 왜곡은 없나? 당대 다른 기록과 충돌한다든지.

예를 들어, 원균을 그렇게까지 비난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있어 왔다. 이순신 연구의 1인자로 꼽히는 어느 분은 난중일기와 징비록에서 원균이 비판을 많이 받지만 그렇게만 볼 건 아니고 당시로서는 원균은 평범한 무장이었다고 한다. 이순신이 워낙 탁월하다 보니 욕을 한 몸에 받은 측면이 있다는 거다.

징비록에는 그런 배려가 전혀 없다. 또 잘은 모르겠지만, 당파나 집안마다 여러 형태로 이 책을 공격한다. 우복룡이란 사람이 임진왜란 초기에 백성을 죽였다는 대목도 해당 집안이 굉장히 반발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이 말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의병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거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보지 못해서 안 쓴 것도 있겠지만 사관의 차이일 수도 있다. 함경도 정문부의 의병 활동 같은 것도 지나가면서 그 이름이 언급되는 정도에 그친다.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책인 셈이네.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다른 임진왜란 당대 기록에 비해 대단히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만이 있어도 다들 인용할 수밖에 없는 거다.

-선조는 어떤 군주로 묘사되나?

선조로서는 의병의 역할을 폄하한 것은 물론이고, 조선 군의 역량을 최대한 낮게 평가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명나라 원군을 받아들인 군주로서의 정당함을 강조한다.

류성룡이 글을 쓰고 책을 낼 때만 해도 선조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언급한다. 팩트만 말하는 것 같다. 명나라가 국왕을 바꾸려 한 사실도 초본에선 이야기했지만 출판할 때는 삭제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국왕 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신중했고, 매우 정치적이었다. 그러니 선조나 광해군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딱히 볼 게 없다.

-현실의 권력 관계를 감안한 책이네.

정치적인 책이다. 사실 그 당시로써는 당연한 출판 방식이다. 단순히 자기 당파뿐만 아니라 상대 당파들도 다 함께 저작을 돌려보기 때문이다. 당시 초본은 그런 식으로 편집했다는 연구가 국학계에 나와 있다.

류성룡이 두고두고 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것도, 퇴계문집 출판을 놓고 월천 조목과 반목한 데서 비롯한 걸로 안다. 월천은 어떻게 스승의 글을 한 자라도 건드릴 수 있느냐,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류성룡은 서울에서는 그렇게 문제가 되는 건 빼는 게 맞다는 식으로 대립했다.

그렇게 주장하다가 월천이 그대로 편찬했는데, 그걸 다시 류성룡이 폐기하고 적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삭제하고 다시 낸 일도 있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월천이 류성룡을 엄청 몰아붙인다.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해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월천이 광해군의 북인 정권에 동조하는 계기가 거기에서 비롯했다는 해석도 있다.

-임진왜란 하면 일본을 보고 온 사신들의 엇갈리는 정보 보고가 유명한 일화인데.

정탐 보고 말인데, 그것은 전세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본다. 조선도 대비를 하긴 했다. 문제는 일본이 침략해 봐야 왜구가 얼마간 올 것으로 생각했다. 한 만 명 정도 올 줄 짐작했던 거다. 그걸 류성룡도 반성하고 있다.

훈련된 수십 만 명이 올 줄은 몰랐다는 점에서 대응의 실패를 말할 수는 있다. “통신사를 보내서 일본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고 일본 정세를 늘 살펴야 한다”는 신숙주의 유언을 조선이 지키지 않았다는 점을 책 앞 부분에서 반성하고 있다.

-그 당시 실제로 일본의 군사 역량은 어느 정도였나?

그 때까지 100년 동안 전쟁을 거쳐 통일을 이뤘고, 그 흐름을 가지고 정말 세계 정복까지 노렸던 것 같다. 일부에서는 일본 내부 무사의 불만을 해소하는 시도로 보거나 남는 힘을 내보낸 정도로 보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안 맞는 부분이 있다.

당시 일본 열도 서쪽 규슈에 있는 군사가 먼저 쳐들어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람들이 나중에 왔다. 정적이 뒤쪽에 있는 상태에서 주력이 먼저 나간 거다. 주력을 먼저 내보낸 건 진지하게 침략에 나섰다는 얘기다.

