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김모(41)씨는 대기업에서 차장으로 근무하는 아내와 맞벌이를 한다. 김씨 부부의 연봉을 합치면 1억8000만원쯤 된다. 김씨 부부는 서울 서초구의 아파트에 전세 보증금 7억4000만원을 내고 산다. 재계약을 하면서 4년간 전세 보증금 2억원을 올려줬지만, 앞으로도 집을 살 계획은 전혀 없다. 그는 "집값의 70%만 내면 살 수 있는데 내 집이 아니면 어떠냐"며 "전셋집 살면 집값 떨어질 걱정 없고, 세금도 안 내도 되는데 집을 왜 사느냐"고 말했다.
지난 4~5년간 전세금이 해마다 10~15%씩 치솟고 있지만, 전세를 떠나지 않는 계층도 늘고 있다. 더 이상 아파트가 재산 가치를 올릴 수 있는 '투자 상품'으로서 매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서초 등지의 새 아파트 중에는 85㎡ 크기의 아파트 전세 가격이 보통 7억~8억원에 이르지만 월세가 없는 순수 전세 아파트는 매물이 나오기가 무섭게 사라지고 있다.
5일 '부동산114'의 조사에 따르면 서울 노원·성북·강서·영등포구 등 서민 주거 비율이 높은 서울 11개 구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강남 지역의 전세금보다 더 저렴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114 함영진 리서치센터장은 "서울 아파트에서 월세를 내지 않고 순수 전셋집에 거주하는 계층은 자기 자본이 풍부하고, 신용도도 높은 계층이 대부분"이라며 "전세는 더 이상 무주택 서민들만의 전유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고가 전세라도 '무주택자', 세금·금융·청약 제도에서 유리해
주택 시장이 이처럼 변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주거 정책, 주택 금융, 세제는 모두 여전히 전세 세입자는 일단 '무주택 서민'이라는 전제로 만들어져 있다. 전세는 세금에서 유리하다.
5억원짜리 집을 구입하면 취득·교육세(거래 가격의 1.1%) 550만원을 내야 하고, 재산세도 매년 77만원 정도 내야 한다. 하지만 같은 5억원의 비용을 들여도 전셋집을 구하면 취득·등록세나 재산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아도 된다. 전셋집에 살다가 지난해 초 은행 대출 1억5000만원을 받아 서울 강서구의 아파트를 4억원에 구입한 회사원 윤모(45)씨 "강남에 7억~8억원짜리 전셋집에 사는 사람은 한 푼도 내지 않는 재산세를 왜 나 같은 사람이 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전셋집을 구할 때는 정부의 금융 지원도 확실하다. 주택금융공사의 경우 4억원 이하 전세 주택은 보증서를 발급해주고, 소득 수준을 따지지 않는다. 서울보증보험은 전세금 규모나 소득에 관계없이 전세 보증서를 발급해준다.
정부가 발급해준 보증서 덕분에 전세 대출은 일반 신용 대출보다 0.5%가량 저렴한 연 3.7% 금리 수준에 돈을 빌릴 수 있다. 하지만 집을 살 때는 가구 소득이 6000만~7000만원 수준이 넘어서면 정부의 금융 지원이 완전히 사라진다. 또 강남의 비싼 전세에 살아도 무주택자로 분류돼 아파트 청약 등에 아무런 제한이 없지만, 3억원짜리 아파트라도 갖고 있으면 '유주택자'로 분류돼 청약 때 각종 제약을 받는다.
남희용 주택산업연구원장은 "현재 우리 정부의 주거 정책과 규제, 금융·세제 지원 제도는 어떤 면에서 보면 전셋집에 거주하는 부유층에게 과도한 혜택을 주고 있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고소득층 전세 주택으로 몰려들며, 중·저소득층 월세로 밀려나
고소득 계층이 전셋집으로 몰려드는 현상은 2000년대 중반부터 이미 시작된 흐름이다. 국토교통부 조사에 따르면 수도권은 2006년과 2012년 사이 고소득층의 전세 주택 거주 비율이 6.2% 늘었고, 자가 주택 거주 비율은 오히려 6%가량 줄어들었다.
고소득층이 전세 시장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같은 기간 중산층과 저소득층이 월세(보증부 월세 포함) 주택에 거주하는 비율이 각각 5.1%, 9.7% 늘었다. 올해 들어 서울에서 거래되는 임대 주택은 40%가량이 보증부 월세 형태인데, 이는 중산층이나 서민층이 순수 전세 주택에서 월세 주택 시장으로 밀려난 결과로 해석된다.
국토연구원 박천규 박사는 "우리 사회에선 집을 샀다는 것만으로 '부자'로 보거나, 2채 이상 보유하고 있으면 '투기꾼'으로 보는 편견이 강하다"며 "정부의 주택 규제와 금융·세제 지원 정책이 냉정하게 현실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