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준환 전 국립수목원장

내 인생의 첫 나무는 낙엽송이었다. 나무심기가 한창이던 1960년대, 초록색 싹눈이 보석같던 한 그루를 얻어와 마당에 심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도 무엇이든 사랑하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나무 공부는 평생의 업이 됐다.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이 있으면 나무를 찾았다. 거기 기대어 나무의 오랜 세월을 상상하다 보면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 서로 어울려 숲이 되는 나무를 보면서 인생과 사회, 생명의 진리를 헤아렸다.

평생 나무처럼 살았다. 햇빛이 들면 놓치지 않고 가지를 뻗었고, 물이 스며들면 주저 않고 뿌리를 뻗었다. 그렇게 책이 있는 곳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으로 몸을 키워갔다.

공부할 시간이 아까워 테니스도 당구도 못 배웠다. 머리를 식히려고 한 일도 나무를 보러 가거나 산에 다니는 것이었다.

술은 확실한 휴식을 줬다. 쓰러져야 쉴 수 있었고, 전날 숙취로 맥을 못 추는 상황이 내겐 휴가였다. 몸도 머리도 둔해진 시간이 느린 생각을 위한 기회였다.

박사가 돼서 국립산림과학원에 들어가서도 연구를 고집했다. 행정 일도 많았지만 연구 부서를 떠나지 않았다. 수원에서 청량리까지 긴 지하철 출퇴근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그때만큼은 내 시간이어서였다. 보고 싶은 논문이나 책을 한껏 읽을 수 있었다.

나무를 벗 삼다가 스스로 나무가 된 사람. 신준환(59) 전 국립수목원장은 그렇게 불러도 될 것 같았다. 그의 묵직한 에세이집 ‘다시, 나무를 보다’(RHK)는 깊고 푸른 숲으로 사람을 부르는 한 장의 초대장이다. 함께 숲길을 걸으며, 30년 수목에서 얻은 지혜를 더 듣고 싶었다.

지난해를 마감하는 날인 12월 31일, 그가 마지막 나무를 가꾸고 보듬었던 광릉 국립수목원으로 향했다.

◆나무와 더불어 30년, 혹은 그 이상
-인생을 나무와 함께 살았다고 했다. 언제 처음 관심을 갖게 됐나?

경북 예천에서 나고 자랐다. 1960년대 초등학교 시절에는 마을 단위로 밀가루를 나눠주면서 식목 사업, 녹화 사업, 사방 사업을 많이 했다. 그럴 때 나무가 남으면 나눠주기도 했다. 어릴 때 그걸 받고서는 너무 좋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낙엽송이었다. 가지에 새 눈이 튼 게 보석처럼 예뻤다. ‘야, 이거 참’ 싶었다. 가져와서 마당가에 심었다. 키우면서 내 딴에는 밤잠을 설쳐가며 물도 주고 애지중지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죽어버렸다. 어린 마음에 큰 상처였다. 그놈이 워낙 소중하다 싶어 나도 귀중한 것 다 줬는데 그렇게 돼버렸다. 좋은 걸 준답시고 찰진 흙을 캐다가 뿌리에 붙여줬는데 나무가 질식했던 거다. 그때는 공작할 때 쓰는 찰흙을 아이들이 곳곳에서 캤다. 황색 찰흙은 많았고 흰색은 굉장히 드물고, 검은 색은 진짜 드물었다. 황색 이만큼하고 검은색 요만큼하고 바꿀 정도였다. 그런 흰색 검은색 찰흙을 일부러 산에 가서 캐다가 뿌리에 붙여줬는데 그렇게 돼버렸다.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정말 사랑하는 것은 제대로 알아야지, 잘 모르고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죽일 수 있다는 거다. 너무 극성스럽게 간섭하면 안 좋다. 때로는 한발짝 물러서서 봐야 지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릴 때 교사였던 아버지가 전근을 하면서 형님과 함께 대구에 나와 살았다. 보호막이 없으니까 외로웠다. 혼자 들로 산으로 다니면서 나무하고 친해졌다. 미루나무에 기대 쉬기도 했는데, 그때 나무가 참 멋있었다. 이 멋진 나무를 갖고 뭘 하면 좋을까 싶었다. 그때 나라에서 과학 정신을 한창 고양시킬 때였다. 방학 때 아버지가 사오신 소년잡지 ‘어깨동무’도 보면 과학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했다.

대구에 나왔을 때도 과학을 중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나는 나무를 과학적으로 한번 공부해 봐야겠다 싶었다. 다니면서 나무잎사귀형 화석 같은 것도 수집해서 선생님께 보여주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칭찬하시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도 이과를 택해서 농대 임학과로 가서 본격적으로 나무 공부를 했다.”

-나무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었나?

처음에 농대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반대였다. 주변에서 다 그랬다. 그때 내가 공부를 좀 했다. 당연히 아버지는 법대를 보내려고 했다. 경상도 사람들 생각이 그랬다. 내가 법대는 안 간다니까, 아버지도 교육자시니 강요는 못 하고, 이과니까 의대라도 가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때는 의사가 좋았으니까.

의대도 안 간다고 하니까, 그러면 공대도 좋다는 식으로 회유하셨다. 그래도 농대 가겠다고 고집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상당히 안 좋았다. 아버지가 지원서에 도장은 찍어주셨는데 못 마땅해 했다. 누나들도 서울대 가는 건 좋은데 농대라고 말하려니까 입이 들어간다며 서운해 했다. 그래도 나는 좋다고 다녔다.

그 뒤에 한번은 아버지와 둘이 잘 때가 있었다. 당신 말씀이 “너 농대 간 것 후회 안 한다”고 했다. 그때 기분이 진짜 좋았다. 그 배경이 뭐냐면, 아버지 친구 아들들은 대학 가서 헤매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전공을 잘못 택했다는 등의 이유로. 그런데 나는 내가 좋아서 설치고 돌아다니고 하니까 보기에 좋았던 거다. 대학 2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이었다.

-당시에 서울대 농대라고 하면 '명문대는 가야겠는데 점수는 안 되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들 했다.

당시에 내가 싫어했던 게 ‘성적 안 되니까 농대 간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오히려 말렸다. “농대 간다면서 뭘 그리 열심히 하느냐, 몸 상한다”고 하실 정도였다. 대학 가서도 그랬다.

지금 젊은 사람들이 꿈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때도 비슷했다. 1등부터 20등까지 성적순으로 서울대 법대, 70등까지는 경상대, 이과는 의대, 공대, 농대 순이었다. 대학 들어와서도, 그때 계열별 모집이었는데, 1등부터 30등까지는 농공과나 식공과, 60등까지는 농화학과 이런 식이었다.