히데요시도 전쟁 중간에 죽어버렸고 주력 부대가 실제로 피해도 많이 입었다. 그래서 2년 뒤 도요토미 세력이 세키가라 전투에서 지게 된다. 그걸 보면, 단순한 불만 세력 척결이 아니었다. 진짜로 세계 정복을 하려 한 거다.

그렇게 훈련시킨 병사 수십 만을 이끌고 왔을 때 정말 조선이 쉽사리 대적할 수 있었겠느냐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류성룡의 큰 업적 중 하나가 훈련도감, 상비군의 창설이었다. 그 때 1만 명을 유지하는 데도 나라가 허덕였다.

나중에 명나라가 일본이 다시 쳐들어올 수 있으니 군대를 더 주겠다고 하는데 우리가 식량을 댈 수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당시 조선의 국력이 장기적으로 몇십 만을 유지할 수준이 안됐다.

그런 점을 모르고 이 책을 보면 조선이 대비를 잘못한 것이고 대비만 잘했으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쉽게 한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또 당시 조선은 주적이 북쪽에 있었다. 여진 같은 무리다. 그래서 주력 부대도 다 북쪽에 가 있었다. 압록강, 두만강에. 남쪽에는 왜구를 막는 정도였다. 그게 뚫린 거다.

전략의 실패이기도 했다. 일본은 섬나라니 해군에 강할 거라고 생각하고, 내륙에서 싸우자고 전략을 짰다. 그게 오판이었다. 일본은 섬나라지만 오랫동안 내전을 치른 나라였다. 그렇게 해서 육로가 뚫린 뒤 임진강에 왔을 때, 기억이 맞다면 5월쯤인데, 그때에야 국면이 바뀐다.

압록강, 두만강을 지키던 주력 부대가 내려오고 명나라 선봉대도 조금씩 온다. 그러면서 처음으로 일본의 진격이 막혔다. 그때쯤 되면 전쟁의 첫 흐름이 끊기고 히데요시의 세계 정복 꿈도 바뀌게 된다. 한반도 4개 지역을 받는다는 것으로.

북쪽에서는 여진을 지키던 부대가 내려오니 만주 컨트롤에 공백이 생겼다. 명의 이여송 같은 장군도 여진족을 막던 사람이었다. 명과 조선의 군대가 다 내려오다 보니 만주에 큰 공백이 생겼고, 결국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하고 명청 교체의 큰 흐름을 만든 계기가 됐던 거다.

-그렇게 보니 임진왜란이 정말 국제전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일본 내에서 실제로 세계 정복의 담론이 구체적으로 오갔나?

그렇다. 1592년 7월쯤 히데요시의 세계 정복 계획이 나온다. 히데요시가 발급한 공문서에 세계 정복 계획이 들어있다. 이런 내용이다. 텐노는 베이징으로 옮긴다. 히데요시 자신은 남경 근처로 간다. 한반도는 누가 가서 지배하고 남은 본토는 누가 지배한다. 그렇게 딱딱 나눴다. 그걸 보고 있으면 7월 시점에서는 정말로 그런 계획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면 임진왜란이 일본으로서는 세계 정복 구상이 처음 실행에 옮겨진 사건인 거네?

그렇다. 오다 노부나가가 먼저 세계 정복 꿈을 꿨다는 설은 있다. 하지만 명확한 문장으로 세계 정복의 계획을 작성한 인물은 히데요시였다. 전쟁에 나서기 직전에 인도 고아에 있던 포르투갈 총독, 마닐라에 있던 에스파냐 총독, 타이완에도 편지를 보내 항복하라고 요구한다. 상대방은 너무 어이가 없었는지 무시해 버리긴 했는데, 여튼 그런 행동까지 했다.

-정말 그런 서신까지 보냈나?

금방 중국을 정벌할 건데 그 다음이 곧 너네 차례니까 항복하라고 했다.

-중국에 대해서는?

중국에는 "왜구를 우리가 잡아줬는데 왜 감사하지 않느냐"면서, 그러니 무찌르러 가겠다고 했다. 조선이나 중국은 왜구=히데요시로 봤지만, 히데요시는 왜구가 자신들과는 별개의 발작적인 세력이고, 그걸 자기네가 눌러줬다고 본 거다. 그것에 대해 조선과 명이 감사해야 하는데 왜 안하느냐고 했다. 조선이나 명이나 그냥 '왜구'가 오겠지 하는 식으로 대비를 소홀히 한 측면이 있었다.

