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IT업체인 A사는 지난 9월 기술력을 인정받은 소규모 비상장 회사 1곳을 인수하려다 무산됐다. 인수하려는 회사의 기업 가치를 400억원 정도로 산정하고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이었는데, 중국 기업이 끼어들면서 협상이 깨졌다. 뒤늦게 뛰어든 중국 기업은 A사가 제시한 인수 가격의 5배인 2000억원을 제시했다. A사가 인수하려던 회사는 중국 기업과 인수 협상을 진행 중이다. A사 관계자는 "우리가 겪었던 것처럼 중국 자본이 한국 기업을 엄청난 웃돈을 주고 사들이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올 초 국내 엔터테인먼트업계의 최강자인 CJ E&M이 중국의 IT업체 텐센트의 투자를 유치할 때도 이처럼 예상을 뛰어넘는 '빅 머니(대규모 투자)'가 들어왔다. 텐센트는 CJ E&M의 여러 사업 영역 가운데 게임 부문의 3대 주주로 참여하기로 했다. 기업 가치를 고려했을 때 투자 금액은 1500억원 정도로 예상됐다. CJ E&M의 게임 부문이 성장성과 잠재력은 크지만 2013년 영업이익이 600억원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보니 텐센트의 투자 금액은 예상 금액의 4배에 가까운 5330억원에 달했다. 텐센트는 성장 가능성이 큰 중국의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면 5000억원 정도는 큰돈이 아니라는 식이었다.

차이나 머니, 금융 위기 후 한국 주식·채권 투자 175배 급증

국내시장에 들어오는 차이나 머니는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전인 2007년만 해도 중국이 보유한 한국의 주식과 채권은 1360억원으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금융 위기 이후인 2010년부터 한국에 대한 투자가 급증, 올해 8월 현재 중국의 한국 주식·채권 보유액은 24조원으로 175배 늘었다.

남산 가득 메운 요우커들 - 3일 오후 중국 최대의 명절인 국경절 연휴(1~7일)를 맞아 한국을 찾은 요우커(遊客·중국인 관광객)들이 서울 남산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다. 국경절 기간 한국을 찾는 요우커는 2011년 6만771명, 지난해 11만8503명 등으로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올 들어서도 중국은 한국 채권을 9000억원가량을 더 사들이며 룩셈부르크를 제치고 제2의 한국 채권 보유국으로 올라섰다. 1위 미국과의 격차도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차이나 머니의 공습이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는 데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삼일회계법인 김영현 전무는 "중국이 10여년 전부터 전 세계를 돌며 해외 기업과 자원을 엄청나게 사들인 것을 고려하면 한류 등의 영향으로 이제야 살짝 한국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정도"라고 말했다.

차이나 머니는 기업 인수·합병(M&A) 영역에서도 빠르게 영토를 넓혀가고 있다. 지난달 국내 최장수 유아복 브랜드 아가방이 중국 의류업체 랑시그룹에 인수됐고, 지난해에는 유아복 브랜드 '블루독'과 '밍크뮤'를 보유한 서양네트웍스가 홍콩 기업 리앤펑에, 2012년에는 'BNX' 등을 내세웠던 아비스타가 중국 디샹그룹에 인수됐다. 의류업체뿐만 아니라 대한전선, 팬택 인수전에도 중국 기업의 참가가 점쳐지고, LIG손해보험 인수전에 명함을 내밀었던 푸싱그룹은 현대증권 인수에 가세했다. 유아복에서 게임회사, 증권사까지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차이나 머니의 공습 그래픽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자금, 시장 왜곡 우려도

1997년 외환 위기로 금융시장을 전면 개방한 이후 줄곧 영·미계 자금이 독주하던 국내 금융시장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역기능에 대한 경계심도 커지고 있다. 투자자 다변화와 시장 활성화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중국의 힘이 지나치게 커져서 시장을 교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시장 기능이 왜곡되거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차이나 머니의 힘이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다.

2000년대 초반 중국이 미국 국채를 워낙 많이 사들이는 통에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려도 장기 금리는 올라가지 않고 오히려 떨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당시 연준 의장인 그린스펀이 "(정책 효과가 먹히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말해 '그린스펀의 수수께끼'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중국은 미국과 환율 문제를 놓고 갈등이 벌어지자 미국 국채 대량 매각을 무기로 삼으려 했다.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을 사들이려는 중국 기업의 목적을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중국의 한 섬유회사로부터 한국의 알짜 의료 장비업체 중 사들일 만한 곳을 물색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A자산운용사 대표는 "기술력이 앞선 한국 기업을 사들여 주가 상승 등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