그때 나는 과 동기나 후배들에게 그랬다. “너희는 꿈도 없냐, 어떻게 성적순으로 잘려서 가냐”고. 정작 나는 실력도 없으면서 그런 소리한다는 말 듣기 싫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성적이 꽤 좋았지만, 나는 임학과 간다고 했다. 그때 두 명 빼고는 다 식품공학과를 갔다. 나는 농대에 와서 왜 다시 공대를 가냐고 했다.

후배들도 농대 왔다고 의기소침해 있으면 나무랐다. “너희는 맨날 의대 법대 애들과 비교해서 싫다고 하는데, 의대 법대만큼 공부하느냐, 우리가 사실은 공부할 게 훨씬 더 많다. 농학이나 임학 하려면 식물생리도 알고 의학도 알아야 하고, 산림 관련법도 알아야 한다. 경제도 알아야 한다. 공부는 안 하고 인정은 더 받으려면 되겠냐”고 했다. 밤새 술 먹고 떠든 게 그런 얘기였다.

산림청 와서도 후배들 기 살리는 역할을 많이 했다. 얘기는 많이 했는데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차분히 정리해서 쓴 게 이 책이다. 그래서 제목도 ‘다시, 나무를 보다’로 했다. 쓰고 보니까 퇴직자로서 내가 가야 할 길이기도 하고, 나무를 공부하는 사람의 길 같기도 하다.

-왜 학계로 가지 않았나?

처음엔 공부를 하려고 대학원에 갈 생각이었다. 군복무 3년을 해결하는 게 숙제였다. 어떻게 하면 학업에 피해가 가장 적을까 고민했다. 다들 2학년 마치고 갔다오면 가장 순조롭다고 했다. 그렇게 하려는데, 그 무렵 6개월 석사 장교(특수전문요원) 제도가 생길 거란 얘기가 돌았다. 그러면 대학원 가서 6개월이면 되는데 훨씬 낫지 않느냐며 내 입대를 사람들이 말렸다. 하지만 그런 흐름에 눈치보고 하는 게 싫어서 그냥 입대했다.

친구가 나중에 편지로 “이 등신 같은 놈아, 지금 6개월 장교제가 결정됐다. 조금만 참았으면 됐을 텐데”라고 했다. 2년 이상 손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에 있는 동안 뭘 해야 벌충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나무와의 대화였다. 돌하고도 대화를 했다.

무슨 말이냐면, 군대에서 사역이 많은데 돌을 캐낼 일이 많다. 큰 돌은 곡괭이 몇 개 갖고도 캐기가 어렵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기 시작하면 쉽게 캐낼 수 있다. 돌을 가만 살펴서 어디를 공략해서 움찔거리면 성공이었다. 그걸 내가 잘했다. 딱 보고 있다가 곡괭이로 탁 찍어서 움찔거리면 “됐어, 파내” 이러고 또 딴 데 가서 그렇게 하곤 했다. 돌의 앉은 자세를 많이 보면 그런 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 식으로 나무도 많이 봤다.

-농학자가 꿈이었나?

막연하게 교수는 생각했겠지만 선명하지는 않았다. 그때도 나는 돈이나 명예는 필요없고 공부만 할 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집사람과 결혼할 때도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니 뭘 바라지 말라”고 했다. 내가 농대 갈 때도 “농장 만들어서 온갖 생물을 다 키워보고 싶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그런 건 대학 안 가도 할 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래도 나는 “대학 가서 제대로 하고 싶다”고 고집했다. 막상 대학 와보니 공부할 게 무궁무진했다. 먹고 살 수 있는 돈만 나오면 공부를 하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 이념써클 활동에 대해서도 언급했던데.

그때가 김상진 열사가 할복자살했을 시대였다. 젊은 사람은 누구나 우리가 사는 걸 개혁하고 싶어한다. 나도 생각하는 걸 많이 좋아하니까. 서클 활동을 두 개 했다. 농악반과 농사단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의 단속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다 지하로 들어갔다. 선배들이 책을 정해주고 가르쳤다. 나중에 주사파로 가기 전인데, 가령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을 단계별로 정해줬다. 그런 책 보는 게 재미있었다.

-이념써클 활동은 공부만 하다 말았나?.

내가 늘 내 의견이 있는 놈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선배나 동료들하고 많이 싸웠다. 나중에는 주사파 같은 쪽으로 이념화했지만 그때는 이슈가 빵(경제)이었다. 나는 “빵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문화라는 게 있어야 빵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빵의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수업거부 같은 것도 싫어했다.

그때만 해도 수업거부 하면 선배가 양쪽 문을 지키고 서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말자, 수업은 자유로 듣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면 힘이 안 생긴다고들 했다. 나로서는 지금도 그런데, 독재에 맞서기 위해 결국 독재를 해야 하는 논리가 힘들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젊은이들이 공부를 해야지, 공부는 안 하고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하나, 그런 입장이었다.

제대 후에 복학하고 다시 자유를 얻으니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속도도 붙었다. 대학원 가서 석박사를 달아 했다. 아버님은 경제적인 형편을 생각해서 취직부터 하고 공부하라고 했다. 하지만 옆에서 그런 사람들 보니 그러기가 싫었다. 결혼하고 애도 있었지만 고집스레 대학원 공부를 했다.

-생계는 어떻게 해결했나?

그때 참 내가 무식했다 . 아내한테 콜라도 사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집사람이 대학 동기다.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내가 군대 갔다왔을 때 포항 안강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4학년 올라갈 때 결혼하고서는 직장도 그만두고 오라고 했다. 부부는 같이 살아야 한다면서.

다행히 그때 처음으로 우등장학생 제도가 생겨 월 5만원을 받았다. 아내에게 그걸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된다고 해서 살았다. 사실 그때 고생 얘기하자면 한이 없는데. 콜라 같은 것 쓸데없이 뭐하러 먹느냐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무식한 짓 참 많이 했다. 그래도 조교도 하고 프로젝트도 하고, 선생님들이 각별히 챙겨주셔서 지낼 수 있었다.

-결국 교수는 못 됐는데.

운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내가 전략을 몰랐다. 어느 교수 밑에서 공부해야 그 선생이 퇴직했을 때 자리를 물려받는다거나, 어디에 자리가 나니까 빨리 논문을 마쳐야 한다든가 하는 요령이 필요한데, 나는 4,5년 걸려 논문 쓰고 취직하려니까 국립대는 선배들이 다 차지했고, 사립대는 돈을 갖다줘야 했다.