-그 당시에 세계 정복 꿈을 꾸고 해외에 선전 포고까지 했다는 게 놀랍다.

그 사람들 입장에선 이미 그 시대에 동남아가 다 자기네 세계관에 들어가 있었다. 그 당시 히데요시가 쓰던 부채가 있는데 거기에 그려진 세계지도를 보면 일본과 중국 이외의 세계는 작아 보인다.

-그런 걸 보면 일본은 한국과 많이 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우린 안으로 문(文)에 묻혀 있었고, 일본은 전쟁에다 해외로 눈을 돌렸고.

그렇게만 보기는 힘들다. 조선 역시 여진에 대해서는 엄청난 무력을 가했다. 한반도와 여진 관계사를 보면 여진이 불쌍할 정도로 계속 죽인다.

-그걸 대외 팽창이라고 할 수 있나?

4군6진 정복이 팽창이다. 고구려와 발해 고토 회복이라고는 하지만 끊겨있던 역사 영역 아닌가. 당시 함경도에 여진이 살고 있었는데 그곳을 정복하는 과정이었다.

-일본으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일본의 존재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삼국시대부터 무력이 밀렸다. 삼국사기 같은 한국 쪽 역사서와 일본서기 같은 일본 쪽 역사서, 위지 동이전 같은 중국 역사서를 함께 보면 잘 알 수 있다. 한반도가 문화에서는 앞서는데 무력에서는 열세였다.

생산력과 군사력의 문제는 이미 삼국시대 때 우열이 뒤집혔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무만 있었느냐. 그것도 아니다. 일본 귀족들은 철저히 문의 문화였다. 헤이안 때까지 유지되다가 엎어진 게 있었다.

반대로 한국은 조선 전기까지 여진을 주도적으로 장악하다가 점점 야성의 역사가 작아지면서 중국에 의해 순치되는 과정이 있었다. 일본은 무력 혼란기인 100년간 전쟁을 겪으면서 더 무력이 강해진 거다.

결국 조선의 확장은 4군6진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본다. 신숙주와 김종서가 했던. 류성룡의 문집을 보면 가장 존경하는 재상이 신숙주와 김종서다. 4군6진의 주역들이다.

-임진왜란을 국제전으로 보는 흐름은 언제부터 있었나?

명지대의 한명기 교수, 국방대의 노영구 교수가 시도했다. 한명기 선생은 내가 알기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최초로 명실록을 이용해 임진왜란을 연구하려고 한 분이다. 그 전까지 임진왜란을 연구하던 한국 학자들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한국 책만 봤는데 한명기 선생은 중국쪽 사료도 함께 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제 나는 일본책도 함께 보자는 입장이다. 일본 기록을 보려면 한문만으로는 안 되고 일본 초서를 봐야 한다. 그 전까지는 20세기 전반에 나온 일본인들이 활자로 옮긴 일부 문헌만 간신히 이용했지만, 다른 책도 많다는 걸 소개한 거다.

군사학에 대해서는 노영구 선생, 해군사관학교의 이상훈 선생 등이 이야기한다. 전술적인 문제. 제일 큰 것은 의병에 대한 재평가다. 노 교수는 의병이 너무 과대 평가됐다고 본다.

의병은 7년 내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초기 4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7, 8개월로 역할이 끝난다고 본다. 그것도 관군이 없어진 상태가 아니라 관군 아래에서 움직였다는 거다.

그런 게 임진왜란 연구에서 최근 10년 간 통설이 됐다. 그런데 이게 학계 밖으로 나가는 순간 충돌이 생긴다. 각 후손 집안들이 반발한다.

-해외에서도 임진왜란을 국제전으로 보는 논의가 많나?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일본은 세계 체제를 보려고 했고, 유럽에서 배운 세계관을 적용하려 했다는 거다.

