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경제를 좀 안다고 하는 전문가들은 누구나 이렇게 얘기한다.
물가전망은 매번 어긋나 수정전망을 할 때마다 큰 폭으로 조정했다. 작년 4분기 실적치는 전망을 크게 벗어났다.
시장에서는 한은이 선제적으로 기준금리 조정 등 통화정책을 잘 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작년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하한 과정을 보면 매번 상황에 떠밀려서, 기준금리 인하 목소리가 가득찰 때 돼서야 한은이 행동에 나섰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한은이 권위를 잃게 된 이유로 김중수 전 한은 총재가 추진한 여러 정책들 중 잘못된 유산이 한은의 현재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또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경제여건과 중앙은행의 기능이 크게 달라졌는데 한은이 너무 경직적인 시야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은이 지금의 경직적인 태도에서 탈바꿈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데 다들 한 목소리다.
◆ 김중수 전 총재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전망 오류, 계량모형 문제로 보는 시각도
한은의 권위가 추락하게 된 데는 김중수 전 한은 총재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가 많다.
김 전 총재는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 한다'는 이미지가 굳어져 있다.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처럼 발언했다가 다음 달 금리를 내리기도 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시장과의 소통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 전 총재는 취임 직후 한은 간부들에게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으면 혼동시켜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는 영어로 혼동(confused)이라는 표현을 썼다. 김 전 총재는 퇴임 전 마지막 금통위 브리핑에서 기자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다. 김 전 총재에게는 시장 참여자도, 기자들도 설득할 존재이기보다 혼동시킬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가 새로 구축해 놓은 거시경제 계량모형 모델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2013년에 김 전 총재는 예전에 '한은도 정부다'라는 발언과 정반대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청와대 서별관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물가전망치는 지극히 보수적으로 높게 잡아 금리인하 반대논리로 삼았다.
계량모형 모델은 변수 몇 개만 바꾸면 결과가 크게 차이날 수 있다. 한은 안팎에서는 김 전 총재가 구축한 계량모형 모델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작년 4분기 성장률이 전분기대비로 전망치(1.0%)와 실적치(0.4%)가 0.6%포인트나 차이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한 관계자는 "이주열 총재 부임 이후 계량모형 모델에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고 한다"며 "이번에 계량모형을 전면수정해 '올해 전망부터는 한꺼번에 다 털고 가자'라는 결정을 해서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한은 조사국 관계자는 "계량모형을 매달 업데이트 하지만 수치가 확 바뀔 만큼 변수를 바꾸는 일은 없다"며 "작년 4분기에 있었던 정부 사회간접자본(SOC)투자 급감, 중국 요인에 따른 가공무역 급감, 단통법에 따른 효과 등 이례적인 현상은 계량모형이 반영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
김 전 총재는 또 한은 직원들에게 상처를 줬다. 그동안 한은 내부에서 쌓아왔던 업적과 평판 대신 박사 출신이냐 아니냐, 박사여도 '톱 20' 안에 드느냐 아니냐에 따라 대우가 달라졌다. 미국 박사학위가 있어야 국장을 시킨다고도 했다.
그동안 업적과 평판이 훌륭했고 조사국에 오래 근무했던 직원들을 박사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박사 출신으로 갈아치우기도 했다. 경제전망은 직관과 경험이 더 중요할 때도 있는데, 조사국 근무 경험이 적은 박사 출신들은 계량적으로만 분석하는 경향이 강해서 경제전망이 많이 틀렸다는 평가도 있다.
김 전 총재는 한은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한은 직원들의 실력이 기대에 못 미친다고 하기도 했다. 콧대 높은 한은 직원들의 자존심을 꺾어놓겠다는 의도가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한은 직원들의 사기 저하, 한은의 권위에 대한 신뢰 추락으로 이어졌다.
2013년 10월에는 워싱턴 특파원들과 간담회에서 "한은 사람들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만큼 많이 알면 (금융감독 기능을) 줘도 되지만 모르면 주지 말아야 한다. 수준이 되어야 기능을 주는 것"이라며 "실력이 없는 사람한테 뭐 하라고 하는 것만큼 황당한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 한은 권위 추락, 제1원인은 경제전망 오류
한은의 권위가 추락한 가장 큰 원인은 매번 경제전망이 너무 잘못됐다는 것이다. 경제전망이야 틀릴 수도 있지만 한은은 매번 한 방향으로 너무 크게 틀렸다. 이는 한은 사람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한은 관계자는 '한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데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경제전망 면에서는 그렇게 본다"며 "그러나 통화정책 등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그런 평가는 너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물가전망치는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 연속 매번 전망 때마다 큰폭으로 하향조정됐다. 한은은 1, 4, 7, 10월에 경제전망을 발표한다. 작년 4분기에는 성장률까지 크게 틀렸다. 10월 경제전망 때만 해도 전분기대비 1.0%가 될 것이라던 성장률은 0.4%에 그쳤다.
한은의 경제전망이 중요한 이유는 물가와 성장률에 대한 전망이 통화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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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일섭 우리금융경영연구소 금융연구실장은 "중앙은행 속성상 보수성이 있는데 한은은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에 비해 더 보수적인 것 같다"며 "경제전망도 주관적인 정성적 평가가 가미될 수 있는데 그런 부분이 현실에 잘 적응을 못한다거나 하는 느낌이다"고 말했다.
임 실장은 "중앙은행의 보수적 속성에 한은 사람들의 남다른 프라이드(자신감), 멘탈이 결합돼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며 "한은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하면 중앙은행의 정통성이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장민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은(이주열 총재) 말보다는 부총리(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 발언이 오히려 시장에 잘 먹히고, 시장금리가 정책금리에 선행하고 이런 것은 과거에도 많이 그랬다"며 "시장의 기대가 한쪽으로 쏠리는 상황에서는 한은의 발언이 시장에 잘 먹히지 않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고 그런 현상이 더 심해졌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 위원은 "지금 한은에 조언해야 할 것은 독립성 이슈가 아니라 한은이 선제적으로 정책을 운용한다는 데 시장의 신뢰가 없다는 것이다"며 "물가전망 등 경제전망을 보다 명확히 하고 경제 분석도 더 제대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 오는 28일 정기인사…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한국은행은 오는 28일 정기 인사를 앞두고 있다. 김민호 국장이 부총재보로 승진하며 공석이 된 국제국을 포함해 조사국 등 상당히 큰 폭의 인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특히 이번 인사에서 국장, 실장은 물론 과장, 조사역 인사까지 한꺼번에 발표할 예정이다.
앞서 한은은 지난 7일 통화정책국 소속 금융시장부를 금융시장국으로 승격하고 통화정책국 내 정책연구부와 조사국 내 물가분석부 등을 신설하는 내용의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거시건전성분석국은 금융안정국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사람으로 한은이 보다 더 전문성을 갖추고 선제적인 통화정책으로 신뢰받기를, 시장은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