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3년간 진행하던 배터리 기술에 대한 특허 소송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두 회사는 "앞으로 10년간 국내외에서 배터리 분리막에 대한 소송을 일절 진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올 6월 미국 전기차 생산 업체 테슬라는 "핵심 기술인 구동 장치와 동력 전달 장치 등을 전면 공개하겠다"고 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테슬라의 전기차를 카피하는 업체가 있어도 소송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달 초 SK그룹과 LG그룹도 협력사와 벤처 창업자 등에게 자사 특허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했다.
최근 기업들이 특허 소송에 합의하거나 자사의 특허를 무료로 공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특허 공유(共有) 계약도 잇따른다. 3~4년 전 기업들이 기술을 무기로 치열한 '특허 전쟁'을 치렀던 것과는 상반되는 '특허 공존(共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잇단 특허 無料공개와 소송 취소
작년 말에는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가 OLED(유기발광다이오드)와 LCD(액정표시장치) 등 각종 화면 표시 장치에 대한 특허 소송을 모두 취소했다. 올 9월에는 미국 TAS에너지와 GE가 터빈 공기 냉각 시스템 관련 특허 소송에 합의했다.
4년 전 특허 전쟁을 촉발했던 애플은 올 초부터 구글·삼성전자·모토로라 등과 진행하던 소송 대부분을 취하했다. 애플의 자회사인 비츠일렉트로닉스도 미국 음향 기업 보스와 헤드폰 잡음 제거 기술 관련 소송을 합의로 마무리했다.
특허 공개 기업도 늘고 있다. SK그룹은 지난달 10일 창업자들을 상대로 특허 기술을 공유하는 '기술 사업화 장터'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만우 SK 부사장은 "올 연말까지 2400건을 등록하고 매년 1100건을 추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특허 공유 계약도 확산되고 있다. LG전자는 최근 소니, 구글과 공유 계약을 맺었고, LG전자와 LG이노텍은 오스람과 발광다이오드 조명 관련 삼자(三者) 간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 삼성전자도 올 초부터 구글·시스코·에릭슨과 공유 계약을 체결했다.
◇"기술 공유로 시장 키우자"
그동안 '특허가 돈'이라는 인식을 가져온 기업들의 태도가 바뀐 가장 큰 이유는 장기 불황 탓에 특허 소송으로 얻는 실익(實益)이 없다는 점이다.
법률사무소 지호의 장지호 IT 특허 전문 변호사는 "특허 소송은 보통 호황기 때 많다"며 "불황으로 상대 기업의 실적이 나빠지는데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잘못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다"고 말했다. 4년간 진행된 삼성전자와 애플의 소송이 결국 변호사와 로펌의 배만 두둑하게 해줬다는 평가가 나도는 것도 한몫했다.
후발 주자들의 공세가 선두 주자들의 협력과 단합을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 여기에다 기술 개발 속도가 빨라져 기존 특허의 수명(壽命)이 크게 짧아진 것도 영향을 줬다. 김영학 무역보험공사 사장은 "중국 샤오미(小米) 같은 후발 주자들의 도전에 선두 주자들이 소모전을 줄이고 '공통 적(敵)'에 대처하려고 뭉치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했다.
기술을 공유해 시장 규모를 늘리려는 의도도 있다. 남인석 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 부회장은 "전기차는 기득권을 고집하기보다 표준 기술을 공유·확산해 시장을 키우는 게 더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미국에선 최근 과다한 특허 소송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 특허 심사를 강화하고 특허 괴물을 규제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미국 법률 정보 제공 업체 렉스머시나에 따르면 올 들어 9월까지 미국연방지방법원에 접수된 특허 소송 건수(329건)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40% 정도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