최근에는 히데요시가 황제를 원한 건 아니고 해상왕국 정도를 꿈꾼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일본 내 중국 사학계 이야기다. 히데요시의 유명한 일화, 명 황제가 전한 심유경의 국서를 찢었다는 게 허구라는 주장이다. 히데요시가 어느 정도 중국의 세계 체제를 받아들이려 했는데 막판에 뒤틀리면서 한반도 4개 지역만이라도 실력으로 확보하려 했던 게 정유재란이라는 해석들이 나온다.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국에 와서 한 말처럼 여전히 일본의 침략을 왜구 확장론으로 보려 한다. 한국의 경우 최소한 그런 해석은 이제 많이 없어졌다.

-중국은 역사 해석 자체가 정부의 국가 기획과 관련이 있으니까.

그렇다. 지금 중국 관영 CCTV가 KBS와 함께 임진왜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데 나와 노영구 선생이 자문단으로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임진왜란을 5부작 국제전으로 그리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더니 중국 측도 받아들였다.

2014년에 그런 제안이 온 게 굉장히 미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진핑이 지금의 지정학적 정세 속에서 미-일 구도에 맞서 한국과의 접점을 찾으려다 나온 게 임진왜란 때 조선-명 연합의 역사적 기억인 것 같다.

-일본에도 임진왜란을 다룬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같은 게 많지 않나?

요즘 KBS가 정도전, 징비록을 드라마로 방영하면서 어떤 시대 흐름을 주도하려는 것 같은데 일본 NHK가 그런 걸 한다. 한 해의 시대 정신을 나타내는 드라마. 올해는 메이지 유신 전후가 배경이다. 최근 우경화된 일본 시대정신의 반영 같다.

바로 지난해 NHK 대하 드라마 주인공이 구로다 간베였는데 일본판 제갈량 같은 사람이다. 임진왜란 시기의 인물이다. 2011년에 방영한 대하 드라마에는 임진왜란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패전 후 일본 대하 드라마에서는 한동안 임진왜란 이야기가 없었다. 원작 소설에 임진왜란이 있어도 거의 그 부분을 삭제한다. "그래서 전쟁이 지났다"고 하면서 넘어가거나 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전쟁 묘사도 하는데, 충돌 장면이 아니라 그 중에 어떤 인간적인 일이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일본 장수가 조선인을 치료해 준다거나. 그런 게 일본 나름의 흐름이다. 전쟁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다.

두 나라가 싸운 전쟁이지만 그 가운데에도 인간은 있었다, 이런 식이다. 그런 의미에선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 이야기와 통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이순신도 지고지순한 영웅이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이었다는.

-일본 내부의 문헌을 토대로 일본 연구를 많이 해왔는데, 일본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통념을 든다면?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자기네를 ‘섬나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스스로 굉장히 큰 땅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천황이란 황제가 있고 국내 66국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라 밖에 조선, 오키나와 같은 ‘오랑캐’가 있었다고 본 거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그 뒤로 서양에 비해 작다는 인식이 처음 생긴다. 그러니 임진왜란을 두고 히데요시가 작은 섬나라를 벗어나려는 시도였다는 식의 해석은 완전히 잘못된 접근이라는 거다.

일본이 군국주의라는 해석도 일면적이다. 일본 내에는 귀족, 텐노로 상징되는 강력한 귀족 문화가 있었다.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는 한학 전통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이 결합된 화한(和漢) 전통이 있다. 조선 사람들로서는 굉장히 낯선 문화였다.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 말로 문학을 한다는 게 우리 눈에는 야만적으로 보였을 테고 칼을 차고 있었으니 무서워했던 거다. 하지만 청이나 유럽, 오스만투르크 등 대부분 나라에서 무사들이 정권을 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걸로 보면 우리나라가 오히려 더 특이했던 셈이다.

-'화한'이라면 중국 성리학을 말하나?

유학 외에 양명학도 있고 불교도 '한'에 들어간다. 중국학과 일본적인 것을 대등하다고 본 데서 나온 단어가 '화한'이다. 일본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마치 우리가 ‘소중화(小中華)’라는 말을 했듯이 일본은 화한이라고 했다. 일본은 중국과 동급이란 뜻이다.

옛날에 일본이 수나라에 보낸 편지가 있는데,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 지는 나라 천자한테 편지를 보낸다"라고 썼다. 일대일 대등성을 강조했다.

