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에디톨로지'의 저자인 김정운 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

“일본에 안식년으로 갔다가 사표를 팩스로 제출하고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내 인생 후반기엔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노인용 성인만화를 배워둬야겠다 싶어 미대에 입학했다. 거기서 빠져든 것이 일본화다. 지금은 학교 가서 그림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산책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도중에 아이스크림도 먹고, 글감도 떠올리고, 다음 책 구상도 한다. 너무 좋다. 귀국도 연기할까 보다. 이제 생각하니 교수직 사표 쓴 게 내 인생 최고의 결정이었다.”

‘돌아온 아톰’처럼 둥글게 들뜬 파마 머리를 한 그는 자기 말마따나 행복해 보였다.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더케이호텔(옛 교육문화회관) 1층 커피숍. 오전 10시 약속 시간에 거의 맞춰 나타난 얼굴은 살짝 피곤한 기색이었다. 자신의 새 책 ‘에디톨로지’ 출간에 맞춰 귀국해 밀린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빴던 모양. 그래도 눈빛은 부드러웠고, 목소리는 기분좋게 가벼웠다.

한때 TV에서 입담 좋은 패널로, 언론출판계에서는 글발 좋은 저자로 인기 절정을 구가했던 교수 김정운. 그가 2년여 전쯤 홀연히 현해탄을 건너갔을 때 다들 수근댔다. ‘무슨 꿍꿍이일까’. 그때만 해도 그는 번듯한 명지대 교수님이자 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님이었다. 하지만 그새 미대 고학생으로 신분이 바뀌었다.(대화 중에는 교수라는 호칭을 유지했다.)

그러더니 불현듯 책 한 권을 들고 컴백했다.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인터뷰를 청했다. 내친 김에 책 말고도 ‘여러가지’를 물었고, 그는 주저없이 답했다. 자기 이야기나 남에 대한 이야기나 너무 과하게 솔직해 간혹 아슬아슬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겨 전한다.

인터뷰에 앞서 참고 자료로 아래 글을 소개한다. 이미 아는 분도 있겠지만, 2012년 3월 그가 조선일보 '파워 클래식 101-그리스인 조르바' 편 독후감으로 보내와 보도된 글이다. 읽고 나면 이날 인터뷰를 포함한 그의 여러 후속 언행들이 맥락에 닿게 이해될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 나이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읽는 게 아니었다.(중략) 지난 며칠 동안 난 이 책을 손에서 놓질 못하고 무척 괴로워했다. 이 느닷없는 '자유'에 대한 망상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리스인 조르바'를 네 번 읽었다. 매번 조르바가 이야기하는 자유의 의미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처럼 진지하고 심각했던 적은 없었다.(중략)

난 올해로 꼭 만 50살이 되었다. '자유'와 같이 철없는 단어는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 내 나이에는 '안정' '품위' '경륜' 뭐 이런 걸 생각해야 하는 거다. 그러나 조르바는 나처럼 소심하고 비겁한 주인공에게 자꾸 묻는다. 자유롭냐고. 물론 자유롭다며 우기는 주인공에게 조르바는 이렇게 쏘아붙인다. "아니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중략)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감동은 명확하다. 도대체 '내켜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느냐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도대체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난 '교수'를 내켜서 한 게 아니다. 학생들 가르치는 일이 그토록 '내키질 않아' 매번 신경질만 버럭버럭 내면서도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의 달콤함에 지금까지 온 거다.

느닷없이 다가온 '자유'라는 조르바식 질문에 견디다 못해 난 얼마 전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날부터 계속 후회하고 있다. 오늘도 난 일본 나라시의 차가운 방바닥을 뒹굴며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다. '아니, 이런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막막한 자유로움에 '쫄고 있는' 내게 조르바는 또 그런다. 그따위 두려움은 '개나 물어가라지!'"


자, 이제 질문을 시작한다.

-일본 유학은 아직 안 끝났나?

"아직 학기 중인데 선생님한테 새 책을 팔아야 물감 값이 생긴다고 얘기하고 왔다. 학교는 2년제 전문대인데 내년 2월 졸업 예정이다."

-그새 교수에서 학생으로 신분이 변했다. 과정을 얘기해 달라.

"안식년을 맞아서 일본의 나라 현립대로 교환교수로 갔다가 그 해에 교수직 사표를 썼다. 알다시피 조르바를 읽다가 그만…. 그러고는 고민하다가 만화를 배워봐야겠다 싶어 교토로 가서 전문대에 입학했다."
-그리스인 조르바 독후감 쓰다가 사직 결심하고 팩스로 사표를 보냈다는데 사실인가?

"맞다. 그 때는 그만두고 후회를 좀 많이 했다.(웃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과장처럼 들린다. 그 정도였나?

"거기 있는 동안 이런 책을 쓰게 된 것만 봐도 잘한 결정 아닌가. 내가 지금까지 쓴 책 중에 제일 잘 쓴 책이라고 자부한다.(웃음) 번역서도 한 권 냈다. '보다의 심리학' 이라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일어 공부를 하면서 했으니까. 1년 넘게 매달렸다."

-일어는 처음이었나?

"6년 전 와세다대 교환교수로 왔을 때 했지만 다 까먹었다. 이번에 번역을 하려니 어렵더라. 암튼 일본에 있는 동안, 예전처럼 교수로서 연구 업적을 쌓는 차원이 아니라, 순전히 내가 가진 지적인 호기심에서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집중해서 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 교수직을 그만두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 전에도 '여러가지문제연구소'(순간 내 입에서는 '이것저것연구소'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김 교수는 처음에는 뜨악해 하더니 곧바로 '오, 그 명칭도 괜찮겠는데'라고 했다.)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방송이나 저술 활동을 자유롭게 하지 않았나?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부러워했는데.

