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의 경기도 이천 본사에는 올 상반기 완공을 목표로 길이 330m짜리 신규 반도체 라인 공사가 한창이다. 이 라인은 2006년 12월 이천 공장 증설 계획안을 정부에 낸 지 9년 만에 완공을 하게 된다. 경쟁사에 비해 6개월만 늦게 제품을 출시해도 시장 경쟁에서 패퇴하는 반도체 기업이 공장 하나 짓는 데 9년씩이나 걸린 것은 '수도권 규제' 때문이었다.

연면적 500㎡가 넘는 공장의 신·증설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데다 한강수질오염규제 같은 이삼중(二三重)의 규제 사슬이 옭아맨 것이다. 당시 이천시와 하이닉스 담당 직원들은 환경부·국토부·경기도의 문턱이 닳을 정도로 오가며 설득 노력을 했지만 '수도권 규제'라는 거대한 벽에 막혀 한 걸음도 진척을 못 봤다.

공사중인 하이닉스 공장 - SK하이닉스가 짓고 있는 경기도 이천 공장의 첨단 반도체 라인. 올 상반기 공사를 마무리하면 증설 계획을 내놓은 지 9년 만에 준공이 이뤄진다.

하이닉스가 이천에서 80㎞나 떨어진 충북 청주 공장에 2008년 신규 라인을 세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지금 이천에서 짓는 공장은 2013년 말 '기존 공장 유휴 부지에 라인을 증설하되 최고 수준의 오·폐수 정화 시설을 설치한다'는 조건을 달고 간신히 증설 허가를 받아 이뤄졌다. 앞으로 수도권 규제때문에 이천 공장 신규 증설이 힘들다면 생산라인이 있는 중국 우시(無錫)로 갈 수밖에 없다. 중국 정부는 "공장 지을 땅은 얼마든지 있다"며 한국의 첨단 기업 유치에 적극적이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지난해 5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내며 한국 경제에 효자 역할을 한 SK하이닉스가 정작 국내 원하는 땅에서 최첨단 생산 라인을 건설하는 기회 자체가 봉쇄돼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줄줄이 '兆 단위 투자' 포기

수도권 규제로 세계적인 백신 기업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공장 건설이 무산된 것도 경기도로선 뼈 아픈 일이다. 이 회사는 2006년 화성시 장안면에 백신 공장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아시아 전역에 공급할 인플루엔자와 자궁경부암 백신 제조 공장이었다. 당시 손학규 지사가 독일 백신 공장과 벨기에 R&D (연구개발)센터를 잇따라 방문해 GSK 핵심 관계자들과 협의를 진행했다. 제동을 건 주범(主犯)은 수도권에서 공장 용적률을 제한하는 공장총량제였다. 정부는 "지방 공단에 공장을 세우라"고 건의했지만 GSK는 고민 끝에 한국행을 포기하고 싱가포르에 공장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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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때문에 증설 시기를 놓친 사태도 벌어졌다. KCC는 태양전지용 유리 제조 공장 증설을 위해 여주 공장에 1조2000억원 투자 계획을 세웠다가 2011년 접어야 했다. 정부의 특례 조치가 내려지지 않는 한 공장 증설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KCC 관계자는 "2000년대 중반 건축 시장 활황기 때 증설해야 했는데 지금은 투자를 포기한 상태"라고 말했다.

덴마크 레고그룹은 1999년 경기도 이천에 약 60만㎡ 부지에 2억달러(약 2164억원)를 투자하는 테마파크 레고랜드 설립을 추진했으나 '자연보전권역'이란 규제에 막혀 좌초했다. 레고랜드 설립을 맡았던 건설시행사 LLK코리아의 민건홍 대표는 "당시 한국은 레고그룹의 전략 진출 지역이었기에 유치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며 "경쟁국들은 정부가 앞장서 투자 유치에 나서는데 수도권 규제 덫에 막힌 게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도권 투자 막힌 기업들, 지방 대신 해외로

안타까운 것은 수도권 규제로 투자 기회가 봉쇄된 기업들의 상당수가 국내가 아닌 해외로 떠났다는 점이다. 본지가 수출입은행 통계를 분석한 결과 서울·경기 등 수도권 기업들의 2013년도 해외 투자 액수는 248억달러(약 26조8000억원)로 우리나라 전체 해외 투자액(295억달러)의 84%를 차지했다.

2004~13년 10년간 수도권 기업이 해외에 투자한 누적 액수는 1669억달러(약180조원)이다. 규제 당국은 수도권에 대한 공장 신·증설을 규제하면 지방에 투자가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10년 전부터 국내 기업들은 중국·베트남 등 인건비가 저렴한 해외로 대거 생산 거점을 옮겼다.

송원근 전경련 경제본부장은 "역대 정부는 규제 개혁을 외치면서도 수도권 규제는 '성역(聖域)'으로 남겨 놨다"며 "수도권정비법뿐 아니라 산업집적활성화법·농지법·각종 환경법 등 각종 '덩어리 규제'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 근본적으로 고민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수도권정비계획법(약칭 '수정법')

수도권을 과밀억제·성장관리·자연보전권역 등 3개 권역으로 나눠 각 권역 특성에 따라 차등적인 규제를 둔다. 인구 유발 시설과 대규모 개발·공장입지 제한은 공통이다. 과밀억제권역(서울·인천 등 16개 시)은 인구 과밀을 해소하기 위한 규제, 성장관리권역(동두천 등 15개 시군)은 과밀 권역의 인구를 분산하기 위한 규제이다. 자연보전권역(8개 시군)은 한강 상류 지역의 환경을 보호하는 성격이다. 이 지역들에는 기본적으로 모두 공장 신·증설이 제한된다.

☞수도권 공장입지 규제

‘수도권정비계획법’에 의거한 공장총량제 적용으로 수도권 전체적으로 3년마다 일정 면적 이내에서 500㎡ 이상의 공장 신·증설을 허용한다. 권역별 공장입지 규제는 별도 법률인 ‘산업 집적 활성화 및 공장 설립에 관한 법률’(약칭 산집법)에 구체적으로 규정돼 있다. 특히 자연보전권역 8개 시군의 공장입지 규제는 사실상 공장 신·증축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자연보전권역에는 첨단 업종 등 무공해 공장만 1000㎡ 이내에서 신설이 가능하고 기존 공장도 1000㎡ 내에서만 증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