우리와 일본은 비슷하지만 다른 길을 걸었다. 몽골 침략 때가 극명하게 달랐던 것 같다. 고려 때 무신정권은 무너졌지만, 일본의 막부정권은 살아남아서 톈노와 쇼군이란 쌍두 체제가 계속 갔다.

-말이 나와서 이야긴데, 몽골이 일본을 침공하려 했을 때 태풍이 구해준 것 맞나?

사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본다. 일본 학계 통설은, 근본적으로 고려가 40년 동안 버텨준 덕분에 원이 힘이 빠져 있었고, 여기에 태풍까지 더해졌다는 거다. 가만 보면 원나라가 섬 정벌은 거의 다 실패했다. 동남아시아의 섬 지역 정복도 실패했다. 베트남은 굴복시켰지만.

-요즘 아베 정권 이후 일본의 우경화 행보는 어떻게 보나?

한 가지는 일본이 아시아의 패권을 누리던 시기가 끝나가고 한국과 중국이 부상하고 있는 데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한국에 대한 불쾌감과 중국에 대한 공포감이 뒤섞인 것 같다. 그런 게 혐한류를 촉발했고, 설상가상 내부적으로 더 악화된 계기가 3.11 대지진이었다.

앞으로 100년 동안은 처리해야 할 암 덩어리를 떠안은 셈이다. 산업이 발전하려면 전기가 필요한데 전기 생산처로서의 원자로를 잃어버린 물리적 상실감과 정신적 충격이 동시에 온 것 같다.

이건 개인적인 느낌인데, 일본이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거다. 아마 전쟁을 일으켰다가 지고, 다시 쇄국해서 틀어박히는 패턴을 보일 텐데, 그런 게 이제 역사적으로 안 되는 상황 아닌가. 그러다 보니 짜증이 느껴진다. 잘 안 풀리는데 밖으로 내보일 수도 없는.

얼마 전 IS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는데, 유럽에서 스트레스 받는 젊은이들이 거기 가서 땅 정복하면서 풀고 있다더라. 일본도 지금 내부 누적된 불만이 심하다. 특히 20대 비정규직이나 프리타족들의 적지 않은 수가 인터뷰하면서 전쟁 나도 상관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전쟁이란 게 없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마저 불가능한 데서 오는 짜증으로 보인다.

이건 여담이지만, 한동안 일본을 홍콩과 더불어 ‘아시아의 빛’으로 본 사람들이 있다. 아시아의 개인주의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어디까지 퇴폐적이 될 수 있나를 보여주는. 홍콩이 먼저 중국에 반환되면서 그게 끝났고, 일본도 3.11 대지진 이후 그런 흐름이 달라지고 있다고들 한다.

심지어 일본 오타쿠 문화에서도 이제 나라 걱정을 한다. 내가 아는 일본 서브컬처 애호인이 있는데, 자신이 좋아하던 일본이 이제는 없다고 말한다. 과거의 좋았던 일본의 흔적을 찾고 있다고 하더라.

-홍콩이 무너졌다는 건 무슨 뜻인가?

홍콩이 중국에 병합되면서, 무정부주의적이었던 게 사라졌다는 얘기다. 가령 공각기동대라는 애니메이션의 첫 장면에 혼돈의 상징으로 바로 홍콩이 등장한다. 그 정도로 무질서해 보이던, 아시아에서 보기 드물게 열려있던 자유주의 공간, 홍콩의 무정부적 흐름도 이제 없어졌다는 거다.

일본도 이제 그렇고. 내가 1990년대 만난 일본 사람들은 그런 자유주의적 분위기를 두고 패전 이후 도덕을 안 가르쳐서 그렇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도덕 과목을 없앴다가 최근에야 아베가 다시 만든 거다.

원래는 대전을 일으킬 때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군에 동원했다. 전후 그에 대한 반발 때문에 도덕 교육이 사라졌다. 인간 통제를 안 한다는 의미로 개인주의를 교육했다. 이런 게 끝난 것 같다. 그 배경에 자신감 상실이 있다.

잉여가 없어지고 그만큼 더 절박해졌다는 거다. 버블 끝나고도 10년은 다시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불가능해진 셈이다.

-국내 젊은 층 사이에는 일본 문화가 많이 들어와 있다. 최근 개봉한 디즈니 영화 ‘빅히어로’ 같은 것을 두고도 일본 애니메이션이 미국 대중문화를 잠식한 결과라는 뉴욕타임스의 분석도 있었다.