"그래도 주어진 역할이 교수였고, 해야 할 수업이 있고 책임져야 할 대학원생도 있었다. 이런저런 맡은 일도 많았다. 내가 공부 욕심이 굉장히 많은데 외적인 조건은 충분치 않았다. 이런 걸 과감히 쳐내고 나니까 내 공부가 가능해졌다. 공부하는 즐거움이 뭔지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사표 쓰길 정말 잘 했다는 얘기다."

-왜 하필 만화를 배울 생각을 했나?

“교수를 그만두고 나서 앞으로 뭘 할까 생각하다 보니, 언뜻 만화가 떠올랐다. 그 전에도 이원복 선생이 부러웠다. 학문적인 내용을 만화로 잘 표현하는 게 너무 부러웠다. 내가 만화를 그릴 줄 알면 더 잘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슬프게 웹툰이라도 그려놓고 글을 쓰면 내 얘기가 훨씬 더 전달이 잘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사회 지식인의 문제가 뭐냐. 지식과 일반인들의 삶이 너무 괴리가 돼있다. 이건 지식인의 직무유기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이유도 있다. 학문에 자신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남의 언어로 학문을 해오다 보니 대중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달려서 그럴 수도 있고. 지식인 사회가 고립된 특권에 안주한 결과일 수도 있다.

어찌 됐건 우리 사회의 일반 교양 수준이 이래서는 안된다고 본다. 정치적으로 내편네편 나누는 것 말고는 사회 담론이 너무 빈약하다. 수준도 너무 천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과 일반인 사이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하기 위해 그림과 글을 동시에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충동적으로 사표를 냈다고는 했지만 오래 준비했던 것 같다.

“사표는 충동적인 결정이 맞다. 교수직은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사표 내고 한동안 많이 후회했다. 내가 대중적인 인기를 좀 얻었다고 해봐야 그게 얼마나 가겠나. 안정적인 직장이 있어야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교수직에 연연하는 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충동적으로 그만뒀다. 막상 관두고 나니 불안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평균적인 한국인이 가지는 똑같은 불안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뭘 할까 고심하다 보니, 만화 생각이 떠올랐다. 나중에 내가 학문적 역량이 떨어진 다음에는 노인용 성인만화를 그리면 재밌겠다 싶었다. 노인에게 에로티시즘을 얘기하는 것 말이다. 일본에는 그런 만화가 많다. 젊은 사람들 생각하는 섹스나 포르노 같은 것 말고, 노년기의 연애 감정이나 성 같은 것 말이다. 잘 안되지만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이런 게 재밌게 묘사된 게 많다. 그런 걸 나중에 내가 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자꾸 눈을 깜빡이게 하는 여인'

-지금은 그림을 배운다고 했는데.

“교토 사가현 예술전문 단기대학에 들어갔는데, 사실 내가 생각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 조선일보에 칼럼과 같이 연재하는 내 그림을 보나? 잘 그리는 것 같지 않나?”

-소질은 있어 보이는데….

“에이, 그렇게 얘기하면 안되지. 새로 시작한 지 2년도 안 돼서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거다.(이 대목에서 김 교수는 웃지 않았다.) 수준이 있는 사람이 봐도 잘 그린 거다. 요즘 한국 시장에 미술에 대한 거품이 너무 끼어서 그런데. 그것도 주변부 열등감으로 보이는데. 내 그림은 그림만 보고 판단하면 안된다. 글과 함께 판단해야지. 한국의 어떤 지식인이 자기 글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그림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느냐 이거지. 그 부분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내 그림을 일반 화가들 그림과 비교하면 안된다. 옛날 문인화를 봐라. 그 사람들도 글로만 안되니 그림과 함께 쓴 것이다.”

-글에 그림을 곁들이는 경우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림 그리는 시인도 있고.

“시나 소설 같은 것은 그림으로 표현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나처럼 인문학적인 내용을 그림으로 동시에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 이건 진짜 어렵다. 지적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영역은 내가 개척했다고 본다. 학문적 담론을 일상으로 소화해 내고 그걸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 그런 사람 없었다. 이원복 교수가 근접한 경우인데, 그분은 만화에 전문성이 있지만 나는 처음이다.”

-작업은 어떻게 하나?

“칼럼을 준비할 때 주제를 정하면서 한 문장만 생각한다. 그 다음 그림을 그린다. 2주 꼬박 그린다. 신문에는 작게 나가지만 크다. 100호짜리도 있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하면 그냥 글만 쓸 때와 생각이 다르다. 그림이 완성되고 글을 쓰면 오히려 빨리 된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글을 먼저 쓰고 그림을 그릴 거라 생각하지만 반대다. 그림을 먼저 그리고 글을 쓰다 보면, 지적인 내용을 정서적으로 건들 수 있는 모티브들이 막 생긴다. 나로서는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게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쓸 때는 힘들지만. 분량도 적지 않은 데다, 많은 사람이 보지 않나.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

-만화에서 그림으로 옮겨간 계기는?

“지도 교수가 일본화를 권했다. 학교 부총장이 일본화 전공인데, 내가 그리는 거 보더니 한국인한테도 가르쳐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해보니 일본화가 아주 재밌었다. 돌가루(석분), 조개가루(호분)를 갈아서 아교에 녹여 바르는 식인데, 천연물감이라서 색이 너무 예쁘다. 수채화나 유화와는 느낌이 다르다. 인공적인 번뜩임이 없고 편안하다. 그 대신 재료가 비싸다. 전 세계에서 수입해 와서 아주 미세하게 갈아 팔다 보니. 요만 한 게 몇 십만 원씩 한다. 그걸 바르면 질감이 아주 다르다. 신문 지면에서는 그 질감이 제대로 안 살아서 아쉽지만. 더구나 내가 그냥 아이폰으로 찍어서 보내니까 느낌이 잘 안 산다. 일본 학생들은 돈이 없으니까 연하게 풀어 쓴다. 수채화처럼. 나는 여태 일본인들이 해온 것과는 다르게 물감을 마구 짓이겨서 그린다. 그야말로 돈을 바른다. 그랬더니 다들 잘 그렸다고 하더라. 그래서 돈 떨어지면 이렇게 와서 물감 값 벌어 가고 하는 거다. 물감 값 번다는 게 농담이 아니다.”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겠다.

