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봄 임금인상에 대해 최대한 노력해달라.”

지난달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첫 행보는 재계와 노동계, 정계 인사들이 모두 모인 ‘노사정 회의’였다. 선거 이튿날 아베 총리는 이들과 만나 “임금인상이 향후 성장전략을 펴는 데 꼭 필요한 일”이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결국 “경제의 선순환을 실현하기 위해 임금인상에 합의한다”는 문서를 받아냈다.

임금인상은 일본만의 이슈가 아니다. 이제 국민 개개인의 주머니를 불리는 일이 각국 경기회복의 우선 전제가 됐다. 소득이 늘어야 물건이 팔리고, 그래야 기업 이익이 증가해 생산과 수요가 확대된다. 그리고 다시 물가가 상승하면서 자연스럽게 경기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총리가 지난달 15일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뒤 활짝 웃고 있다.

◆ 임금인상, 美·日 최우선 정책과제

임금인상은 아베 총리의 경제 정책의 밑그림이다. 아베 총리의 경제정책 아베노믹스는 크게 ‘재정정책’과 ‘금융완화’, 그리고 ‘성장전략’이라는 이른바 ‘세 개의 화살’로 이뤄져 있다. 이 중 세 번째 성장전략의 핵심이 바로 구조개혁과 함께 임금인상을 통한 경기회복이다.

일본에서 임금결정은 그동안 노사협상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정부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20년 장기불황과 마주한 아베 총리의 결심은 남다르다. 2013년 12월 아베 총리는 각 경제단체 연합회장들에게 법인세 인하라는 당근책을 제시하는 대신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강력한 정책의 성과는 바로 나타났다. 닛케이신문에 따르면 작년 봄 일본 대기업의 평균 임금 상승률은 2.28%로 2013년의 1.83%보다 올라갔다. 90%의 기업이 돈을 더 준 결과다. 게이단렌(경단련, 일본 경제단체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작년 여름 보너스 상승률도 전년대비 7.2%로 2013년의 5%보다 높아졌다.

임금인상의 효과는 경기회복에만 있지 않다. 미국처럼 금융위기 이후 어느 정도 경기가 나아졌다 하는 경우,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임금인상은 불평등 해소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지난달 워싱턴에서 특별연설을 통해 이민법 개혁안을 발표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오바바 대통령은 지난해 초 행정명령을 통해 최저임금 인상했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12월 초 100대 기업 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기업 이익은 60년 만에 최고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주식시장도 이에 맞춰 활황이지만, 개인 소득은 여전히 지지부진해 지금 세대는 이전 세대가 누렸던 만큼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작년 2월 최저임금을 시간당 7.25달러(약 8000원)에서 10.10달러(약 1만1000원)로 올리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추가 인상카드도 만지작 거리고 있다. 대규모 양적완화로 경기는 살아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소비능력이 지나치게 낮아 사회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 임금인상, 국내서도 불 지펴

국내에서도 임금인상 논의가 활발하다. 정부는 지난 8월 ▲근로소득 증대세제와 ▲기업소득 환류세제 ▲배당소득 증대세제 등 이른바 ‘가계소득 증대세제 3대 패키지’라 불리는 세법개정안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이명박 정부에서 강조하던 낙수효과(고소득층의 소비와 투자가 시간이 지나면서 저소득층의 소득증대로 이어지는 것)의 한계를 인정한 셈이다.

한국도 저성장 단계를 지나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여기에는 정체된 임금상승도 한몫한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지난 2002~2007년 17.6% 증가한 실질임금은 이후 5년 동안(2007~2012년)에는 되레 2.3%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은 각각 15.8%와 14.5%로 큰 차이가 없었다. 물가가 오르는 동안 임금은 오히려 뒷걸음질했다.

노동생산성은 계속 높아지는 추세지만 실질임금은 2000년대 들어 계속 정체흐름을 나타내고 있다.

노동계와 시민단체는 비정규직 증가에 따른 저임금 근로자의 양산에서 원인을 찾는다. 저임금 체제가 구조적 현상이 되면서 가계부채가 늘었고, 이것이 내수부진의 악순환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양극화 구조를 깨기 위해선 최저임금부터 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우리나라는 저임금근로자의 비중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고 노동자 간 임금 격차도 크다”며 “최저임금 현실화야말로 양극화 해소의 출발점이며 임금 성장 구도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바라보는 재계의 시각은 편치 않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달 28일 발표한 ‘2015년 노사관계 전망조사’를 보면, 경영인 63.1%는 “새해 노사관계가 더 불안해질 것”이라고 전망하며, 가장 우려하는 임단협 이슈로 ‘임금인상’(38.5%)을 꼽았다. 재계는 통상임금이나 휴일 근무 시 할증요인 등 이미 임금인상 요인이 얼마든지 있다며 추가 임금인상 논의가 본격화되면 고용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 주장한다.

전문가들은 임금인상의 긍정적, 부정적 측면을 논하기에 앞서 외환위기 이후 굳어진 성장둔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적어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해법을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이익이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내수부진이 심화하고 있다면 가계에 돌아가는 몫도 중요하게 인식해 볼 시점이 됐다는 것이다. 가계 소득 증대에 초점을 맞춘 정부의 세제개편안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가계 소득을 늘리는 방식의 세제 개편안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소득의 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며 “임금과 배당을 자발적으로 늘려 경제를 활성화하면 우리 경제를 저성장에서 구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