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온라인 게임업체 엔씨소프트를 둘러싼 경영권 싸움이 시작됐다. 싸움을 시작한 쪽은 게임업체 넥슨 창업자인 김정주 NXC 회장이다. 넥슨은 엔씨소프트의 지분을 15.1% 보유한 최대주주다.

김정주 회장은 27일 오후 3시34분 긴급 공시를 통해 엔씨소프트(036570)지분의 보유 목적을 '단순투자'에서 '경영 참여'로 바꾼다고 선언했다. 평소 존경한다고 했던 대학 선배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설마 했던 엔씨소프트와 게임업계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왼쪽)과 김정주 NXC 회장

◆ ‘존경하는 선후배’ 관계에서 출발한 지분 협력

넥슨의 엔씨소프트 투자는 2년 6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2년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은 개인 지분 14.7%를 넥슨에 8000억원에 팔았다. 넥슨이 엔씨소프트의 최대주주로 올라선 것이다.

두 회사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넥슨이 엔씨소프트에 지분 투자를 한 것은 잘 아는 선후배 사이의 의기투합이었다. 김택진 사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85학번이고 김정주 회장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86학번이다.

김 사장은 1997년 엔씨소프트를 창업했고, 김 회장은 1994년 넥슨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20년 넘게 게임업계 ‘바닥’을 구르고 해외 시장에 도전하면서 고민을 털어놓는 사이로 발전했다.

2012년 무렵 김택진 사장과 김정주 회장의 고민은 같았다. 한국 온라인 게임의 미래가 어둡다는 것이다. 중국 온라인 게임업체들이 슬슬 한국 시장을 넘보기 시작하고 모바일 돌풍으로 한 치 앞도 예상하기도 어려울 때였다.

측근들에 따르면, 두 사람은 세계에서 게임 관련 가장 많은 특허(지적재산권)를 가진 미국의 게임업체 EA를 인수키로 하고 주도면밀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EA를 인수하면, 중국업체에 대해 특허 공세를 할 수 있고, PC에서 스마트폰으로 플랫폼이 바뀌더라도 EA 다양한 게임을 시대에 맞게 변환해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이 엔씨소프트의 지분을 팔아 현금화한 것은 김 사장과 김 회장이 동등하게 EA 지분을 갖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게 두 회사 측의 비공식적인 설명이었다.

◆ 협력 무산되자, 김정주 NXC 회장은 김택진 엔씨소프트 사장 상대로 경영권 공격

기대를 모았던 국내 1, 2위 게임업체의 협력은 기대와 달리 ‘무위(無爲)’로 돌아갔다. 우선, EA 인수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EA가 아시아 게임업체에 회사를 넘기기 꺼려했다는 후문이다.

2012년 11월 김택진 사장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게임전시회 ‘지스타’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분 매각 뒤 (현금을 확보해) 해외 게임업체를 인수해 8월에 발표하려고 했지만, 잘 안 되고 있다”고 밝혔다.

첫 목표 달성에 실패한 넥슨·엔씨소프트 연합군은 다각도로 협력을 모색했다. 넥슨과 엔씨소프트의 첫 합작 개발 프로젝트 ‘마비노기2’가 가동됐다. 이 프로젝트 역시 결말이 좋지 않았다. 지난해 1월 마비노기 2 프로젝트는 중단됐다.

그 이후 김정주 NXC 회장은 엔씨소프트의 경영권 장악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엔씨소프트 임원들은 넥슨의 조직적인 경영권 장악 시도를 막느라 남몰래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경영권 전쟁의 조짐은 지난해 가을 1차로 드러났다. 지난해 10월 8일 넥슨은 엔씨소프트와 상의도 없이 추가로 회사 지분 0.4%(8만8806주,약 116억원)를 사들였다. 넥슨의 지분율이 15.1%를 넘기는 순간이었다.

공정거래법은 상장회사 또는 등록법인 발행 주식 총수의 15% 이상을 취득하면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업결합신고서를 내도록 하고 있다. 적대적인 인수합병도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넥슨은 당시 ‘단순 투자목적’이라고 해명했으나 사전 협의 없는 지분 매입에 엔씨소프트는 크게 반발했다.

게임업계에서는 “김정주 회장이 엔씨소프트까지 지휘라인을 일원화하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 투자업계 “돈의 냉정함 몰랐나”…게임 업계 “아군(게임 산업 1세대)끼리 왜 싸우나”

27일 김정주 NXC 회장이 엔씨소프트의 경영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자, 김택진 사장의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10월 ‘단순 투자목적’이라는 공시를 불과 3개월 만에 뒤집은 것”이라며 “전체 시장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강하게 유감을 표시했다.

엔씨소프트의 반응에 대해 증권·투자 업계는 “그것은 돈의 힘”이라는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2012년 김택진 사장이 지분을 팔아 넥슨에 이어 2대 주주(9.9%)로 내려앉았을 때 이미 엔씨소프트 경영권은 김정주 NXC 회장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게임업계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두 회사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넥슨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인수합병(M&A)으로 성장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게임 개발 명가로서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넥슨이 개발한 게임 중 이렇다 할 성공작도 나오지 않았다.

반면, 엔씨소프트는 ‘리니지’에 이어 ‘리니지2’ ‘아이온’ ‘블레이드 & 소울’ 등 자체 개발 게임을 잇달아 성공시키며 세계적인 게임 개발 스튜디오로 발돋움했다.

김택진 사장은 27일 엔씨소프트가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엔씨소프트와 넥슨재팬은 게임 개발 철학, 비즈니스 모델 등이 이질적”이라면서 “넥슨재팬의 일방적인 경영 참여 시도는 시너지가 아닌 엔씨소프트의 경쟁력 약화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고 한 것도 이런 과거사를 염두에 둔 것이다.

김택진 사장은 “이번 넥슨의 결정이 엔씨소프트의 주주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시킬 것이고, 더 나아가 한국 게임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성격이 다른 넥슨과 엔씨소프트는 오래전부터 서로의 영역에 욕심을 내왔다”면서 “JJ(김정주 회장)가 그것을 이룰 지 지켜볼 일”이라고 평가했다.

엔씨소프트는 지난 23일 김택진 사장의 부인인 윤송이 북미 총괄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키는 등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