“아직 내 장르를 개척한 건 아니고. 나는 내 글과 그림이 합쳐지는 게 목적이다. 글의 내용에 따라 어떤 때는 추상화로, 어떤 때는 구상화로, 만화로 표현한다.”

-전시회도 계획하나?

"칼럼을 마치고 책 한 권 분량이 되면 생각해 볼 문제다. 마음은 있는데 그때 가서 챙피해서 안 할 수도 있고."

-이번 책은 어떤 책인가?

“지금까지 나온 내 책 중에 최고라고 자부한다.(웃음) 남들은 어떻게 보든 상관 없다. 그동안 여러 책을 썼지만 초기에 어설프게 써서 좀 챙피하다 싶은 책은 다 절판 시켰다. 지금 살 수 있는 책은 네다섯 권 된다. 책 낼 때는 매번 잘 썼다고 생각하고 내밀긴 했지만, 지금은 느낌이 질적으로 다르다. 과거엔 책 나오고 이삼 일 지나면 시들했는데, 지금은 아직도 내 침실과 화장실, 식탁에도 두고 매일 본다. 보면서 ‘어우, 이걸 내가 썼다니’ 이런다. 이 책은 쓰기는 몇 년 걸쳐 썼지만, 최근 들어 바뀐 내 문체를 반영했다. 그전 문장들은 너무 길고 쓸데없는 형용사가 많아 쳐내는 데 한 3개월 걸렸다. 일본에서 거의 매일 세 시간밖에 못 잤다. 입술도 부르트고. 예전에 연재했던 글을 이번 책에 절반 정도 반영했는데, 생각을 다시 정리하면서 고쳐썼다.”

-그래선지 책 내용이 연재물을 이어붙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연재할 때 처음부터 책을 쓰려고 계획했다. 나는 책을 그냥 쓰는 게 아니라 먼저 연재를 하고 책으로 묶어낼 생각을 한다. 그렇게 하면 연재 과정에서 독자 피드백도 받을 수 있고 좋다. 내년에도 이어령 선생과 같이 문화론에 관해 대담 형식으로 정리해서 월간지에 연재할 계획이 있다. 나는 이 선생이야말로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국내에서 다소 폄하된 감이 있다. 대중을 향해 이야기하다 보니 지식인 사회에서 폄하되는 것도 있고, 천재라서 너무 빨리 내던지면서 막 달려나가다 보니 일반인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담론 차원에서 그 이야기를 번역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내가 그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대담 후에 그 내용을 내 방식으로 내 문체로 쓰는 걸 계획하고 있다.”

-책에도 언급했던데, 이어령 선생이 롤모델인가?

“나는 살면서 누구한테 내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베를린대 전임강사로 있을 때 막스플랑크연구소와 같이 콜로키움을 운영한 적이 있다. 베를린 막스플랑크연구소 콜로키움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오는 자리다. 내가 그런 데서 학자들 만나 얘기해 봐도 그렇게 뒤진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내가 이렇게 좀 건방지다, 지적으로. 뭐, 인격적으로도 건방지게 비칠 수도 있고.(웃음) 그런데 이어령 선생을 만나면 아주 미치겠다.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막연하게 하는 걸 그 분은 어찌 그리 잘 풀어내는지. 그걸 텍스트화하질 않고, 너무 빨리 가서 그렇지. 그걸 내가 배우면 한 단계 질적 도약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욕심이 나는 작업이다.”

-책에는 김용옥도 나란히 언급했다. 김 선생은 그 정도는 아닌가?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니다. 내가 볼 때 동양학을 한 분의 한계랄까 그런 게 보인다. 동양학은 고전 해석학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든 학문이다. 그만큼 생각이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나마 김 선생이 서양 학문과 연계를 해줬고 거기서 나도 지적 자극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내 화법, 그러니까 고담준론을 사람들에게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법은 나도 모르게 그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근데 뭐랄까, 많이 배우기도 했지만 저렇게 하면 안되겠다 하는 점도 보고 있다.”

-이번 책은 제목부터 다분히 학술적이다. 이전 '내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 같은 것은 뚜렷하게 대중적인데. 어떤 변신을 위한 전략인가?

“전략이나 의도는 아니고. 내가 진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독일에서 13년 내 청춘을 거기서 공부로 보냈다. 거기서 박사 하고 전임강사로 있다가 들어왔다. 내가 한으로 남는 게, 결과적으로는 감사한 일이 되긴 했지만, 심리학과 교수가 못 된 것이다. 명지대에서도 교양학부 교수였다. 심리학과에서 다 나를 거부했다.”

-사연이 있나?