문화는 워낙에 정치와는 별개로도 가는 거다. 일본 문화가 처음 서구권에 영향 준 게 19세기부터였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일본 민화에 열광한 것도, 처음에는 일본 도자기 포장용 충전재로 넣어준 값싼 민화인 우키요에가 유럽으로 가면서 전파된 결과였다.

도자기를 네덜란드를 통해 보내려면 충전재가 필요했다. 도자기는 귀족들이 가져갔고, 내다 버린 싸구려 민화 우키요에가 고흐 같은 미술가들 손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일본풍에 대한 관심이 퍼졌다.

세계 2차 대전 때에도 일본 문화에 대한 수요는 계속 있었다. 중국과는 다르게 인식됐다. 그런 게 지금까지도 남아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거다. 일본 경제와는 별개의 흐름으로 봐야 한다. 이미 서양에선 일본 문화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셈이다.

마치 홍콩이 사라져도 한국 문화에 홍콩영화 장르가 남은 것처럼, 같은 맥락에서 만일 한류가 해외에 나가서도 제대로 정착할 수 있다면, 한국 정치나 국가 흐름과는 상관없는 장르로 남을 수 있을 거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일본 대중 문화를 즐기기 위해 일어를 배우고, 강남 일식점 간판에 일어를 그냥 쓰기도 한다. 그런 건 어떻게 보나?

그 부분 이야기 잘했다. 중국 베이징에도 가보면 일어 간판이 있다. 그 점에서는 중국이 더 개방적이고, 오히려 더 보수적인 게 한국이었는데, 이제는 그 장벽이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한국이 성장하고 나니까 일본에 대해서도 좀 너그러워진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요즘 가장 첨단을 달리는 일본 문화는 밥, 예쁜 일본식 가정식이다. ‘네코맘마(고양이밥)’ 같은 거다. 기존 일식과는 다른 개념이다. 조그만 도자기에 예쁘게 담아내는 식이다. 일본 만화나 드라마에서 본 생활 문화에 대한 동경의 반영이랄까.

-약력을 보면 저서가 일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 일본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으로는 처음 받았고, 일본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인터뷰 후인 12일 김 교수는 국내 동방문학비교연구회가 주는 제 5회 석헌학술상을 받았다.)

그런 면이 있다. 내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낸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2010)를 일본에서 출간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임진왜란, 일본의 오키나와 정복, 러시아와의 충돌 세 가지 전쟁을 하나의 흐름으로 이해한 시도였다. 일본에서는 감사하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국내 번역은 안 하고 있었다. 한국 이야기 외엔 관심을 갖지 않는 국내 독서계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관심을 가져줘서 올 상반기에 번역서가 나올 예정이다.

-현재 작업 중이거나 앞으로 계획하는 게 있다면?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 번역서를 낸 뒤 2, 3년 안에 속편을 쓸 계획이다. 임진왜란 문헌학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 대한 정보를 담은 책들의 흐름을 모아보고 싶다. 다음으로 러시아 문제를 다루고 싶다. 전근대 러일전쟁이라 볼 수 있는 1806-1807년의 러일간 충돌을 러시아, 한국, 만주, 일본까지 다루면서 한꺼번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게 장기 계획이다.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김시덕 교수(40)는 고문헌과 고문서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해왔다.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 학부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그 뒤 일본의 국립 문헌학 연구소인 국문학연구자료관(국립총합연구대학원 소속)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에서 낸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한반도 류큐열도 에조치’(가사마쇼인, 2010)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받았다. 외국인 최초였다. 공저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가사마쇼인, 2011), ‘일본과 이국의 전쟁과 문학’(가사마쇼인, 2012)은 일본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됐다.

국내에선 ‘그들이 본 임진왜란’(학고재, 2012),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5: 교감 해설 징비록(아카넷, 2013), ‘그림이 된 임진왜란‘(학고재, 2014)을 출간했다. 올해엔 2010년 일본에서 냈던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한반도 류큐열도 에조치’의 번역본(열린책들)과, 지난 해 ‘주간조선’에서 연재했던 ‘한반도와 유라시아 동해안 500년사’(메디치미디어)를 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