그럴 돈도 없었고, 그러려고 공부했나 싶기도 하고 해서 관뒀다. 박사 마치고 선생님이 학교 있으라고 했지만 후배들 생각해서 나갔다. 그러고는 임업시험장(지금 국립산림과학원)에 들어갔다. 산림청 산하 기관이다. 들어가서 신나게 일했다. 일도 많이 시켰다.

-행복했나?

직장은 좋은데, 일에 치이는 건 힘들었다. 토요일 일요일이 따로 없었다. 그때 조재명 원장님이 나를 좋아해서 일을 참 많이 시켰다. 그래도 배려도 많이 해주셨다. 집이 수원에 있어서 직장이 있는 청량리까지 멀었는데도 그냥 다녔다. 전철 타고 출근하는 1시간 10분은 내 시간이어서, 그때 논문 보고 책 보고 했다.

-연구 부서만 고집했다고 했는데.

보통은 기획과를 많이 간다. 선배들이 산림청으로 오라고 권유도 많이 했다. 하지만 나는 능력이 없다고 했다. 그런 소리 말라고들 했지만, 내 성격이 연구 쪽이 좋겠다고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후회는 없나?

그런 쪽으로는 후회 없다. 내 책에도 영원과 순간에 대해 썼지만, 나는 연구 분야에 있으면서 내 인생을 먹고 소화시키고 반추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살아온 게 지금의 나다. 나는 얼마 전까지도 아반떼를 몰고 다녔다. 지금은 애들 때문에 바꿨지만. 직원도 그랜저 타는데 원장이 왜 그러냐고 했다. 나는 외양에 신경 쓰는 사람은 정신적 자신감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 내 속이 충만한데 어떠냐고. 지금도 어디가도 꿀리기 싫고 꿀리지도 않는다.

국립수목원장으로 있으면서 대통령을 두번 모셨다. 농림부 국정감사를 여기서 연달아 치렀다. 보통 안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때 받고, 여기가 좋다고 그다음 박근혜 대통령 때도 받았다. 그걸 치르면서도 느꼈다. 내가 정신적으로 자신이 없었으면 직원들 고생시켰을 거다. 하나라도 점수 더 잘 따려고 일을 벌이고 간섭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 나는 제자리를 고집하면서 나를 반추할 수 있었다. 추호도 후회 안 한다.

-큰 나무도 흔들린다고 책에 썼다. 흔들렸던 순간은 없었나?

대학원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아버지께서 “너는 좋아해도 집사람이나 애는 어떡할 거냐”고 했다. 나라고 별 수 있나, 취직할까 생각도 잠시 했었다. 그때 임경빈 교수님이라고 계셨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나무백과를 쓰신 아주 독보적인 분인데, 서울대 농대를 떠나 다른 대학에 있었다.

그래도 제자들이 한번씩 모여 뵈러 가곤 했는데, 어느날 선생님이 무주 구천동에 반송(盤松)을 보러가자고 해서 갔다. 취직 생각에 마음을 정리하러 갔다. 반송을 보니까,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버티고 있는 게 그렇게 대견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때 든 생각이, 나무도 저렇게 버티는데 생각 있는 사람이 이런 것 가지고 힘들다면 어떡하나 싶었다.

-반송은 어떤 나무인가?

소나무 품종인데, 나무 아래쪽에서 줄기가 많이 나와서 수형이 쟁반처럼 동그스름하게 예쁘다. 재밌는 게, 반송의 씨를 받아 심으면 거의가 소나무가 나온다. 반송은 몇 퍼센트뿐이다. 유전적으로 고정된 게 아니다. 나는 반송을 나무로 크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크면 줄기가 부러진다. 그때 구천동 반송은 커서 부러져야 하는데 버티면서 자라고 있었다. 그걸 보니 내가 이러면 안되겠다, 끝까지 버텨보자 싶었다. 그렇게 해서 학위를 땄다.

-과거엔 부처 홀대 같은 것 때문에 비애나 좌절감을 느낀 적은 없었나?

사실, 비애보다 화가 많이 났다. 산림청이나 다른 정부 부처에서 별로 안 알아주니까.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게, 내가 연구사로 들어오자마자 기후변화협약, 생물다양성협약 같은 게 있어서 내가 관여를 해야 됐다. 그쪽 공부를 했기 때문에 생태와 관련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다. 다른 부처에서 나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 말이 맞으니까. 지금도 산림청을 졸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산림청이 다 맞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산이 중요하면 그에 맞게 대해줘야 하는데, 다른 부처에서는 자기 정책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언젠가 생물다양성 회의를 하는데 국토 관장 부서에서 하는 얘기가 전부 도시계획이었다. 그래서 내가 소리를 많이 쳤다. 그런 회의는 공무원 말고도 교수들이 많으니까 내 편을 들어줘서 다른 부처에 안 꿀렸다. 보통 우리 같은 청장급 기관에서 장관급 기관에 가면 좀 꿀리는데, 우리 주장이 많이 반영됐다.

-일하는 동안 가장 보람있었던 일은?

장기(長期) 생태 연구를 처음 시작했다. 그게 뭐냐면, 우리나라 숲에 관한 자료가 모두 미국이나 독일, 일본 것이다. 80년대까지는 거의 일본 책을 편집 편역해 놓고 자신들이 저자라고 했다. 무작정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장기적인 자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걸 기반으로 교과서를 쓸 수 있다.

그래서 1991년 처음 그 구상을 시작한 곳이 광릉이다. 하다 보니 의욕만으로는 안 됐다. 국제 관례나 기준 같은 것 맞추고 하다 보니 행정적으로는 계방산에서 먼저 시작했다. 출발은 해놓고 윗분들이 자꾸 나를 승진시키려고 해서 끝까지 챙기지는 못했다. 후배들에게 넘겼는데 열심히 하고 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생태계를 볼 때 간과하는 게, 일을 할 때 항상 그보다 큰 생태계와 작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동시에 봐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큰 탈이 없다. 그런데도 하나만 보고 일하니까 나중에 크고작은 생태계는 어찌 되는지 잘 모른다. 또 생태계에 손을 대면 10년 정도는 알 수 있지만 100년 후는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1993년인가부터 생태지역 구분을 시작했다. 그걸 이어받을 후배가 없었다. 95년 수준에서 퇴직했다. 보람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수목원장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산림청장이나 더 높은 자리를 꿈꾼 적은 없나?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자리에는 미련 없다. 꼭 필요하면 하겠지만. 나서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그런 자리의 가치를 안다. 청장으로 가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무망한지를 안다. 조직을 버텨주는 것 정도는 하겠지만 자신이 가진 꿈을 펼치기는 쉽지 않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광릉 국립수목원
-수목원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세계 산림을 연구하려면 수목에서 시작하는 게 기본이다. 서울대 농대는 캠퍼스가 수목원이었다. 80년대에는 나무를 모아놓은 게 수목원이었다. 요즘은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지만. 수목원 없는 나무 연구나 임학 연구는 사상 누각이다. 내가 국립수목원장으로 와서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모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수목원에 온실이 많거나 에너지를 많이 쓰는 것을 싫어한다. 에너지 제로 베이스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 보존하고 연구만 할 때는 에너지를 쓰는 것도 무방했지만, 지금은 사회 롤모델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여기 와서 보고 배우고 간다. 그런데 에너지를 펑펑 쓰면서 절약하라고 하면 되겠나. 외국 수종도 너무 갖다 심으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외국 수종이 아름답긴 하지만 아무리 잘 키워도 우리는 이류밖에 안된다. 세계 본토만큼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 와서 이류를 보고 가는 것 아니냐. 그러지 말고 우리 것을 내세우자고 했다.