“일단 내 성격적 결함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나도 나 같은 사람은 안 쓴다. 언제 어떻게 들이받을지 모르는 사람이니. 지금이야 내가 많이 유순해졌지만. 내 시대, 8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니고 청춘을 보내면서 치열하게 산 사람들 특징이 있다. 막히면 들이받고 돌파하려는 거다. 어떤 분노 같은 게 체득이 돼 있다. 사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세대가 주류가 되니까 일어난 일이다. 여전히 분노가 있다. 나도 나름대로 그 시대를 고민하면서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에, 차분하게 공부해서 교수 된 사람들과는 다른 멘탈을 갖고 있다. 선배 교수들이 봤을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성격을 많이 갖고 있고. 그게 (심리학과 교수 임용 불발 원인의) 60%쯤 된다고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학문적 역량만 보면 얼마든지 인정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또다른 이유가 작용했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더구나 문화심리학이라는 아주 새로운 분야를 했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지금은 문화심리학이 중요한 분야로 자리잡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독일에서 막 생겨서 일부 학자들만 하던 거였다. 더구나 한국 심리학과 교수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내가 한 걸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도 심리학이냐는 투였다. 나는 그때 “그러면 심리학이 하늘에서 내려온 거냐. 심리학의 내용을 누가 결정하느냐”고 따졌다. 내가 보니 국내 학자들은 미국 심리학자들이 결정한 것을 심리학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나는 심리학도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그러면 아예 내가 시대에 맞는 학문을 만들면 될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문화심리학을 시작한 빌헬름 분트도 처음에는 교수가 되고 싶은데 안되니까 새 분과 학문을 만들어서 한 가지 방법론으로 심리학을 갖고 철학과 교수가 됐다. 그러고는 정작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심리학과를 만드는 것은 반대했다. 그 뒤 미국에서 독일에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 철학은 어려우니까 상대적으로 쉬운 심리학을 배워 가서 계량화된 심리학을 발전 시켰다. 그래서 미국에서 심리학 붐이 인 것이다. 내 책 3장에 쓴 내용이다.

미국은 철저하게 심리학의 나라다. 하지만 미국은 철저한 이민 국가이지 민족국가가 아니다. 그 다원성이 독특한 문화적 강점이 됐기 때문에 세계적 주류가 될 수 있었던 거다. 그러나 극히 특별한 영역의 한 가지 사례에 해당하는 미국 심리학을 국내에서는 심리학의 모든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이미 주류가 된 마당에 내가 주변에서 아무리 떠들고 다녀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차라리 하나 만들면 될 것 아닌가 싶었다.

내가 공부한 걸 보면, 굳이 말하자면 지식심리학이랄까, 심리학의 구성사 같은 데 관심이 많다. 또 시대적으로 볼 때도, 요즘 ‘창조’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아무도 풀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창조는 신비화되고 있다. 스티브 잡스 같은 특별한 사람에만 해당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본다. 21세기에 맞는 학문 영역으로 창조 방법론이 성립할 수 있고, 그걸 심리학적, 지식사회학적, 지식구성사적인 것과 연결시키면 뭔가 해법이 나오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2006년 와세다대에 가 있을 때 가리타니 고진과 마츠오카 세이고의 책을 보게 됐다. 눈이 확 뜨였다. 편집 개념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 정도면 언젠가 세계적인 학문이 될 수 있겠다 싶어, 명칭도 고민 끝에 에디톨로지라고 붙였다. 찾아보니 누가 최근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긴 하던데 내 얘기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이제 에디톨로지라는 학문을 시작한 것이다.”

-그전까지는 대중적으로 자신을 알리기 위한 작업이었단 얘긴가?

“한국 사회에서 심리학 교수가 못되고 변두리에 헤맬 때는 참 괴로웠다.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그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고민도 많이 했다. 그냥 교양 교수로 있다가 내 인생을 끝낼 건가. 그러기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학계 주류에서 자리 잡을 기회가 박탈됐다면 대중적으로 접근해야겠다 싶었다. 그 결심을 하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힘들었다. 끊임없이 나를 설득하는 과정이었다. 왜냐면 그만큼 학문적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다. 원래 대중적 인기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를 잘 모른 거지. 나 자신을 설득하는 데 한 6개월이 걸렸다. 철저하게 대중적으로 가자, 쪽팔려도 할 수 없다, 설득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기도 했다. 화를 못 참아서. 그 대신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대중적인 목소리를 내면 내 활동 영역이 다르게 열릴 거라고 생각했다. 활동도 그렇게 했다. 책도 그렇게 썼고. 하지만 제목을 대중에 어필하게 썼다고 해서 내용이 함량 미달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중적인 담론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목적이 내겐 있었다. 그 목표가 1차적으로는 어느 정도 달성이 됐다. 그러고 나니 내 개인적인 삶의 고민들이 생겨났다. 교수를 계속해야 하나, 나아가 이제 100세 시대가 될텐데 나머지 50년을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는가 이런 문제들 말이다. 시기적으로 일본 안식년과 겹치면서 자유로워지니까 이제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뭐냐, 새로운 학문을 해보자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유학 후 귀국해서 당했던 주변부 지식인으로서 느꼈던 한계에 종지부를 찍는 역할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내본 것이다.”

-학술서라고 하기엔 여전히 대중적으로 배려를 많이 한 것 같다.

"그게 굉장히 힘들었다. 대중을 배려한다는 게. "

-그러다 보니 학술서로서의 체계나 짜임새는 부족한 감도 있다.

“그건 내가 얘기한 핵심을 제대로 이해 못했기 때문이다. 내 책에 썼지만, 전통적인 계층적 지식 구조를 갖고 책을 쓰려고 했다면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는 그런 지식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하이퍼텍스트 사회다. 하이퍼텍스트적 지식을 근대적 지식 구조로 만들어내는 것은 바보짓이다. 지식은 이미 바뀌었다. 황우석 사태, 미네르바가 뭘 얘기하나. 계층적 지식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그런데도 새로운 시대, 세상의 변화를 담아낸 지식 구조는 나온 게 없다. 나는 이번 책에서 그걸 잡아내기 위한 모든 주제를 담아서, 편집이라는 행위의 과정을 밝혀낸 것이다. 그걸 계층적 구조로 풀어내라? 그런 방식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내가 이 책도 시작부터 끝까지 차례로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자유로운 독서법을 권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어떤 대목은 연속성이 끊겨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느낌도 준다.

