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의 지난달 물가 상승률이 -0.6%를 기록했다. 전달(-0.2%)에 이어 두 달 연속 마이너스다. 유럽중앙은행(ECB)이 3월부터 월 600억유로 규모로 국채 매입에 나서며 돈을 풀 계획을 밝혔지만, 꺾인 물가 상승률을 돌리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물가 상승률도 지난해 말 0.8%까지 떨어졌다. 선진국만이 아니다. 중국 또한 12월 물가가 1.5% 상승에 그쳐, 넉 달째 1%대였다. 단기간 물가 하락은 소비자에게 희소식이다. 하지만 장기간 물가 하락에 경기 침체까지 겹치면 사정이 달라진다. 전 세계적인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3일 LG경제연구원은 '글로벌 디플레이션 리스크 커지고 있다' 보고서에서 "현재 물가 상승률이 1%보다 낮으면서 디스인플레이션 상황이거나 디플레이션에 빠진 국가는 작년 말 기준 선진 33개국 중 82%(27개국)에 달한다. 이는 유례가 없으며 그만큼 선진국들이 저물가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유로존, 일본처럼 디플레이션 양상
유럽은 상황이 심각하다. 유럽연합 통계기관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유럽 지역 31개국 중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보인 나라가 18개국에 달했다. 유럽 경제의 '맏형' 독일에도 'D(디플레이션)의 공포'가 찾아왔다. 2009년 이후 처음으로 올 1월 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의 물가 차이 가중치를 반영해 계산한 소비자물가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5% 하락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디플레이션 구제를 위한 유럽중앙은행(ECB)의 양적 완화에 반대했던 독일에도 디플레이션 전조등이 켜진 것이다. 유가 하락으로 지난 1년간 독일의 에너지 비용이 9% 감소한 영향이 컸다. 저유가와 식료품 가격 하락은 5년 만에 독일의 물가 상승률을 마이너스로 돌렸다. 유로존 최대 경제국 독일마저 물가 하락의 늪에 빠지면서 유로존의 디플레이션 국면도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12월 소비자물가도 전년 동월 대비 2.5% 오르는 데 그치며 1년 반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4월 소비세율을 5%에서 8%로 인상한 데 따른 영향을 제외하면 물가 상승률은 0.5%에 그친 셈이다. 소비세율 인상 효과가 사라지는 오는 4월에는 물가 상승률이 '0'에 근접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 연준이 사용하는 물가 지표인 개인소비지출 지수는 지난해 12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0.8% 상승하는 데 그쳤다. 2009년 이후 5년 만에 가장 낮은 상승률이다. 이에 대해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는 상승보다는 하강 위험이 더 크고, 인플레이션보다는 디플레이션이 재현될 우려가 더 큰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이 디플레 위험 키워
디플레이션은 여러 경로로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 소비자는 내일 물건 값이 떨어질 것을 고려해 소비를 미룬다. 수익이 낮아지는 기업은 투자 의욕을 접고 신규 고용을 미룬다. 근로자의 월급도 오르지 않고, 채무자들의 실질 부채 부담은 커진다. 금융회사 부실의 원인이 되고, 성장세는 저하되며, 물가는 또 하락한다. 한번 이 고리에 들어가면 빠져나가기가 매우 힘들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디플레이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최근 물가 하락은 일차적으로 글로벌 원자재 가격 약세 때문이라는 데 누구나 동의한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지난 2일(현지 시각) 거래된 두바이유 현물 가격은 배럴당 48.81달러를 기록했다. 지난해 6월 배럴당 100달러를 넘은 것과 비교하면 반 토막 난 것이다.
문제는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세계 물가와 원자재 가격의 상관관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전에는 원자재 가격이 떨어졌다고 해서 글로벌 물가가 덩달아 하락하지 않았는데,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엔 원자재 가격이 떨어지면 물가 자체가 떨어지는 빈도가 잦아졌다. 강중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제 성장세가 받쳐주면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더라도 물가가 잘 내려가지 않는데, 최근엔 성장세가 꺾여 원자재 가격이 물가 하락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디플레 막아라" 각국 통화 전쟁 나서
최근 각국 통화 당국은 자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질 것을 우려해 앞다퉈 통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자국 통화가치를 끌어내리고 물가 상승을 부추겨 디플레이션 우려를 털어내겠다는 의도이다. 호주중앙은행(RBA)은 3일(현지 시각)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내린 연 2.25%로 정했다. 지난 2013년 8월 이후 18개월 만에 금리를 조정한 것으로 사상 최저 수준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지난달 통화 완화를 발표한 이후 스위스, 덴마크, 캐나다를 포함한 주요 선진국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인도, 인도네시아가 금리를 내렸다. 성장률이 꺾인 중국도 이르면 이달 중 금리 인하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고, 일본도 상황에 따라 추가 경기 부양 카드를 꺼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통화 당국도 좌시하지 않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한번 디플레이션에 들어가면 한국은행 통화정책의 약발이 먹히지 않을 것"이라며 "이제라도 한은이 물가 상승률을 3%로 만들겠다는 식의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