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데 하늘에서 돈다발 같은 거 안 떨어지나?"
"돈 떨어지는데…있지."

영화 국제시장에서 생선 궤짝을 나르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는 친구 달구(오달수 분)에게 서울대 붙은 동생의 등록금을 마련해야 한다며 신세 한탄을 한다.

달구가 돈을 벌 기회라며 내민 것은 ‘파독 광부 모집’이라는 기사. 해외로 나간 ‘산업의 역군’ 1세대의 출발은 이처럼 먹고 사는 돈 문제로 시작했다.

덕수는 1963년 12월 파독 광부 1진으로 독일에 간다. 도착한 곳은 뒤셀도르프에 있는 함보른 광산. 한국보다는 낫다고는 하나, 독일의 광산 역시, “살아서 만납시다”는 인사가 일상인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실제 이곳에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1964년 11월 28일 조선일보는 ‘서독 파견 광부 김철환씨 사망’ 소식을 전했다. 기사는 “서독의 코텐베르바우의 에세너스타인에 있는 우리나라 광부 김철환군이 25일 상오 11시 30분 갱내에서 작업 중 큰 돌이 떨어지는 바람에 목 아래 척추가 부러져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보도했다.

파독광부백서에 따르면 1963~1982년 파독 광부 사망자 78명 중 광산 노동으로 26명, 교통사고로 21명이 사망했고, 자살 또는 익사자가 6명이었다.

당시 파독광부의 사망을 전한 조선일보 기사.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당시 많은 젊은이가 독일행 비행기를 타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963년 9월 1차 시험에서 765명을 뽑았는데 당시 경쟁률만 4대 1이었다.

이중 덕수와 달구처럼 12월 비행기를 탄 1진 123명 가운데 대학 재학ㆍ졸업생이 20%나 됐다. 이에 ‘신사광부’란 말까지 나왔다.

이들이 손에 쥔 돈은 한 달에 162달러. 우리 돈 20만원 남짓한 돈이지만 1인당 GDP가 87달러였던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큰돈이 아닐 수 없다.

파독 광부는 당시 우리 사회상을 잘 대변하는 사례이기도 했다. 1960년대 초 한국은 인구 2400만명에 실업자가 250만명인 나라였다. 종업원 200명 이상인 기업이 50여개에 불과했다.

새로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뭘 해보려 해도 돈이 없었다. 1970년대 말까지 독일에 간 광부는 모두 8300명. 이들과 함께 독일에 건너간 간호사 1만3000명 등 2만여명은 매년 5000만 달러에 달하는 외화를 고국에 보냈고, 이 돈은 조국 산업화의 태동을 알린 마중물이 됐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인들에게 심어준 성실한 모습은 독일 정부가 한국에 경제건설을 위한 차관을 제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일에서 번 돈으로 동생 대학공부를 시키고, 집까지 장만한 덕수는 1970년대 초 전장(戰場 )인 베트남으로 다시 나간다. 이 역시 돈 때문이다.

고모와 함께 하던 수입잡화점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 위기에 몰린데다, 여동생 결혼자금까지 마련해야 하자 덕수는 가족을 위해 미련없이 떠난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베트남에 기술 근로자로 파견된 덕수와 달구.

영화 속 베트남에서의 덕수는 대한상사라는 회사의 조끼를 걸치고 있다. 당시 파견 기술자의 70%는 한진상사와 경남통운, 현대건설, 한양건설, 공영건업 등 5개 업체에 근무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운수ㆍ용역업을 하던 업체는 지금 대한항공을 운영하는 한진이다.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故) 조중훈 전 회장은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에서, “1966년 미군과 790만 달러의 용역계약을 맺고, 베트남 퀴논에 지사를 설치하면서 베트남에 진출했다”고 적었다. 하역한 1500톤 규모의 군수품을 인근 미 27수송대대 기지창까지 실어주는 게 첫 임무였다.

조 전 회장은 자서전에서 “열 명 정도 인력을 투입해 32시간 만에 작업을 마쳤다”며 “미군들은 ‘그만한 분량이라면 일주일은 걸렸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썼다.

조 전 회장은 “미군들에게 우리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했다. 부족한 장비와 인력에도 불구하고 간부들까지 합세해 짐을 날랐고 트럭도 운전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한진상사는 700명 규모로 현지 사업을 시작했다. 한진 직원 200명에, 신문광고를 통해 모집한 기능공, 근로자가 대부분이었지만 나중에 사업규모가 커지면서 2000명까지 늘게 된다.

영화에서처럼 베트남전은 전후방을 가리지 않았다.

조 전 회장도 회고록에서 “내가 묵고 있던 호텔 부근에서 민간인 복장을 한 베트콩이 시한폭탄을 장착한 차를 진입시켜 폭파한 것을 목격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멀쩡한 후방에서도 폭파와 테러가 빈발했고 게릴라가 출몰했다. 기습공격을 받아 인명사고가 나면 직원들이 공포에 떨어 사기를 높이기 위해 직접 수송 차량의 선두에 서야 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한진은 이듬해 2차 계약에선 1차의 5배에 달하는 3400만 달러를 수주했다. 군 철수와 함께 용역사업을 마무리한 1971년까지 5년간 한진이 베트남에서 획득한 외화는 1억5000만 달러였다.

한진은 1967년 대진해운(한진해운의 전신)을 세웠고, 1969년엔 대한항공공사를 인수, 항공사업을 시작했다. 조 회장은 “월남 사업에서의 경험과 용기를 바탕으로 계열회사를 거느린 기업 집단으로 발전해 갈 수 있었다”고 했다.

베트남에서의 용역·운송 사업으로 한진그룹은 오늘날 대기업으로서의 기틀을 닦는다. 하지만 파월 근로자 임금 체불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1971년 파월 근로자들의 농성으로 난장판이 된 회사 건물을 직원들이 청소하고 있다.

1965년 93명의 근로자가 처음 베트남행을 택한 이후, 한국군이 철수하기 시작한 1973년까지 연인원 2만여명에 달하는 인원이 베트남으로 떠났다.

이들은 노동강도와 숙련도에 따라 월 300~800달러의 임금을 받았고 월평균 250달러씩 국내로 송금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이 벌어들인 돈만 매년 1억 달러가 넘었다.

기술자들이 모두 베트남으로 몰려가면서 국내에선 오히려 기술자 기근현상을 겪기도 했다. 1968년 서울시에 등록된 중장비 기술자가 160명으로 당시 베트남에 나가 있던 기술자 990명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이 영화에서는 우리 현대사, 그중에서도 산업사의 큰 줄기를 직접 노출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이나 이병철(삼성그룹 창업주), 구인회(LG그룹 창업주) 같은 재계 총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생존을 위해 땀 흘려 일한 평범한 아버지들이 주인공이다.

다만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회장으로 짐작되는 인물이 카메오로 등장해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영화 초반 덕수와 달구가 말쑥한 차림의 한 젊은 신사의 구두를 닦는다. 이 신사는 우리나라에 조선소를 세워 큰 배를 만들겠다는, 한국전쟁 당시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허황한 꿈을 꾼다. 이 젊은이는 “시련은 있지만 실패는 없다”는 말을 남기면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