"하이퍼텍스트는 클릭만으로 텍스트 사이를 넘나들게 한다. 인터넷 시대에 지식을 습득하는 구조는 내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런 구조로 구성한 것이다. 사실은 내 책의 챕터 하나하나가 책 한 권짜리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영특한 지식 장사꾼이라면 한 챕터 내용을 가지고 책을 하나씩 썼을 것이다. 그만큼 개별로도 충분히 얘기가 되는 것들이다. 내 서술 방식에도 좀더 관심을 갖고 봐줬으면 좋겠다. 이제 근대적인 계층적 지식 구조로 세상을 봐서는 안된다. 그러면 절대 창의적이 될 수 없다. 예전 방식으로는 연역과 귀납의 순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례로 법칙을 얘기하고, 법칙으로 사례를 설명하면 새로운 게 안 나온다. 순환할 뿐이다. 자기 순환과 반복으로는 창조적이 될 수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서술 방식의 실험 중에는 무한도전 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자막 넣기도 있다. 중간중간에 가벼운 말로 추임새를 넣는다. 그러다 보니 어디까지가 정설이고 이론이고 '구라'인지 불분명하게 느껴지곤 한다.

“책의 편집은 다 내 것이다. 팩트는 확인된 사실이지만, 팩트와 팩트를 연결시킨 방식은 다 내 것이란 얘기다. 가령 일본에 ‘공부방’이라는 이름의 러브호텔이 있다는 것은 팩트다. 일본 가옥구조가 옆방 소리 다 들리게 돼있다는 것도 팩트다. 이 두 가지를 연결해 ‘일본에서 러브호텔 문화가 시작된 이유는 가옥구조 때문’이라고 유추 해석한 것은 내 생각이고 편집 능력인 거다.

사실 지적재산권이라는 게 최근에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수단이다. 암튼 내 책에서는 내 고유한 편집의 생각들, 거기다 초점을 맞췄다. 과거 대학의 지식이 권위를 질 수 있었던 것도 논문의 미주-각주라는 대단히 창의적인 방식 덕분이었다. 일반 텍스트는 선형으로 지식을 표기하는 방식이었는데, 미주-각주 형식은 새로운 지식이 창조되는 방식이었다. 출처를 정확히 밝히는 식으로 눈문 작성 요령을 표준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

-그렇더라도 학술서라면 이론을 제시하고 거증을 하는 방식을 취해야 하지 않나?

“검증가능성, 객관성의 신화는 이미 깨졌다. 그 뒤에 칼 포퍼의 반증가능성이 등장했고, 객관성은 상호주관성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 마저도 설명이 다 안된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는 것은 편집 가능성이다. 과거에 일어났거나 지금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가능하지도 않지만), 이제는 미래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 좋은 학문이라는 얘기다.”

일리(一理)와 진리를 구분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은 김영민 교수의 기발한 구분을 인용한 것인데, 이제는 진리의 시대가 아니다. 우리는 진리를 다 확증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다. 그 대신 내 경험을 토대로 일리가 있고, 설득력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걸 가지고 계속 미래를 향해 나가는 거다. 사회적으로도 설득력 있는 얘기를 자꾸 만들어내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가 된다는 얘기다. 이걸 확증하자고만 달려 들면 곤란하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아무리 옳은 것도 내가 받아들이기 싫으면 안 받아들인다.”

-그런 경우에 이론가와 사기꾼의 차이는 뭔가? 다들 옳다고 믿으면 옳은 것인가?

“아니지. 사회적 가치를 갖고 얘기해야지.”

-사회적 가치의 근거는 뭔가?

“사회구성원이 합의하는 가치가 있다. 그게 사회적 담론의 수준을 이루는 것이다. 팩트 확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 이뤄내느냐는 것이다. 사회 담론이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느냐가 그 사회의 미래를 보장해 준다. 지식인으로서 내 역할은 여기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공유할 가치가 있어야 서로 간의 소통이 가능해진다. 이건 설득이자 합의의 영역이다. 근대적 과학관, 진리관과는 다르다.”

-책의 본문 중에 깨알처럼 등장하는 성적(性的)인 이야기나 은유도 전략적인 건가?

“그건 철저하게 그런 거다. 이유가 있다. 창조는 철저히 미학적인 것이다. 창조경제가 지금 이대로는 어려운 게 경제학적으로만 봐서 그런 거다. 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미학의 핵심은 뭐냐. 에로티시즘이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섹슈얼리티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의 창조적 아이디어의 원천은 감정이고 정서다. 이성적 논리는 순환 구조다. 결코 창조적일 수 없다. 순환 논리의 틀을 벗어나게 하는 것은 정서적 충격인데 심리학적으로 봤을 대, 그 핵심이 섹슈얼리티다.

한국 사회가 왜 창의적이지 못하고 갖가지 성추문에 휩싸이나. 섹슈얼리티가 기호학적으로 매개돼 문화적 담론의 수준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말초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어서 그런 거다. 룸살롱에서는 그렇게들 놀면서, 어느날 갑자기 폼잡고 창조를 얘기하자니 안되는 거다. 정서적인 영역에서 자유로움과 풍요로움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할 때 가장 핵심적인 게 뭐냐. 이쁜 걸 이쁘다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제대로 영역 설정이 안되니까 엉뚱한 데서 성추행이나 하고 그런다. 그래서 일부러 내 책에서는 ‘어렵고 수준 높은’ 얘기를 하면서도,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재밌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을 실험하는 것이다. 모든 영역에서 그런 이야기에 대해 좀 자유로워지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재밌어지고, 따뜻해질 것 같다. 지금은 너무 경직돼 있다.”

