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3일 울산 남구에 있는 효성그룹의 파일럿(시험생산) 공장. 5층짜리 파일럿 공장 1층에서는 폭 1m, 길이 3m 크기의 압출성형기에서 지름 0.5㎝의 반투명한 실이 가래떡처럼 뽑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 실은 바로 찬물에 담겨 식은 후 쌀알 모양으로 잘려 포대에 담겼다.
이 작은 쌀알 같은 물질이 효성이 지난 10년간 500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신(新)소재 폴리케톤이다. 폴리케톤은 강철보다 강하지만 무게는 가볍고 열과 화학성분에 강한 플라스틱으로 기계부품부터 자동차소재까지 다방면에 쓰일 수 있는 소재다. 효성은 올 상반기 상업생산을 앞두고 파일럿 공장 100m 옆에서 2000억원을 투입해 연산 5만t 규모의 상용 공장을 짓고 있다.
조성민 폴리케톤사업단 상무는 "제품이 본격 출시되기도 전에 국내 자동차 회사와 공급계약을 맺었다"며 "시(試)제품의 반응이 좋아 현재 20~30개 업체와 계약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효성은 2020년 매출 1조8000억원을 달성해 폴리케톤을 기업의 캐시카우(cashcow·현금창출원)로 키운다는 전략이다.
◇연구원 3명이 10년 노력 끝에 개발 성공
효성이 폴리케톤 개발을 시작한 것은 2003년. 일본의 한 화학기업이 에틸렌 등 기존 석유화학 원료에 일산화탄소(CO)를 섞어서 철보다 강한 플라스틱을 만들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조석래 효성 회장이 직접 논문 몇 편을 구해와 개발을 지시했다.
당시 연구팀은 3명. 당시 연구팀원이었던 조해석 부장은 "폴리케톤 개발은 1970년대부터 미국·일본 등 글로벌 화학사들이 개발하다 실패한 소재였기 때문에 논문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이었다"며 "촉매제도 바꿔보고 작업 온도도 바꿔보며 10년간 폴리케톤에만 매달렸다"고 말했다. 실험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오류가 나자 연구원들은 답답한 마음에 설비 앞에서 고사를 지내고 명태를 매달아 놓기도 했다.
개발이 급물살을 탄 것은 한 연구원이 가공 안정제로 금속화학물 함유 물질을 제안하면서다. 금속화학물은 고온으로 용융된 폴리케톤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다수설(多數說)을 거꾸로 접근하자는 제안이었다. 조 부장은 "수없이 많은 시도와 실패 끝에 최적의 안정제를 찾아냈다"며 "역발상으로 해답을 찾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2013년 11월 연구진은 상용화가 가능한 단계의 폴리케톤을 개발했다. 일부 경영진의 "무모하다"는 반대에도 화학공학과 출신인 조 회장이 개발을 강력하게 지원하며 직접 연구원들과 화학식을 검토하고 촉매제 종류를 분석한 것도 도움을 줬다.
이원 전무는 "폴리케톤은 자동차 소재와 인테리어 제품, 기계 부품 등 총 400개 제품에 적용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추가로 1조500억원을 투입해 전 세계 시장 점유율 30%를 달성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자동차 소재 분야에 수요 급증
효성이 폴리케톤 개발에 사운(社運)을 거는 것은 범용 화학소재 제품은 이미 값싼 인건비를 바탕으로 치고 올라오는 중국산(産)과 힘겨운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병준 공정연구3팀 팀장은 "기존 석유화학 원료를 바탕으로 석유화학 가스를 만드는 것에 비해 폴리케톤 소재로 만들면 최소 20배 이상의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다"며 "신소재 개발로 경쟁력을 쌓는 것만이 가격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등 주요 제품의 경량화(輕量化) 트렌드로 폴리케톤 같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이 빠르게 기존 철강 제품을 대체하고 있는 것도 폴리케톤의 성공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세계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시장 규모는 올해 66조원 규모에서 연평균 5% 이상씩 성장해 2030년에는 126조원 시장을 형성할 전망이다. 김평중 석유화학협회 연구본부장은 "앞으로 차량 경량화와 친환경 소재 열풍으로 폴리케톤 같은 소재 시장이 한층 커질 것"이라며 "특히 자동차 소재에서는 철강 비중이 크게 낮아지는 대신 폴리케톤 같은 신소재 사용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