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에 구부정하게 솟은 낙산은 서울의 안쪽에 있는 4개의 산 중의 하나 입니다. 산의 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아 예전에 타락산 또는 낙타산으로 불리다 지금은 낙산으로 불려지고 있는 산입니다.
조선 건국 후 도성을 세울 때 좌청룡으로 삼았던 산으로, 서쪽의 인왕산과 대치되는 동쪽의 산입니다. 조선 시대 한양 성곽이 낙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졌으며, 정상에는 현재 낙산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성곽길 주변에 있는 '한양역사박물관'이라든가, '잘살기기념관'이라든가, '이화벽화마을' 같은 곳을 먼저 둘러보면 좋습니다. 특히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을 향해 오르다 좌측으로 빠지면 나오는 이화벽화마을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화벽화마을로 가는 가파른 길

달동네를 연상시키는 가파른 계단에 난데없이 꽃 그림이 펼쳐져 있는가 하면, 파란 수족관이 되어 물고기가 떠다니기도 하고, 밋밋했을 법한 벽에는 하얀 날개가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화벽화마을의 잉어 그림

'1박2일' 프로그램에서 이승기가 미션을 성공하면서 알려진 곳이라고 하면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지금은 내국인보다 외국인들의 옷깃이 더 많이 스칠 정도로 해외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이화벽화마을의 중국 관광객들

낙산공원의 여름 풍경도 이제는 모두 가을로 바뀌었습니다. 꽃사과나무는 졸지에 예술작품 겸 과학작품이 되어 힘겨운 근력운동 중입니다.

낙산공원의 꽃사과나무 작품

보는 이에 따라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세상 살아가기가 힘든 자신의 처지가 느껴져서일까요? 다들 물이 담긴 병을 한가득 매달고 있는 나무가 힘들겠다는 말을 합니다.

꽃사과나무는 봄에 가지 가득 다닥다닥 피어나는 꽃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이맘때면 꽃의 수만큼이나 많은 사과 모양의 작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다는 모습이 아름다워 관상수로 인기가 높습니다.
품종에 따라 꽃의 색이 조금씩 다르고 열매도 약간씩 다릅니다. 드물게 사과처럼 단맛이 나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시큼한 맛이 강한 편입니다. 하지만 색이 예쁘다 보니 투명한 유리병에 술로 담가놓으면 장식용으로 좋습니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예술로 승화된 낙산공원의 꽃사과나무에는 '가을 담은 유리병'이라는 작품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 밑에는 빛의 굴절 현상을 이해하고 미술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병마다 단풍잎과 열매를 담아놓은 것이 투명한 통조림 같습니다.

낙산공원의 꽃사과나무 작품의 유리병

가을에 읽기 좋은 이상(李箱)의 「산촌여정」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옆을 조심스레 스쳐가는 젊은 여인에 대한 묘사에서 '나를 아니 보는 동공(瞳孔)에는 정제(精製)된 창공(蒼空)이 '간쓰메'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간쓰메는 통조림의 일본어로, 나를 쳐다보지 않는 여인의 눈에 비친 푸른 하늘을 통조림에 비유한 표현입니다.
지난주에도 소개한 바 있는 이상의 「산촌여정」에는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에 적을 만큼式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때 참 무슨 재조(才操)로 광음을 헤아리겠습니까?'라는 절묘한 표현이 줄줄이 나옵니다.
문학 좀 했다는 몇몇 이들만 아는 보물 같은 수필이라고 생각했거늘 우연히 현재 고1 국어교과서에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낙담했습니다. 공동의 소유가 되었으니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가을도 공동의 소유지만 처음부터 공동의 소유였으니 낙담할 일 없어 좋습니다.

흔한 공원수 중 하나인 느티나무도 낙산공원에서는 걸작으로 변신한 모습입니다.

낙산공원의 느티나무 작품

'한지 이파리 빛미술'이라는 작품명을 내걸고서 꽃사과나무보다는 한결 가벼운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는 누런 단풍이 든다 하여 '눋(黃)+홰나무(槐)'라고 하던 것이 변한 이름입니다.
단풍이란 같은 나무라 해도 개체나 환경에 따라 약간씩 다른 색을 내는데, 느티나무도 붉은색이나 갈색 계통의 색으로 물들기도 합니다만 노란색 단풍일 때가 자신의 이름 유래에 가장 어울리는 단풍이라 하겠습니다. 느티나무는 흔히들 괴목(槐木)이라도 합니다.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에는 식물분류학이라는 학문이 없었는 데다가 한글도 없었기에 한문으로 식물 이름을 적다 보니 하나의 글자로 여러 식물을 나타내곤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고문서에서는 어떤 식물을 표기한 글자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괴(槐)자도 그러해서 회화나무를 나타내기도 하고 느티나무를 나타내는 데 쓰기도 합니다.

혜화문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소소한 예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산길에 설치된 미술작품들

가다 보니 이곳의 설치미술을 담당하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바쁜 손놀림이 보입니다. 혹시 어쩌면 그냥 구청 직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황갈색으로 곱게 물든 팥배나무에다가는 만국기를 설치할 모양입니다. 낙산이 이제는 만국의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되었다는 느낌이 제대로 듭니다.

낙산공원의 팥배나무 작품 설치

한양도성 성곽길 낙산 구간의 백미는 혜화문 쪽으로 내려가는 하산 코스입니다. 성북 쪽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어 좋기도 하지만 성곽길의 곡선미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구간이라 갈 때마다 매번 감탄사가 절로 납니다. 서울에 있는 여러 아름다운 길 중에서 단순히 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저는 이 길을 꼽겠습니다.

서울 한양도성 낙산 구간에서 혜화동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

이곳 성곽에는 팥배나무와 가죽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서서 순성객들을 내려다봅니다. 그들에게도 가을이 왔으나 그늘진 곳에 있어서 그런지 약간은 좀 더디게 오는 것 같습니다.
봄에도 보고 여름에도 보고 가을에도 본 이 길을 겨울에도 보려면 아이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경사가 좀 있으니까요.

약간은 가파른 경사가 있기에 이 길이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 역경이 있어야 아름답게 빛나는 우리네 인생길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가을이 이제 달력 한 장만큼만 남았습니다.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낙산 구간 성곽길을 한번 걸어보시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