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2P 대출업체 8%의 이효진(33) 대표는 지난 2일 노트북을 여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작년 말부터 시범 운영하던 자신의 P2P 대출중개 사이트가 야동 사이트나 걸릴 만한 ‘유해사이트’로 분류된 것. 영문도 모른 채 다급해진 마음에 핀테크 기업을 담당하는 금융감독원 서민금융지원팀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차가운 한마디가 들려왔다. “민원이 접수돼 방송통신위원회에 차단 요청 공문을 보냈다.”

작년 12월부터 주변 지인들을 대상으로 알음알음 P2P 대출중개 서비스의 가능성을 실험해오던 '8%'의 메인 홈페이지는 지난 2일 금감원의 요청으로 폐쇄됐다. 현행법상 국내에서 P2P 대출중개가 설 자리는 좁다. 국내 금융규제는 은행이나 카드사, 보험사 등 기존에 정해진 업종만 영업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감원 입장에서는 법대로 처리했을 뿐이다. 하지만 핀테크 육성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겠다는 정부의 '요란한 구호'와 달리, 아직 핀테크 스타트업 기업들이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은 높다는 게 입증된 사례이기도 하다.

지난 5일 오후 강남 역삼동에서 만난 이효진 대표는 "초기 시장이 형성될 수 있을 만큼은 숨통을 틔워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금감원의 결정을 이해하고 있고, 무조건 규제를 완화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면서도 “미국 등 해외 사례처럼 초기 시장이 형성될 수 있을 만큼은 숨통을 틔워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금감원 핀테크 지원상담센터와 논의를 거쳐 사이트 폐쇄 조치를 해제할 수 있는 해법을 찾고 있다.

지난 5일 강남 역삼동 카페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만나기 직전까지도 “오늘 사진 찍을 일 없죠? 저 그냥 모자 눌러쓰고 나왔어요”라고 문자를 보내줬다.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사이트가 폐쇄되면서 자신을 믿고 호응해 줬던 지인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려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눈코 뜰새 없다고 했다.

이 대표는 국내 핀테크 업계에서 보기 드문 은행원 출신이다. 전문성을 키울 수 있어 ‘꽃보직’이라고 불리는 파생상품 딜링룸도 거쳤다. 그러다 지난해 초 8년을 다니던 우리은행에 돌연 사표를 던졌다. 사표를 던진 이유를 묻자 곤란하다는 듯 몸을 뒤로 젖히며 머뭇거리다 이내 어깨를 펴고 말을 이어갔다. “은행에는 내부 혁신이 없잖아요.” 그리곤 말문이 터졌다.

“아버지도 은행을 30년 다니셨어요. 어찌 보면 안정적인 직장이 어울리는 가정 환경에서 자랐죠. 은행원 생활이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은행 내부에서 보면 아시다시피 관치 금융이 너무 빈번하고, 특히 오너십이 없는 우리은행은 더 심했죠. 모든 분야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있지만, 딱 금융 한 분야만 예외입니다. 하지만 금융도 이제 피해갈 수 없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해요. 은행의 조직 문화는 이런 변화에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쉽게 바뀔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이트 폐쇄 문제부터 짚어보자. 대부업법 등록을 하지 않아 정지된 것으로 알고 있다. 몰랐던 것인가.
"몰랐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다. 대부업법 등록 신청만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지난달 26일 금융감독원 핀테크 지원센터에 대부업법 관련 질의를 넣어둔 상태였다. 그리고 지난 2일 구청에 대부업법 신고 서류를 접수하려던 차에 폐쇄 통보를 받은 것이다."

-사전에 통보를 받지 못했나.

“지난달말 금감원에 관련 질의 신청을 하고 나서 그 다음 주에 폐쇄 조치를 받아 매우 당황했다. 서비스 준비 단계부터 규제 문제가 가장 마음에 걸려 주변 공무원 친구들에게도 많은 조언을 구했다. 머니옥션이라던지 팝펀딩 등 비슷한 업종(크라우드 펀딩)의 사례도 참고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P2P 대출이든, 크라우드펀딩이든 법적 문제의 소지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금융당국이 의지가 있다면 유권 해석 과정에서 행정적인 유연성을 발휘할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당초 금감원 측에서도 대부업법 등록을 하면 허용해주기로 한 것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조선비즈 기사를 읽고 대부업법 등록을 거쳐도 허용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조만간 금감원의 핀테크 지원센터에서 상담받을 예정이다.”

-지금까지 대출 규모는 얼마나 되는가
"누적 대출 금액은 약 5000만원, 누적 대출 건수는 7건이다. 이중 페이스북 친구 등 주변 지인이 대부분이다. 작년 12월부터 시작했다. 아직 베타 서비스(실험) 단계다. 매주 한 명의 대출자만 받았다. 지난달말 신문에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것 같다."