-외국은 어떤가?

외국의 식물원이 우리 수목원과 같다고 보면 된다. 영국 왕립 식물원인 ‘큐 가든(Kew Garden)이 대표적이다. 기본적으로 자연과 도시인의 중간 역할을 하는 게 식물원이다. 전 세계 식물을 보존, 복원하기도 하고, 생물에 대한 기초 연구를 하는 산실이기도 하다. 기능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 식물자원을 이용한 자연소재를 제공하기도 하고, 정원 문화를 전파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수목원은 1, 2, 3차 산업을 포괄한다. 경제적으로도 아주 중요하다. 보통 환경과 산업을 대립되는 것으로 보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수목원이 보유한 종의 유전적 가치가 국부로 통하는 시대다. 생물다양성협약에 의해 경제 이익과 직결되는 부분도 많다.

-우리 국립수목원은 외국에 비하면 늦은 건가?

많이 늦었다. 88 올림픽을 앞두고 87년에 광릉수목원이 생겼다. 외국에는 더 오래 된 곳이 많다. 영국 큐가든도 그렇고, 일본도 영국만큼은 아니지만 오래됐다. 본래 이게 왕실이나 귀족 문화와 관련이 있어서 유럽에도 많다. 우리는 먹고 살기에 바빴으니까 그전까지는 신경을 못 썼다.

산림만 해도 경제 가치를 우선했다. 빨리 자라서 먹을 게 나오는 수종만 생각했지, 환경 보존은 사치라고 여겼다. 이제 먹고사는 것 해결되고 나니까 필요성을 자각한 거다. 처음에는 국립산림과학원(옛날 임업연구원) 소속으로 있다가 99년에 국립수목원으로 독립했다.

-국립수목원 체계는 어떻게 돼 있나?

국립수목원은 여기가 처음 생겼고 지금으로서는 유일하다. 지금 추가로 백두대간 국립수목원을 조성 중이고, 세종시와 새만금에도 하나씩 생길 예정이다. 이런 것들은 국립기관이긴 하지만 공무원 조직은 아니고 별도 법인으로 갈 것 같다. 요즘 공무원을 늘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까.

-여기서 일하는 직원 수는?

연구직이 40명이고 행정직을 합치면 정규직은 60명 정도 된다. 비정규직으로 박사후 과정자들도 수십명 된다. 합치면 120명 정도다.

-다른 수목원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도나 지자체들이 하는 수목원도 많이 있다. 광릉수목원이 생기면서 우리나라 전체에 수목원 문화가 들불처럼 확산되기 시작했다. 각 도별로 산림청에서 절반씩 예산 지원받아 공립수목원이 생겨났고, 수요가 늘면서 시군 차원에서도 생겼다. 사립 수목원들도 있고, 대기업도 유행처럼 뛰어들기 시작했다.

수목원 관련법이 마련되면서 산림청 주관으로 국립/사립대 수목원도 생겼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수목원을 가지려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요즘은 퇴직자들도 관심을 갖는다. 계속 확산되고 있다. 어떤 서울시 구의원은 자기 명함을 줄때 의원보다는 숲 해설사라고 소개하는게 훨씬 자랑스럽다는 말도 하는 걸 들었다.

자연 관련 콘텐츠에 관한 한 이곳이 국내 최강이라고 할 수 있다. 식물뿐 아니라 곤충, 버섯류까지 다양하다. 네이처라는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도 구축했는데 식물 종으로는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식물에 대해 궁금하면 이곳에 들어가보면 된다. 요즘은 인터넷이 잘못된 이름이나 정보가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시스템을 활용해서 확인하면 좋겠다.

-숲해설사는 어떤 건가?

산에 가서 나무를 보고 해설해 주는 사람이다. 해설사협회가 있고 자격증도 있다. 국가 공인은 아니다. 그밖에 산림치유지도사도 있다. 이건 국가에서 인증을 준다. 4-5년 됐다. 지금 내가 동양대에서 그 1, 2급 과정을 가르치고 있다. 상당히 짜임새가 있다.

-지원자가 많을 것 같다.

주로 은퇴자들이 많다. 그만큼 요즘 나무나 숲들을 좋아한다. 내가 고위공무원들 수백명이 교육받는 자리에 간 적이 있다. 다들 명함을 주고받는데 검찰청 누구, 어느 부서 하면서 긴장들을 하는데, 내가 명함 주면서 국립수목원장입니다 하면 “어이구 그래요” 하면서 얼굴이 확 펴진다. 마음이 열리는 게 눈에 보인다.

-세상이 바뀌어서, 과거엔 힘있는 부서를 선호했지만 요즘은 다른 것 같다.

옛날 우리 할머니가 보셨으면, 힘들게 키워서 먹을 것 없어도 학교에 보냈는데, 이제 쓸데없는 것 하고 있다고 했을 거다. 많이 바뀐 거다.

-광릉 국립수목원은 뭐가 특별한가?

이런 생태계나 나무들은 외국에서도 보기 힘들다. 내가 공부할 때는 그 점이 핸디캡이었다. 연구해서 논문 써서 보내주면 외국에서 이해를 잘 못했다. “뭐 이런 데가 다 있나” “제대로 정량화도 안 돼있네” 이런 식이었다. 그만큼 우리 생태계는 정형적이지 않다.

세계 식생대를 보면 우리는 온대 활엽수대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의 극상수종(식물군을 그냥 뒀을 때 도달하는 최종 단계 수종)은 너도밤나무나 설탕단풍나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이런 나무들이 울릉도 같은 곳을 제외하고는 없다. 주로 참나무, 소나무, 단풍나무들이다. 생태학적으로 독특하다.

여기에는 기후적인 이유, 지구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또 해발 300미터 이하 숲이 보존돼 지켜지는 곳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여기가 유일하다. 이런 곳을 두고, 왜 외국 것을 어줍잖게 흉내내느냐 말이다.