-본문 중에 친구나 아내 이야기, 심지어 본인의 사례를 자주 인용한다. 고담준론의 세속화랄까, 공중에 떠있던 얘기를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식이다.

“그건 김용욕 선생한테 배운 것이다. 나로서는 김 선생이 글에서 ‘나’를 학문적 주체로 이야기하는 게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한테는 약간의 애증이 교차한다. 좋아하면서도 지금 하는 건 맘에 안 들고 그렇다.”

-어떤 부분 말인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발언들 말이다. 훨씬 더 세련되게 할 수 있을 텐데. 비판하는 것은 오케이다. 당연히 해야 한다. 하지만 방식에 대해서는 왜 저렇게밖에 못하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내 안에 김용옥적인 게 많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 김용옥적인 것과 이어령적인 게 막 섞여 있는데, 애정은 김용옥 쪽에 더 많이 있고, 부러운 건 이어령 선생 쪽이 더 많은 것 같다. 그 교차점이 나인 것 같다.

하여튼 그 분 글쓰기가 나한테 충격이었는데, 그런 글이 잘 읽히더라. 내 얘기로 풀어가니까 그런 거다. 남이나 제 3자 얘기를 갖다 놓으면 집중이 안되는데 내 생각을 들어봐 라고 말을 걸면 귀가 솔깃해진다. 결국은 학문이라는 게 생활 속에서 얘기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글쓰기의 지향점은 유럽의 주말 신문이다. 내가 독일 있을 때 주말 신문이 너무 좋았다. 문화, 정치, 책, 영화, 음악 섹션별로 이만큼 두껍게 나오는데, 그걸 주말 내내 커피숍에서 읽는 문화가 너무 부러웠다. 우리는 왜 안 되나. 그 이유 중 하나가 지식인의 직무유기다. 주말 섹션에 읽힐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나. 나도 학문적으로 폼 잡고 쓰려면야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책에도 일부러 한 단락을 그렇게 썼더라.

“맞다. 의도적으로 짜증나게. 그렇게 쓰면 아무도 안 읽는다. 논문 영역에서는 몰라도, 일반 독자들 상대로는 그래서는 안된다. 지식과 일반 담론이 왜 연결이 안되느냐면 결국 글쓰기의 문제다. 왜 언제부터 주체를 제외한 글쓰기가 시작됐나. 그게 객관성의 신화 때문에 그런 거다. 주관을 배제하려 드니까 그런 거다. 그런 신화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이론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이래 자연과학에서도 끝났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1960년대 시작해서 2000년대초까지도 그렇게 치열하게 논쟁해서 결론이 났는데, 글쓰기는 왜 여전히 그 모양이냐는 거다. 그러면 내가 그걸 한번 해보이겠다 이거다.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재밌어 하고 관심을 갖더라. 이입이 되는 거다. 나는 새로운 글쓰기의 탐색을 하고 있고, 이건 김용옥한테서 배운 거다.”

-어디선가 '지식인 코스프레'라고 한 말이 그 뜻인가?

“그렇다. 그 말은 처음에 농담으로 한 건데, 괜찮은 농담인 것 같다. 지식도 재밌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다. 어려운 이야기도, 가령 내 책에서처럼 개인의 편집사로 풀어내면 훨씬 쉽고 재밌게 할 수 있지 않나.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으면 우리 주말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지겠나. 그저 모이면 내편네편 나뉘어 싸우거나, 무한도전 본 얘기 하거나, 폭탄주 마시거나 하면, 이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결국 지식인의 계몽적 역할을 얘기하는 건가?

“아니, 나는 계몽적인 역할 같은 거 진짜 싫어한다. 내가 교수를 그만 둔 이유 중의 하나도 그것이다. 나는 근대적인 학습 체계,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체계를 싫어한다. 나는 교육도 일종의 상호 논의와 협상의 과정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의 담론 수준을 끌어올린다고 했는데 계몽 아닌가?

“단어 사용의 한계이기도 한데, 가르친다기보다, 대중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를 끊임없이 던진다는 의미다. 내 얘기도 한번 들어봐 달라는 얘기다. 그래서 내 얘기가 수용되면 적어도 이야기의 주제가 다변화하지 않겠나 이거다.”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을 얘기할 때 계몽을 빼고 나면 다들 다양성, 다변화에 대한 기여를 얘기한다. 그게 최선의 답일까?

"그게 행복하게 사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들이 왜 행복해 하지 않나. 우리 사회가 그만큼 재미가 없어서 그렇다. 재미란 게 뭔가? 내가 생각해보니 스토리다. 얘깃거리가 많아야 재밌는 거다. 할 얘기가 많아야 재밌는 사람이고 재밌는 사회다. 성공과 비성공의 기준은 돈 많이 벌었느냐가 아니다. 나도 재벌 친구가 많다. 하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얘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돈이 없어도 할 얘기가 많으면 재밌다. 중요한 것은 내 얘기를 남들이 들어줘야지. 그러려면 나도 남들 얘기를 잘 들어야 하고. 그런 얘기를 다양하게 주고받을 수 있을수록 재밌어지는 거지. 축구를 왜 보나. 연속극을 왜 보나. 보고 나서 다른 사람과 수다 떠는 게 재밌는 거다. 그게 진짜 목적이다. 한국 사회 문제는 얘기 소재가 그것밖에 없다는 거다. 다른 걸 던져줄 수 있어야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지식인들이 왜 그걸 안 하느냐 이거다."

-지식인의 책무로 사회 정의를 꼽기도 하는데.