-은행원 출신이면 누구보다 규제의 벽을 잘 알 텐데, 어떤 계기로 P2P 대출에 도전하게 됐나.
"은행을 나올 때만 해도 P2P 대출을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니다. 핀테크 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열어뒀다. 고민 끝에 P2P 대출이 8년간의 금융권 경력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 지점에 있으면서 과도한 마케팅 비용 등 많은 비효율을 줄이면 훨씬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P2P 대출은 복잡한 개념이 아니다. 쉽게 말해 ‘온라인 계(契)’다. 여윳돈이 있는 사람들과 돈이 필요한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 중간에 은행이 아닌 8% 사이트를 통해 투자자(돈을 빌려주는 사람)가 대출자의 신용정보와 사연을 읽고 직접 선택한다. ‘계’라는 전통과 문화가 있기 때문에 이를 온라인으로 옮겨온 개념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생소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인간 채권 채무 거래를 중개하는 모델로 보이는데, 이 분야도 규제에 걸리는가.
"대출을 모집하는 과정에선 중개업자와 돈을 빌려주는 사람 모두가 대부업자로 등록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P2P대출 자체가 유사수신행위로 분류되면 위법 소지가 발생한다. 자본시장법에서 대부업법, 유사수신행위 규제법까지 여러 개의 규제가 얽혀있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미국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자. 금융규제가 까다로운 미국도 금융당국이 P2P 대출이 가능하도록 새로운 제도 여건을 만들어줬다. 렌딩클럽이 사업을 시작한 것은 2007년이다. 투자자들의 돈을 모아 대출자와 대출채권 계약을 맺는 방식이었는데, 당시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렌딩클럽의 활동을 인지하면서도 1년을 두고봤다. 그리고 2008년 렌딩클럽의 대출 규모가 커지자 투자자 보호차원에서 금융당국이 렌딩클럽의 신규 취급을 6개월 간 중지했다. 그동안 렌딩클럽과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제도적 여건을 마련해줬다.

무조건 규제를 완화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 보호차원에서 규제는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해외 사례처럼 초기 시장이 형성될 수 있을 만큼은 숨통을 틔워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규모가 커지면 이에 따른 규제는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대출자가 돈을 갚지 않는 위험은 어떻게 관리하나?
"아무나 대출해주는 게 아니다. KCB나 NICE신용평가 그리고 각종 내부 자료 등을 토대로 신용등급을 점검한 뒤, 페이스북이나 소셜 미디어 등의 빅데이터를 활용해 사전 평판 점검을 한다. 연체 위험이 크다고 판단이 들면 대출 등록을 거절한다.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낮은 연체율은 가장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다. 월간, 분기, 연간 단위로 대출을 얼마나 취급했고, 이를 전부다 투명하게 공개할 예정이다. P2P 대출은 레퓨테이션(평판) 사업이다. 자료 공시를 잘못한다면 소비자의 신뢰를 순식간에 잃을 것이다.”

-대출 받을 곳이 너무 많다. 스팸 메일이나 심지어 길거리에서도 대출 요청이 온다.
"현재 한국에는 중(中)금리 시장이 전무하다. 은행의 문턱을 넘으면 대출금리가 10%대로 훌쩍 뛴다. 이러다보니 원금 상환 의지가 강한데도 고금리에 시달리는 대출자들이 많다. '8%'는 은행권과 카드론의 중간 금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는 대부업체에 거절 당한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신용등급이 최소한 6등급을 넘어야 한다. 주로 제2금융권으로 밀려나 대출자를 대상으로 보다 낮은 금리를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표참고>

-낮은 금리를 주는데 이익을 낼 수 있나
"간단하게 말하면, 은행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대출이 이뤄진다. 점포 운영 비용이 없고 마케팅 비용도 훨씬 적다. 위험 관리 비용 등을 감안해 수수료를 매기게 된다. 대출자들에게는 평균 대출금리 연 8%를, 투자자들에게 연 5%의 수익을 되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핀테크 열풍이라지만 회의론도 만만찮다.
"소비자가 지금의 금융환경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기득권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보다 더 편해지고, 금융 비용을 더 줄일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생각한다. 규제의 울타리를 낮춰서 직접 대등하게 겨루면 될 일이 아닌가 싶다."

-은행을 나온 것이 후회되지는 않는가.
"은행을 다니면서 좋은 분을 많이 만났다. 하지만 한계도 많이 느꼈다. 막연하게 창업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남편이 IT 스타트업 분야에서 오랫동안 산전수전을 겪었기에 사이트 개설부터 시스템 구축까지 많은 도움을 받고있다. 개발 실력도 상당한 편이고, 금융권 지식이나 법 지식도 있는 편이다. 나 자신도 공대(포항공대) 출신이라, 사업 운영에 필요한 공학적 업무 영역이 생소하지 않다. 핀테크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넘어야 할 벽도 높다. 정부가 진정 핀테크를 육성하기로 방향을 정했다면, 이런 난제를 해결해주는 게 리더십의 역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