내가 공부 욕심이 많다 보니까, 한번은 집사람이 그림 연습을 한다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봤다. 유럽 화가가 서문에다 “우린 참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달래를 보고 그릴 수 있으니까”라고 써놨다. 우리가 좋아하는 ‘로드덴드론’ 얘긴데 유럽 것이 크다. 해양성 기후니까. 반면 우리 것은 잎이 작다. 우리는 꽃이 크고 화려하면 좋아하지만 외국에는 반대로 작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국립수목원이 세계 인구를 다 아우를 필요는 없다. 우리 수목 좋아하는 사람이 세계 10%는 넘을 텐데, 우리 것을 제대로 키우면 그 10%가 언제라도 여기 와서 최고로 보고 갈 수 있다. 그러면 된다. 로드덴드론 같은 것 여기서 키우려면 스프링쿨러 같은 시설 많이 설치해야 한다. 우리 꽃은 기후 때문에 잘아서 눈에 확 들어오진 않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굉장히 아름답다. 그런 걸 잘 키우면 된다.

이제는 수목원이야말로 우리가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을, 미래지향적인 희망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릉 국립수목원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공간적인 규모로 보면 절대 작지 않다. 하지만 내실로 보자면 가진 종 수가 부족하다. 더 중요한 것은 갖고 있는 종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알고 있느냐는 건데, 연구 마인드가 관건이다. 우리는 행사 위주로 운영되다 보니 그 부분이 미진하다. 내가 산림과학원에 있을 때도 그랬고, 원장으로 있는 동안에도 많이 노력했는데, 연구하는 사람은 연구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그 점에서 아직 우리가 세계 수준을 못 따라간다.

-출발이 늦어서 그런가?

우리 마인드가 너무 결과 중심이다. 어떤 결과가 나오려면 과정이 필요한데 후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겉으로만 보면 우리가 훨씬 멋있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실을 보면 걱정이 있다. 물론 다행히 연구를 잘하는 사람도 많지만, 실제로 그렇게 체계적인 접근을 할 경우에는 사회가 인정을 잘 안 해준다. 연구직의 기여가 굉장히 중요한데 어디서도 그건 잘 몰라준다.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지원자에게 조언을 한다면?

내가 공부를 해 보니까 결국은 다 해야 되더라. 처음엔 나무만 공부하면 되겠지 했는데 점점 다른 분야로 가지를 뻗어갔다. 결국 생물보호협약 같은 분야로 가면 정의가 무엇인지도 문제가 된다. 수학도 열심히 했다. 하나를 빼놓고 가면 결국 돌아가서 챙겨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 할 수는 없으니, 처음에 뭐라도 한가지 열심히 붙드는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하다 보면 길이 나온다. 그걸 또 밟아 가는 거다. 누가 알려줄 수 없다. 자기가 수목원에 오고 싶든, 나무를 공부하고 싶든, 지금 하고 있는 위치에서 그 공부부터 깊이 하다 보면 공부가 길을 보여준다. 그 길로 가면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수목원에서 사람은 어떻게 뽑나? 분야는?

식물학이나 동물학 같은 생물학 전공자도 있고, 조경 원예 하는 분도 온다. 현실적으로는 박사 학위가 없으면 이곳 연구직에 채용되기가 어렵다. 사실은 박사 학위가 필요없는 일도 있다. 어떤 점에서는 박사 학위는 안 받아야 할 일도 있다. 일부러 학위 없는 사람을 뽑아보려고도 했는데 잘 안되더라. 경쟁률이 높은 데다, 시스템이 결국 박사 학위를 가져야만 들어오게 돼있다.

-학력 인플레 때문인가?

그렇다. 안타까운 일이다. 채용 전형에 지원자가 학위가 있으면 가점을 주게 돼있어서 게임이 안된다. 일부러 가점을 안 줘본 적도 있다. 하지만 학위자나 경력자가 면접에서 말을 잘 한다. 일부러 역차별할 수는 없지 않나. 결국 그렇게 된다. 공부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와야 하고, 그런 사람이 와서 열심히 한다다.

-일반인들에게 국립수목원을 소개한다면?

우리나라 경우 국립수목원이 광릉수목원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광릉수목원은 광릉숲을 보존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적이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인 접근이 제한된 곳도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숲이 세계적으로 독보적이어서 그렇다.

외국에도 보존된 숲은 많지만 기록은 드물다. 여기에는 광릉지가 전해져 온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뽑아서 옛날 분이 만든 것이다. 그걸 토대로 보존돼온 곳이다. 또 있다. 우리가 압축성장을 하지 않았나. 숲도 똑같다. 이 좁은 공간에 1910년대부터 2010년대 숲까지 이어진 수목원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우리 임업의 역사이기도 하면서 숲을 아주 집약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그만큼 보존 가치가 아주 높다.

숲을 잘 보존하면 그 혜택이 뭔지 방문자들도 알게 된다. 그런 걸 알게 되면 다른 숲 보존에도 의미가 깊어질 것이다. 다만 광릉수목원을 모든 국립수목원의 모델로 보면 곤란하다. 본래 국립수목원은 국민들이 이용하기 위한 곳이다. 앞으로 세종시나 새만금에 문을 열 국립수목원은 아주 시민친화적이 될 것이다.

-시민친화적이라면 뭘 말하나?

미래에는 수목원의 연구도 시민과 공유하면서 하게 될 거다. 그래야 되고. 지금은 시민들의 의식이나 수준이 올라가서 충분히 같이 할 수 있다. 어떤 부분은 오히려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수목 모니터링 같은 것은 연구자가 다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시스템만 조금 갖추면 여러 사람이 함께 한날 한시에 할 수 있다. 어떤 꽃, 나무를 관찰하는데, 여기는 잎이 어떻게 폈다고 하고, 저쪽 어느 분은 어떻게 났다고 하는 식이다. 요즘은 화상 전송이나 공유도 쉬우니까, 한데 모으면 정말 볼 만할 거다.

-요즘 소셜미디어를 많이들 이용한다. 여기서도 활용하나?

준비 중이다. 전용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다른 부처하고도 협력하고 시민에게도 개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처음에 이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려고 하면 사후에 수정해야 하는 것을 귀찮아 한다. 하지만 개방보다 더 빠른 업데이트 방법은 없다. 내가 아무리 잘 해도, 만인에게 공개해서 틀린 것을 지적받는 게 훨씬 빠르다. 그렇게 가야 한다고 본다.