“당연히 해야지. 그런데 그 얘기는 너무 많이들 한다. 아니 이야기가 다양해야지, 우리 삶과 사회를 구성하는 게 그것만 있냐 이거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 중의 하나다. 나도 그런 문제에 대한 견해가 있고, 얘기를 하자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 그런 단어는 나도 다 갖고 있다.

-그건 단어 구사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안에 대한 입장의 표명이고, 그래서 어려운 문제다.

"정치적 입장을 표시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고, 그게 보수적인 것이라고 밀어붙이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본다. 왜 꼭 정해진 논의 구도에서 입장을 표시하도록 강요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게 변화에 열려있지 않고 미래지향적이지 않은 태도라고 본다. 지금의 것, 현재 기준을 가지고 나누고 재단하는 태도 말이다. 가령 내가 어렸을 때 산아제한이 있었다. 그땐 애를 많이 낳으면 무조건 나쁜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뭐냐? 다시 낳자고 그러지 않나. 불과 20-30년 만에 옳다고 강권했던 것이 뒤바뀐다. 내가 독일에서 겪은 것도 마찬가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걸 직접 봤다. 아, 그 어마어마한 이데올로기가 이렇게 간단히 끝나버리는구나 싶었다. 지금 우리가 죽을둥살둥 하고 싸우는 주제들도 불과 10년만 지나도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가 통일이라고 본다. 꼭 통일이 되야 된다고 본다. 한 민족이 돼야 좋다는 게 아니라, 그래야 한국 사회의 담론이 경직된 분류 방식에서 벗어나서 한 수준 올라가고,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자신을 두고 '파마 전후'로 나뉜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예전에 예능 프로에 나가서 재밌게 얘기하면서 한 말인데. 사실 내가 인상이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다. 지금은 미디어나 카메라 샤워를 많이 받아서 연기를 할 수 있게 됐고, 삶도 행복하니까 편안한 인상이 됐는데. 사실은 아까 얘기한 대로 귀국해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정말 힘든 과정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인상이 진짜 더러워졌다. 사람들 만나면 굉장히 공격적이었고, 학회 가면 다들 나를 피해 다녔다. 내가 질문하면 다 작살을 내버리니까. 내 구라에 작살 안 난 사람이 없었다. 왜 사람들한테 불필요하게 공격적이 되지, 고민도 좀 했다. 그러다가 인상부터 좀 기분좋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내 맘도 편해지고. 그래서 외모에 변화를 주려고 파마를 한 건데, 뭐 기분좋은 인상이 된 것도 같다.”

-'목사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맘고생을 많이 했다고 썼던데, 지적인 여정에서 신앙의 문제로 영향 받은 것은 없나?

“그건 여전히 매듭을 짓기 어려운 부분이다. 내 인생은 아버지와의 정신적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사 아들은 대개 모 아니면 도다. 내 자신에 대해 지금은 그 문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굉장히 기특하게 여기는데. 자라면서 제일 듣기 싫었던 게 “목사 아들이 왜 이래”라는 소리였다. 안 겪어보면 모른다. 엄청난 스트레스고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된다. 나는 다행히 그 투쟁을 잘 해냈다. 부모님한테 감사한 이유도 그 투쟁의 기간을 잘 참아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자라면서 유기 정학, 무기 정학, 제적을 다 당해 봤다. 대학 제적 경우는 시대적인 이유, 학생운동과 관련도 있지만, 개인적인 성장사로 보면 목사 아들로서 가진 트라우마가 큰 작용을 했을 거다.”

-학생운동 과정의 제적이나, 도피 유학, 교수임용의 좌절 같은 걸 보면 의외로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내 또래가 겪을 만한 어지간한 고생은 다 겪었다고 본다."

-언제가 제일 힘들었나?

“지금 생각해 보면 다 힘든 일들인데,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물론 괴롭고 힘들었지만 남들도 다들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다. 지금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못 할 것 같다. 특히 군대에 강제징집된 기억이 그렇다. 폭력에 내가 무너지고 비겁해지는 것은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목사 아들’이란 말처럼 누구 아들로 불리는 것도 짜증 나지만, 그거야 견딜 만한 자존심 문제다. 누구나 누구의 아들이니까. 근데 폭력 앞에 비겁해지는 것은 정말 챙피하다. 그 다음으로는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다. 혼자 독일 유학 갔을 때 너무 외로웠다. 지금 일본에 가 있는 것도 독일에 가면 지적으로 훨씬 더 풍요롭게 지낼 수 있겠지만, 외로워서 오고 싶으면 시간이 너무 걸릴까봐 그런 거다.”

-의외다. 혼자서도 재밌게 잘 지낼 타입 같은데.

"아니다. 견딜 만한 외로움을 택한 거지. 결국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외로움을 잘 관리하는 것인 것 같다. 외로움에서 도피하기 위해 관계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나중에 더 외롭다. 책에도 썼지만, 인생에서 한 순간은 격하게 외로운 시간을 가져야 외로움한테 호되게 당하지 않는다."

-학자나 지식인을 만나보면 대체로 지적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 있고, 다른 한편 자기현시욕이 강한 사람이 있다. 어느 편인가?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꽤 강한 것 같은데.

"그렇다. 헤겔식 표현으로 인정 투쟁인데, (한참 생각)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어떤 지식인이나 갖고 있는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얘기에 귀를 기울여 줬으면 좋겠다는 욕심. 나는 그런 자기현시욕을 인정한다. 누구라도 부정하면 안된다."

-안 그런 사람도 있지 않을까.

"안 그런 척하는 거겠지. 인간의 기본 욕망이 인정 투쟁이다. 사회적 인정 투쟁이다."

-자신의 깨달음에 족하지 않고 굳이 남의 인정을 받으려드는 것은 욕심 아닌가?