◆광릉 국립수목원의 유래

광릉은 1468년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능림으로 지정된 이래 엄격히 보존돼왔다. 산불을 방지하고, 나무를 훼손하면 벌을 주고 했다. 극단적으로 나무 하나를 자르면 목을 친다는 식이었다. 보호를 위해 중앙에서 관리가 내려왔지만 마을에서도 주민을 뽑아 지켰다. 예전에는 주변에 화소(火巢)도 있었다. 산불을 막기 위한 요즘 방화벽 같은 것이었다.

특히 ‘광릉지’라는 문서도 전해진다. 세계에 오래 보존된 숲은 많지만 문서로 기록까지 남겨가며 보전한 숲은 드물다. 540년 동안 잘 보전돼 왔다. 1912년부터는 양묘 임업기술을 받아들여 축적해왔다. 100년이 넘는 임업기술이 한데 모여있다.

1987년 ‘광릉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9년에 국립수목원으로 지정됐다. 2010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 되면서 국제적인 교류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온대낙엽활엽수층대이다. 540년이 넘어서도 참나무와 소나무가 유지되는 숲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곳이다.

-왕릉만 해도 여러 곳인데 왜 유독 이곳만 특별한가?

다른 왕릉은 집단적으로 있는데, 여기는 세조가 지정해놓고 철저히 지키게 했다. 이곳을 보면 땅에 대한 우리 민족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숲이 무성해야 땅의 지기가 왕성한 것으로 봤다. 그래서 나무가 안 자라는 땅은 안 좋아한다. 지금도 그렇다.

저 벽에 걸린 대형 사진이 이곳 숲을 찍은 건데 자욱한 아침 안개가 신비스럽다. 마치 조조의 적벽대전을 연상케 한다. 그만큼 여기가 묘하게 수분 조건이 좋다. 습도가 높다. 우리나라는 대체로 습도가 낮아서 나무들이 크게 못 자라는데 여기는 독특하게 습도가 높아서 나무가 크고 울창하다.

수목원 입구의 전나무들이 오래 된 것들은 죽고 해서 지금은 저 정도지만, 예전 사진을 보면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 분위기가 났다. 물론 높이는 그만큼 안됐지만 굉장했다. 그래서 후대에도 이런 숲이 보존되기 쉬웠을 것이다.

-전쟁 피해는 없었나?

당연히 있었다. 6·25때 지킨다고 했는데도 피해가 있었다. 목상들이 이곳 나무를 별로 안 좋아한다. 제재를 하다 보면 목재 안에 실탄이 박혀있는 경우가 있어서 톱이 나간다. 전쟁 때 나무를 의지해서 싸웠을 테니까.

◆수억 년을 진화해온 수목의 가르침
-평생 나무와 함께했다. 당신에게 나무는 무엇인가?

나한테는 나무가 세계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공기가 뭐냐, 물이 뭐냐고 묻는 것과 같다. 나무 공부도 일종의 노동인데 나한테는 놀이 같았다. 그만큼 다양한 인식의 틀을 준다. 요즘처럼 잎을 다 떨어뜨리고 가지만 앙상할 때는 애잔한 느낌을 주지만, 왕성히 자랄 때는 처졌던 내 어깨도 올라가기도 하고.

-책에 ‘고목은 죽은 게 아니다’는 표현이 나온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평소 나무는 제 욕심만 부린다. 정작 나무가 정말 아낌없이 줄 때는 죽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면서 생태계를 살려낸다. 고목을 보면 살아있는 나무보다 훨씬 더 많은 영감을 준다. 고목을 죽었다고 치부하고 잘라내려 해서는 안된다. 흔히 고사목을 보면 숲 관리를 잘못한다면서 치우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고목은 죽어가면서 생명을 이어준다. 다른 생물이 서식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된다. 수목원에서는 살아있는 나무만 볼 게 아니다.

-나무에서 '선택과 집중'의 지혜를 읽는다고 썼다.

나무를 보면 대단하다. 마구 자라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열매를 맺는 과정이나 새순이 나오고 눈이 트는 것이 다 에너지가 엄청나게 소모되는 과정이다. 나무는 새순이 날 때는 새순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잎이 자랄 때는 새순은 성장을 멈춘 채 잎에 집중한다. 다시 열매가 맺힐 때는 에너지를 그리로 보낸다. 겨울에는 양분을 몸 안으로 돌리고 잎을 떨어뜨린다.

재미있는 것은 칼슘 같은 것은 나무 체내에서 순환이 안된다. 이런 것은 전략적으로 땅에 떨어뜨렸다가 분해해서 다시 빨아들인다. 나무가 의도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역사적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수억 년 동안 살아오면서 계절 변화에 맞게 프로그램된 것이다. 동조현상이다. 철이 든다는 게 그런 말이다. 인간이 살아낸 것은 불과 수백만 년이니까, 나무의 수억 년 축적된 지혜에서 배울 게 참 많다.

-나무나 숲도 진화론으로 다 설명이 되나?

그렇다. 우리가 흔히 진화론을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 계통수 때문이다. 종의 진화를 나무 형태로 그려서 밑으로 가면 원시이고, 올라갈수록 고등생물이고, 그 정점에 사람이 있다는 식인데 틀렸다. 이미 비판을 많이 받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원숭이도 우리만큼 진화한 것이다. 오리나 닭도 미생물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것들이 인간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진화한 결과일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계통수가 아니라 풍선처럼 우주가 확장된 것처럼 종의 분화를 설명하는 게 맞다. 세계가 커지는 것이다. 그 안에 나도 커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도 늘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 때문에(혹은 덕분에) 어제의 나를 되새겨 오늘의 나로 연속적으로 이해한다. 숲도 마찬가지로 진화한다고 볼 수 있다. 오백 년 동안 보존해온 숲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오백년 간 변화해온 숲이다. 오백 년 전과 지금 숲은 다르다. 물론 진화의 스케일로 보면 수십 억 년에서 수백 년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찰나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숲을 보면 재앙과 축복이 사슬처럼 연결돼 있다고 썼다.

호숫가에 가보면, 요즘 지자체 공무원이 일을 열심히 해서 풀깎기가 한창이다. 이게 한번 지나가면 새들이 난리다. 풀깎기가 풀이나 다른 생물에게는 엄청난 재앙일 수 있지만 다른 생물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는 거다. 태풍도 산불도 그런 역할을 한다. 숲에서 나무 한 그루가 죽어 넘어지면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다. 넘어진 나무는 재앙이지만, 밑에는 축복이다. 하늘이 열리는 것이다. 그동안 가려 햇볕을 못봤다가 그때부터 자라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본질이 상호의존성이라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인가?

나는 생명의 알맹이가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무던히 찾아 헤맸다. 알맹이가 아니라 그냥 허공이더라. 생명이란 게 세상에서 서로 연결된 그물인데, 나라는 것은 그물코도 아니고 그물눈이다. 보면 그렇지 않나. 부모 스승 친구 선후배가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물눈이고 허공이지만, 다른 세계와 연결되기 때문에 소중하다.

-책을 보면, 나무에서 시작한 공부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다.

대학 초반까지만 해도 주로 자연과학만 공부했다. 수학을 하다 보니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과학만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설명이 매끈하긴 한데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 시간만 해도 그렇다. 수학적으로 시간축을 그으면 직선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나무도 공부를 하다 보니, 농이 뭐냐 삶이 뭐냐 묻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수목생리학이나 자연과학만 할 게 프랑스의 생철학도 하게 됐다. 베르그송의 생철학은 이름만 보고 시작했는데, 그런 걸 이해하려고하니, 앞의 철학을 공부해야 했다. 농학을 공부하면서는 우리 토속 문화가 어떤 경우엔 현대 철학보다 더 와닿기도 했다. 결국 공부를 하다 보니 다 연결이 됐다.

-지구온난화나 기후변화는 어떻게 보나?

90년대에 논문도 쓴 적이 있다. 우리가 기후변화라고 하면 지구가 망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다. 인간만 망한다. 낯선 생물은 더 번성할 거다. 지구온난화라는 게 산소가 부족해지고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는 것 아닌가. 실제로 먼 옛날 지구에는 산소가 없었다. 그때 살던 생물들은 산소가 생기면서 엄청난 재앙을 맞은 것이었다. 산소가 효모를 파괴했다. 그것들이 지금은 우리 뱃속이나 소 뱃속, 땅속 깊은 곳에 가 있다.

지구온난화도 결국 인간의 삶이 걸린 문제다. 심각한 문제다. 우리가 잘해야 한다. 지금 생태학에는 ‘팬아키(Panarchy)라는 개념이 있는데, 그 중의 한 가지 이슈가 인간이 지구를 잘못 다뤄서 회복탄력성을 잃어버리면 어디로 갈 거냐 하는 문제다.

지금 지구촌의 축소판이 우리 조상이 살았던 마을과 같다. 묘하게 대비된다. 우리 조상이 수천 년 살아온 과정이 그랬다. 어느 마을에 터잡고 살다가 누군가 욕심이 많아져 파괴돼 살 곳이 못 되면,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 마을을 만드느냐, 다시 보완해서 사느냐 기로에 섰다. 우리 조상은 거의 다 보완해서 살았지 떠나서 살지 않았다.

우리 전통적인 마을숲이 기후변화와 관계가 많다. 조상들이 지금같은 기후변화에 봉착해서 이기고 적응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마을숲을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대단한 거다. 우리 마을숲과 비슷한 일본 사토야마(里山)는 우리 마을숲보다 개념이나 역사가 빈약한데도 세계적으로 알려졌는데, 우리는 그렇지 않아서 마음이 아프다.

-해법으로 마을 공동체 정원을 얘기했다. 무엇인가?

요즘 도시 사람들은 전원생활을 그리워하기도 하지만, 농촌은 지금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정신과 환경이 다 그렇다. 보상이나 지원금을 청하는 경우는 많지만, 진취적으로 살리고 건전하게 가꾸려는 정신이 부족하다. 환경만 해도 비닐봉지며 농약병이 날아다니지, 그나마 있던 도랑을 시멘트로 발라버린다.

또 하나 문제가 요즘 귀농인들과 본토인들 사이 알력이 심하다. 이 세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마을 공동체 정원이다. 마을숲 자체가 공동체 정원이었다. 수백 년 수 천년 정신적 맥락을 이을 수도 있고, 같이 땀 흘리고 막걸리 한 잔 하고 하면 이웃간 정도 생기고 알력도 사라질 것이다.

옛부터 향약을 만들고 한 게 그런 것과 연결된다. 경관도 좋아지고 환경 문제도 해결된다. 요즘 젊은이들 상대로 공동체 정원에 대한 공모전을 벌이면, 농촌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젊은이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신준환 전 국립수목원장 약력

서울대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를 땄다. 1990년 국립산림과학원의 임업연구사를 시작으로 24년을 수목과 함께 살았다. 작년 1월 31일자로 국립수목원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떠나는 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오직 나만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런 오만함 때문에 세상일이 더 꼬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쉽게 정리되었다”고 썼다. 현재 동양대 산림비즈니스학과에서 교수로 일한다.

생물다양성, 장기생태, 전통산림지식을 일찍부터 공부했다. 1992년부터 2000년대까지 기후변화협약과 생물다양성협약, 사막화방지협약 관련 국제회의에 우리 정부 대표로 참가했다. ‘다시, 나무를 보다’를 썼다. 첫 에세이다. 나무와 숲에 관한 수상록이다.

◆책 단상들

“나무는 자신이 무너져 세상이 된다. 온갖 영화로운 꽃과 잎을 다 돌려보내고 몸뚱이까지 스러진다. 수억 년 전부터 이 세상을 가꾸며 살아온 나무는 우리의 미래를 열어줄 지혜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무를 너무 무시한다. 나무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지만 우리는 나무에 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숲은 나에게 공간을 준다. 힘없는 어린아이의 다락방같이 자신만의 공간을 허락해준다. 그 속에 무궁무진하게 펼쳐지는 생물의 삶(생태)을 관찰해보자. 반갑고 정겨운 생물들과 따사로운 햇살, 산들거리는 바람은 나의 감성지수를 높여준다. 일상에서 떨어진 숲에 홀로 있으면 남들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감각을 되살려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다.”

“봄에 싹이 돋아 햇빛을 받으며 크던 나무는 성찰의 계절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며 스스로 빛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은 단풍이 빛나는 것은 빛이 없어지는 과정이다. 잡다한 고집을 버릴 때 지혜가 빛나듯이 없어지는 것을 알 때 빛이 나는 것이다. 열매도 맺고 할 일도 끝났으니, 광합성 담당자인 엽록소가 없어지고 그동안 가려져 있던 카로틴, 안토시아닌 같은 색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초록빛이 없어지고 뒤에 있던 노란색이 드러나며 마치 댐이 터진 것처럼 샛노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생명의 기획은 나무줄기 속에 무늬로 그려져 있다. 나무줄기에는 외로운 아이가 홀로 못가에서 돌을 던진 듯 동심원으로 무늬를 그린 나이테가 있다. 안에서 밖으로 잔잔히 퍼져가며 세상을 울리는 리듬이다. 나무는 봄에 잎을 펼치며 한창 성장할 때에는 세포벽이 얇지만 세포는 큼직하게 자란다. 한여름이 오고 날씨가 무더워지면 겨울의 어려움에 대비해 세포는 자잘하지만 세포벽을 두껍게 한다. 가을에는 더욱더 두꺼운 세포벽을 쌓아 겨울 추위를 견뎌낼 준비를 마친다. 이런 목질세포들의 엇바뀜이 우리 눈에는 나이테로 보이지만, 나무로서는 추운 겨울을 홀로 견뎌낸 울림의 기록이다.”