“그게 내가 갖고 있는 소통의 수단이니까.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내 얘기에 귀기울인다는 것이니까. 그걸 자기현시욕으로 환원시키면 우스워지지만, 나는 그것이 인간의 기본 욕망이고, 그것이 없는 것처럼 말하면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다.”

김정운 소장의 작업실

-평소 어떤 깨달음의 원천은 뭔가? 책? 명상? 사람?

"과거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일본에 있는 동안에는 산책이다. 에디톨로지적으로 봤을 때 생각이 편집과정이라고 한다면, 지금 내 경우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가서 돌아오는 5킬로미터 정도의 산책 중에 이뤄진다. 딱 한 시간 거리다. 그렇게 걸으면 너무 기분이 좋다. 걸으면서 생각을 진짜 많이 한다. 생각이 날 때마다 내 에버노트에 담아 놓는다. 그게 글감이 되기도 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의 계획이 되기도 한다. 산책 도중에 소프트 아이스크림 먹는 게 너무 행복하다. 그걸 사먹는 게 오히려 1번 목적인지도 모르겠다. 북해도 아이스크림인데,(군침을 삼킴) 학교를 오가는 중에 사서 먹고 나면 오늘 내가 또 해냈구나 싶은 기분이 든다."

-일본엔 언제까지 머물 계획인가?

"원래 내년 2월에 들어오려고 했다. 3년 혼자 있으니까 너무 힘들더라. 밥 해먹는 것도 빨래도 귀찮고. 근데 3년 동안 이 책 쓰고 번역책이 나오면서, 문득 좀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1-2년 더 있으면 생각해둔 책 두세 권을 더 쓸 수 있겠다 욕심이 확 생긴 것이다. 그래서 겁은 나지만 책 에필로그에다 일본에 더 있겠다고 쓴 것이다. 내가 이렇게 충동적이다."

-스스로 공개적으로 못을 박은 거네.

“사람들이 내 인생을 얘기하면 용기있고 과감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겁이 굉장히 많다. 무서워서 겁에 질려서 일을 저지르는 타입이다. 교수를 때려친 것도 내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밀려들면서 ‘에이 씨’ 이러면서 집어던지듯이 내린 결정이었다.”

-앞으로 쓰려는 책들은 어떤 건가?

"하나는 내년에 이어령 선생과 대담 연재해서 쓰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의미있고, 개인적으로도 너무 신나는 일이다. 또 하나는 지금 쓰는 조선일보 칼럼을 내년말까지 하면 훌륭한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은 독일 바우하우스에 대한 책이다. 몇 년째 준비하고 있다. 그전까지는 바우하우스를 건축이나 미술 하는 사람이 접근했기 때문에 제대로 설명이 안됐다. 사실은 거기서 어마어마한 인식 혁명이 일어났다. 나는 근대의 시작이 프랑스혁명이 아니라고 인상파라고 보는데, 그 후 예술이 산업과 만나면서 경계들이 다 무너졌다. 그게 바우하우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 지적 흐름을 심리학적으로 풀어보려고, 3년째 방학 때마다 사진작가 윤광준 선생과 파리, 비엔나, 뮌헨, 라이프치히, 바이마르, 베를린을 다닌다. '김정운 루트'다. 다닐 때마다 병 걸려서 올 정도로 고생을 하는데, 너무 재밌다. 책을 사와서 거실에 모아 놓은 것만 해도 꽂을 때가 없을 정도다. 그거 공부하고 책 쓰는 게 마지막 과제다.

한국에 오면 바빠서 못 쓸 것 같다. 외로워서 사람들을 만나지만 만나고 나면 매번 후회가 된다. 내가 소진된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도 새 책이 나와서 이러고 돌아다니지만, 오늘도 마누라한테 ‘여보 나 힘들어, 일본 가고 싶어’ 그러고 나왔다. 오늘 일정만 해도 미친다. 이거 끝나면 물감값 벌어야지, 책 봐야지, 광고 녹음해야지, 친구 교수들과 저녁식사 해야지….”

-장기 계획이나 목표가 있나?
"그런 건 없다. 장기 계획이란 건 다 뻥인 것 같다."

-인생의 목표 같은 것도 없나?

“재미와 의미의 인터섹션을 계속 추구하는 거다. 내가 갖고 있는 재미가 사회적 의미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늘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이런 책도 쓰는 거다. 내게 재미가 있어도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지 않으면 재미는 금방 사라진다. 나의 재미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한다.”

-재미 외에 의미까지 굳이 붙잡아야 할 이유는 뭔가? 혹시 종교적 믿음과 관련 있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연결시키면 반감부터 일어난다. 근데 부정하지는 않는다. 옛날엔 다 부정했는데, 지금은 좀 자유로워진 것 같다. 또 아버지와 투쟁하는 관계에서 이제는 넘어선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엔 아닌 것도 같고. 아버지와의 투쟁, 그게 나를 만든 것 같다. 아버지가 올해 여든 다섯인데, 아직 정정하시긴 한데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요즘은 자꾸 날 찾는다. 오시겠다고 하고. 자라면서 내가 워낙 부딪혔는데 지금은 이렇게 칼럼도 쓰고 보란 듯이 사는 게 좋으신 거지. 이제는 그 부분에서 좀 자유로워지는 듯해서 마음의 평화가 있다.”

김정운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디플롬, 박사)하고 그곳에서 전임강사로 있다가 귀국해서 명지대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일본 교토사가예술대 단기대학부에서 일본화를 공부하고 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문화심리학자. 국내 최초로 여가학석사(MLS) 과정인 여가정보학과를 개설했다. 자칭 일과 삶의 조화를 중요시하는 '휴테크' 전도사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쌤앤파커스), '남자의 물건'(21세기북스) 같은 베스트셀러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