“책이란 남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내면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글자는 없지만 사람들은 숲을 보고 하늘이 만든 책(無字天書)라고 한다. 숲을 읽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나무가 수도 없이 많은 가지를 뻗고, 수도 없이 많은 잎으로 광합성을 하고, 수도 없이 많은 뿌리를 내리고 기어이 하늘을 향해 자라나는 것을 보면, 가히 나무는 집중하고 추구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도 놀이를 하며 집중하고 추구한다. 우리는 놀이가 정서발달이나 사회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다. 즉 생명의 본성을 닦아나가는 일이다.”

“사철의 변화뿐 아니라 밤낮의 기온 차, 집중호우 같은 물리적 사건, 자신을 먹어버리는 야생동물, 나무에게는 이 모든 것이 위험요소다. 이에 맞선 나무는 위험을 역이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밤낮의 온도 차이를 통해 씨앗의 껍질을 연하게 만들고, 집중호우로 씨앗을 떨궈내고 이동시키며 씨앗을 껍질을 깎아낸다. 그렇게 해서 습기 많은 곳에 정착하는 것이 싹을 틔우는 데 유리하다. 또한 나무는 씨앗을 새나 짐승에게 먹히더라도 완전히 소화되지 않는 장치를 발전시켰는데, 동물들의 소화기관을 통과하고 배설물로 빠져나오면서 멀리 이동할 수 있고 껍질도 연해진다.”

“나무는 커갈수록 점점 더 혼자가 되어간다. 나중에 엄청난 크기로 자라면 엄청난 적막을 이겨야 한다. 이런 적막은 묘한 울림을 자아내어 바람을 조금도 느끼지 못해도 가지 끝은 우주의 율동을 감지한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도 그만큼 내려앉고,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가도 그만큼 떨린다. 고요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성찰의 힘이다.”

“인류는 만물의 영장도 아니요, 자연을 보호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류의 지성은 자연의 우연한 산물일 뿐, 자연은 지성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연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특질들을 발현시키고 늘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인류가 그 안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자는 힘이 있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적응을 째째하게 잘 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살아 버틴다는 것은 비겁한 판단의 연속이다. 사자는 육체적으로 강인해 보이지만, 아프리카 사바나의 풀, 초식동물, 주기적인 비 등에 의존하는 매우 연약한 동물이다.”

“인류는 크고 작은 자연재해를 견뎌내며 문명을 발전시켰다. 우리 모두 생명을 가진 존재다. 그렇기에 고식적인 생각에 얽매이는 건 맞지 않다. 살아가기 위해 해볼 것은 다 해볼 수밖에 없는 운명, 그것이 생명이다.”

“나는 나무를 공부하면서 생명의 본질을 무던히도 찾아다녔다. 어딘가 물리학의 원자처럼 생명의 근원적인 알맹이, 즉 생명의 본질이 굳게 맺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공부하면 할수록 나무는 생명의 본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서로 의존하고 있는 그물말, 즉 생태계 그 자체가 생명의 빛임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기생이라는 말을 혐오하지만, 생명 현상에서 기생은 매우 창조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 몸에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토콘드리아도 처음에는 기생 존재로 시작했겠지만 나중에는 숙주의 몸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핵심적인 존재로 진화했다. 기생에서 공생으로 가는 것, 이것이 생명 진화의 이야기다.”

“숲에는 똑바른 나무가 없다. 얼핏 똑바른 것 같아도 몇 발자국만 옮기면 나무가 다른 쪽으로 굽은 것을 알 수가 있다… 숲에 적응하느라 이웃 나무의 눈치도 보고, 산림생태계의 여건도 받아들이며 몸이 굽은 것이다. 그렇게 어울렸기에 숲이 아름다운 것이다.”

“가만히 보면 큰 나무도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견고해지는 기회다. 평생 깊은 물을 길어다가 허공으로 퍼뜨리며 제 속을 비우는 나무, 얼마나 많은 물을 넘겨버렸으면 나무 껍질에는 저렇게 눈물 마른 자국이 많을까? 껍질을 떨어뜨리고 또 떨어뜨리며 나무가 큰다. 그래도 나무는 한 순간이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나무가 늙어서도 아름다운 이유는 희망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는 아무리 어려운 여건에서도 햇살 한 가닥만 있으면 새잎을 내고 이슬 한 방울만 있어도 뿌리를 뻗는다.”

“살아 있는 것 중에 아프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나무는 늘 아프다. 늘 아파서 향기가 난다. 인간이 좋아하는 피톤치드라는 것은 나무가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내는 물질이다… 나무가 아파서 내는 향기를 우리는 마시고 낫는다. 향기로움 뒤엔 아픔이 숨어 있다.”

“마음이 허전한 어느 날, 나무 뒤의 나무가 보이더니 숲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마음에 허전함이 있어 숲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나무보다는 오히려 나무 사이의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고 숲은 단지 나무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빈 공간이 이어지며 숲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무가 썩는다는 것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대지로 돌아가 대지가 나무를 키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다.”

“생명은 모두 의존하고 있다. 인간도 당연히 다른 생명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쭐거리며 마치 인간이 다른 생명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생명을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중한 병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는 한 인간은 어떤 병도 이길 수 없다.”

“숲에는 피톤치드같이 식물이 내뿜는 향기가 있다. 피톤치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미생물이나 벌레가 공격해올 수 없도록 뿜어내는 화학적 방어물질이다. 그래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 선조들은 음식이 안 변하게 솔잎을 깔고 송편을 쪄서 피톤치드로 훈증시키고, 청미래덩굴의 잎이나 떡갈나무의 잎으로 떡을 싸서 보관했다.

이런 피톤치드가 미생물이나 벌레들에게는 치명적이지만, 덩치가 큰 사람에겐 농도가 약해 오히려 몸에 좋은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 상쾌한 느낌을 주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작용이 있어 집중력과 기억력을 올려준다. 또 몸에 들어가면 고혈압이 개선되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이 낮아지며 심폐 기능과 장 기능이 강화된다고 한다.

그래서 숲에서 걷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두통이나 불면증을 몰아낼 수 있으며 신체 면역력도 높일 수 있다. 또 숲에 많은 음이온은 근육과 심장 등 오장육부에 작용하는 자율신경을 진정시키고, 신진대사를 촉진하며, 혈액이 깨끗하게 순환되도록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